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날씨가 무척 따가웠다. 첫여름의 더위가 제법 땀을 흐르게 하고 후덥지근했다. 그런 따분한 오후, 아이들은 졸음에 겨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일상적인 인사를 했다.
"얘들아, 뭐 화끈한 거 없니? 졸음이 확 달아날 만한 거 말이야. 열 여덟 아가씨들이 침 흘리며 조는 모습은 딱 질색이란 말이야."
"선생님, 우리 그냥 같이 자요"
아이들은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 한 마디로도 똑똑한 우리 아이들은 졸음을 쫓기에 충분했다. 나는 이 오후의 수업으로 '제망매가'를 준비했다. 옛날에 하던 식으로 단어, 표현법, 주제들을 낱낱이 분석하면 틀림없이 아이들을 '고문'하는 것일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古文'은 우리를 '拷問'한다고 하지 않는가?
틀에 박힌 답답한 수업에서 벗어나 보자. 우선 아이들의 책상에 있는 책이나 공책, 다른 참고 서적들을 다 집어넣도록 했다. 아이들은 무슨 좋은 일이 있나 하고 즐거워했다.
'삶과 죽음의 길이 여기에 있으므로 두려워하고'의 '삶과 죽음'을 칠판에 썼다. 그리고 길게 화살표를 몰고 칠판 끝으로 갔다. 거기에 '두려워하고'를 썼다. 그런 다음에 삶과 죽음에 대해 얘기를 나누자고 제안을 했다. 아이들은 일단 따분한 시구의 분석이 아니라는데 흥미를 가졌다.
이 시에서 자아의 갈등 요인은 '죽음에 대한 공포'이다. 갈등은 자아의 소망과 세계의 조건이 조화롭지 못할 때, 다시 말해 삶의 세계가 욕구를 해결해 주지 않을 때 일어나는 정서의 불안정 내지 감정의 무질서를 말한다. 인간은 이 때 감정을 가지런하게 하고 정서를 안정시키려 한다. 이것이 갈등의 극복이다. 제망매가에서는 삶을 지속하려는 욕망, 누이와 이별하고 싶지 않은 욕망과 인간은 어차피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는 피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 앞에 어쩔 수 없어 하는 자아의 갈등과 그 극복 과정을 그리고 있다.
누이의 뜻하지 않은 죽음을 계기로 남의 일로만 여겨졌던 죽음을 체험한 시적 자아는, 깨닫게 된 죽음의 보편성 앞에서 공포와 뼈아픈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자신이 경험한 죽음을 이야기하도록 했다. 어떤 사람은 할머니의 죽음을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토록 자신을 귀여워해 주시던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눈물이 안나와서 혼이 났다는 사람도 있었다. 할머니의 죽음은 그냥 서운함에서 오는 슬픔이다. 자연의 섭리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겪는 섭섭함 그것이다.
어떤 아이는 아빠가 돌아가시는 서러움을 말하며 울먹였다. 그러나 그것은 일찍 돌아가신 아빠의 억울한 삶에 대한 연민의 눈물일 것이다. 작년에 심장 수술 받다 잃은 동생이 있는 연희는 동생의 죽음을 '팔과 다리를 떼어내는 아픔'이었다고 표현해서 모두를 숙연하게 했다. 맞다 그건 아픔이고 공포이다. 동기간의 죽음을 곧 나의 죽음으로 생각하는 아이들이 기특했다.
우리는 '팔과 다리를 떼어내는 아픔'인 형제의 죽음의 공포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 제망매가의 시적 자아는 그의 신앙심으로 '미타찰'의 존재를 믿고 거기에서 누이를 만나 볼 날을 '도 닦으며 기다리겠노라' 고 했다. 나는 '삶과 죽음'아래 '미타찰'을 썼다. 그리고 아까처럼 길게 화살표를 긋고 '기다리겠노라'고 썼다.
