큰형님 새벽에 큰 형님을 만났다. 벌서 27년 전에 이 세상의 강물을 건너가 버린 형님이시다. 어머님과 숙모님, 그리고 돌아가신 둘째 누님이 함께 앉아서 밥을 먹었다. 어머님은 전처럼 무릎을 괴고 앉아 수저를 들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시고, 숙모님은 이 반찬 저 반찬을 뒤적이시며 맛을 보시고, 둘째 누님.. 느림보 창작 수필/축 읽는 아이(나) 2001.07.21
나뭇잎들의 생멸 원리 오늘 날씨가 무척 따가웠다. 첫여름의 더위가 제법 땀을 흐르게 하고 후덥지근했다. 그런 따분한 오후, 아이들은 졸음에 겨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일상적인 인사를 했다. "얘들아, 뭐 화끈한 거 없니? 졸음이 확 달아날 만한 거 말이야. 열 여덟 아가씨들이 침 흘리며 조는 모습은 딱 질색이란 말이야.".. 느림보 창작 수필/물밥(삶과 죽음) 2001.06.28
解憂所에서 산에 가지 못하는 일요일이다. 이 나이에는 조금이라도 땀을 내야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가까운 우암산이라도 가기로 했다. 점심을 먹고 시내버스를 타고 상당공원에서 내려 삼일공원에 올라가려니 진땀이 바작바작 났다. 동상은 넘어진 정춘수 목사의 좌대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아랫배.. 느림보 창작 수필/껍질벗기(깨달음) 2001.06.15
말머리 나침반 내게는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이 있다. 그 중에서 남들이 봐도 부담스러울 정도의 열쇠 고리가 내게는 다른 무엇보다도 소중하다. 출근할 때도 이것을 들고 나가야 하고, 저녁에 집에 들어와도 아주 소중하게 이것부터 챙겨 두어야 한다. 심지어 아침 등산 때나, 저녁에 잠시 바람 쐬러 나갈 때도 .. 느림보 창작 수필/축 읽는 아이(나) 2001.06.09
서리병아리 요즘같이 갑자기 날씨가 싸늘해지면 '서리병아리'가 생각난다. '서리병아리'는 말 그대로 서리 내릴 때쯤 부화시켜서 기르는 병아리를 말한다. 이른봄 열심히 알을 낳던 어미 닭이 "걀걀"하며 앓는 소리를 하면 그동안 모아둔 달걀을 둥우리에 넣어준다. 양지쪽에 개나리가 필 때쯤, 꼭 개나리 색깔처럼.. 비평과 서재/완보 칼럼 2001.06.01
아이들은 해로워 "나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 이것은 어린 날 나의 조급한 소망이었다. 어린 시절의 소망이 '대통령'이 된다든지, '훌륭한 과학자'가 된다든지 하는 그야말로 바람직한 '꿈'에 있지 않고, '어른'이라는 너무도 당연한 것에 있었던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런 일을 이루려면 일단 어른이 되어야 하기 때문.. 느림보 창작 수필/사랑의 방(가족) 2001.06.01
단발머리 2 고등학교 1학년 4월의 토요일 하교길은 솟구치는 호기심으로 아무래도 그냥 집으로 직행하기 어렵다. 더구나, 흐드러지게 핀 왕벚꽃과 내리쬐는 태양으로 겨우내 웅크렸던 검은색 제복이 안으로부터 근질거리면 무슨 일이든지 꾸미게 마련이다. 무심천 제방도로는 지금처럼 도로가 아니고 그냥 제방.. 느림보 창작 수필/축 읽는 아이(나) 2001.06.01
단발머리 3 초등학교 친구들이 만나는 날은 어린날 시집간 누나 오는 날처럼 엷은 흥분이 일어난다. 나는 시간을 잘 몰라서 30 분쯤 늦게 도착했다. 어느 모임이나 늦게 참석한 사람이 환영을 받듯 나도 그렇게 다 모인 다른 친구들의 환영을 받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뜻밖에 여자들이 있었다. 그 중에 노여사.. 느림보 창작 수필/축 읽는 아이(나) 2001.06.01
이런 담배 맛 보셨습니까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그러나 전혀 피우지 않는 것이 아니다. 술좌석에 어울리면 남들을 따라 한두 개비 피운다. 또 학교 일로 속상한 일이 있다든지 때로 공연히 우울할 때 또 한두 개비 빼어 문다. 또 골초 선생님들의 천국인 이 진학지도실에 연기가 자욱해지는 쉬는 시간 10분이 괴로울 때 차.. 느림보 창작 수필/서리와 햇살(교단) 2001.06.01
어머니의 눈물 아침 여섯 시에 아파트 앞산이 젖빛 안개 속에 보일 듯 말 듯할 때면 가을날 이 시간에 이역 만리 먼 길을 떠나신 어머니가 생각난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코가 시큰해지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게 된다. 나의 어머니는 자식을 위하여 당신의 살이라도 베어 먹이실 분이셨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언제나 .. 비평과 서재/완보 칼럼 2001.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