'죽음', 그것은 인간의 가장 큰 공포의 대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미타찰'에 대한 믿음은 이 공포의 껍질에서 벗어나 '죽음을 기다리게' 된다. 이 시의 훌륭한 점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모두 한가지에 매달린 나뭇잎이다. 이렇게 만나 아귀다툼하지만 언젠가 '여기 저기'에 '떨어져 날릴' 운명에 있다. 때로는 움이 돋기가 무섭게 태풍에 날려 떨어져 버리기도 하고, 가을이 되기도 전에 여러 가지 시련을 견디다 못해 떨어져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나뭇잎이다. 모두'한 가지에 나고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는' 잎이다. 언제 이른 바람이 불어 올 줄 모르면서도 저희들끼리 아귀다툼하는 가련한 잎이다. 이것이 곧 나뭇잎의 생멸 원리이다.
"애들아, 너희는 윤회설을 믿니? 아니, 來世가 있다고 믿니?"
아이들은 대답이 없다. 이미 숙연해 진 것이다. 막 잎이 피어나다 떨어져 버리는 나뭇잎 같은 친구의 죽음을 누군가 얘기할 때 눈물을 닦는 아이들도 있었다.
정말로 來世의 존재를 믿는다면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 같았다. 제망매가의 가치는 여기에 있다. 인간은 하나의 나뭇잎이라 생각한 것, 우리는 언젠가 아니 바로 며칠 후에라도 나뭇잎 날리듯 그렇게 흩어질 수 있음을 깨닫게 한 것, 그러나 그 죽음의 공포는 곧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 준 것이다.
우리는 눈을 크게 떠야 한다. 그래서 한 쪽 세계만 보고 살아온 불구에서 벗어나야 한다. 세계는 '여기' 뿐 아니라 '저기'도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아이들이 그걸 알았을까?
오늘 수업은 아이들을 가르친 수업이 아니었다. 내게 새로운 깨달음을 준 수업이었다. 나는 이런 수업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아이들이 더없이 소중하게 생각되었다.
사는 것은 무상한 것이다. 그런 속에서 아귀다툼하는 것이 사람인가 한다. 그러나, 그 아귀다툼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막연하게나마 來世를 믿고 초연한 삶을 꾸리는 것이 현명한 일일 것이다. 별 수 없이 나도 나뭇잎인 것을…….
퇴근 길이 시원하다. 넓은 길에 차들이 쭉쭉 잘도 빠진다.
(1993. 5. .)
"얘들아, 뭐 화끈한 거 없니? 졸음이 확 달아날 만한 거 말이야. 열 여덟 아가씨들이 침 흘리며 조는 모습은 딱 질색이란 말이야."
"선생님, 우리 그냥 같이 자요"
아이들은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 한 마디로도 똑똑한 우리 아이들은 졸음을 쫓기에 충분했다. 나는 이 오후의 수업으로 '제망매가'를 준비했다. 옛날에 하던 식으로 단어, 표현법, 주제들을 낱낱이 분석하면 틀림없이 아이들을 '고문'하는 것일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古文'은 우리를 '拷問'한다고 하지 않는가?
틀에 박힌 답답한 수업에서 벗어나 보자. 우선 아이들의 책상에 있는 책이나 공책, 다른 참고 서적들을 다 집어넣도록 했다. 아이들은 무슨 좋은 일이 있나 하고 즐거워했다.
'삶과 죽음의 길이 여기에 있으므로 두려워하고'의 '삶과 죽음'을 칠판에 썼다. 그리고 길게 화살표를 몰고 칠판 끝으로 갔다. 거기에 '두려워하고'를 썼다. 그런 다음에 삶과 죽음에 대해 얘기를 나누자고 제안을 했다. 아이들은 일단 따분한 시구의 분석이 아니라는데 흥미를 가졌다.
이 시에서 자아의 갈등 요인은 '죽음에 대한 공포'이다. 갈등은 자아의 소망과 세계의 조건이 조화롭지 못할 때, 다시 말해 삶의 세계가 욕구를 해결해 주지 않을 때 일어나는 정서의 불안정 내지 감정의 무질서를 말한다. 인간은 이 때 감정을 가지런하게 하고 정서를 안정시키려 한다. 이것이 갈등의 극복이다. 제망매가에서는 삶을 지속하려는 욕망, 누이와 이별하고 싶지 않은 욕망과 인간은 어차피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는 피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 앞에 어쩔 수 없어 하는 자아의 갈등과 그 극복 과정을 그리고 있다.
누이의 뜻하지 않은 죽음을 계기로 남의 일로만 여겨졌던 죽음을 체험한 시적 자아는, 깨닫게 된 죽음의 보편성 앞에서 공포와 뼈아픈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자신이 경험한 죽음을 이야기하도록 했다. 어떤 사람은 할머니의 죽음을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토록 자신을 귀여워해 주시던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눈물이 안나와서 혼이 났다는 사람도 있었다. 할머니의 죽음은 그냥 서운함에서 오는 슬픔이다. 자연의 섭리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겪는 섭섭함 그것이다.
어떤 아이는 아빠가 돌아가시는 서러움을 말하며 울먹였다. 그러나 그것은 일찍 돌아가신 아빠의 억울한 삶에 대한 연민의 눈물일 것이다. 작년에 심장 수술 받다 잃은 동생이 있는 연희는 동생의 죽음을 '팔과 다리를 떼어내는 아픔'이었다고 표현해서 모두를 숙연하게 했다. 맞다 그건 아픔이고 공포이다. 동기간의 죽음을 곧 나의 죽음으로 생각하는 아이들이 기특했다.
우리는 '팔과 다리를 떼어내는 아픔'인 형제의 죽음의 공포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 제망매가의 시적 자아는 그의 신앙심으로 '미타찰'의 존재를 믿고 거기에서 누이를 만나 볼 날을 '도 닦으며 기다리겠노라' 고 했다. 나는 '삶과 죽음'아래 '미타찰'을 썼다. 그리고 아까처럼 길게 화살표를 긋고 '기다리겠노라'고 썼다.
'죽음', 그것은 인간의 가장 큰 공포의 대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미타찰'에 대한 믿음은 이 공포의 껍질에서 벗어나 '죽음을 기다리게' 된다. 이 시의 훌륭한 점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모두 한가지에 매달린 나뭇잎이다. 이렇게 만나 아귀다툼하지만 언젠가 '여기 저기'에 '떨어져 날릴' 운명에 있다. 때로는 움이 돋기가 무섭게 태풍에 날려 떨어져 버리기도 하고, 가을이 되기도 전에 여러 가지 시련을 견디다 못해 떨어져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나뭇잎이다. 모두'한 가지에 나고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는' 잎이다. 언제 이른 바람이 불어 올 줄 모르면서도 저희들끼리 아귀다툼하는 가련한 잎이다. 이것이 곧 나뭇잎의 생멸 원리이다.
"애들아, 너희는 윤회설을 믿니? 아니, 來世가 있다고 믿니?"
아이들은 대답이 없다. 이미 숙연해 진 것이다. 막 잎이 피어나다 떨어져 버리는 나뭇잎 같은 친구의 죽음을 누군가 얘기할 때 눈물을 닦는 아이들도 있었다.
정말로 來世의 존재를 믿는다면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 같았다. 제망매가의 가치는 여기에 있다. 인간은 하나의 나뭇잎이라 생각한 것, 우리는 언젠가 아니 바로 며칠 후에라도 나뭇잎 날리듯 그렇게 흩어질 수 있음을 깨닫게 한 것, 그러나 그 죽음의 공포는 곧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 준 것이다.
우리는 눈을 크게 떠야 한다. 그래서 한 쪽 세계만 보고 살아온 불구에서 벗어나야 한다. 세계는 '여기' 뿐 아니라 '저기'도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아이들이 그걸 알았을까?
오늘 수업은 아이들을 가르친 수업이 아니었다. 내게 새로운 깨달음을 준 수업이었다. 나는 이런 수업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아이들이 더없이 소중하게 생각되었다.
사는 것은 무상한 것이다. 그런 속에서 아귀다툼하는 것이 사람인가 한다. 그러나, 그 아귀다툼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막연하게나마 來世를 믿고 초연한 삶을 꾸리는 것이 현명한 일일 것이다. 별 수 없이 나도 나뭇잎인 것을…….
퇴근 길이 시원하다. 넓은 길에 차들이 쭉쭉 잘도 빠진다.
(1993.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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