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물밥(삶과 죽음) 24

개와 늑대

개와 늑대 그날은 달이 밝았다. 그러나 무섭지 않았다. 달이 밝은 밤이면 모충동에서 개신동으로 넘어가는 배고개 공동묘지 앞을 지나기가 가볍지 않았다. 묘지 앞 커다란 방죽에 밝은 달빛이 여인의 하얀 치맛자락이 되어 넘실거린다. 때로는 삼베 도포가 일렁거려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날은 무섭지 않았다. 몇 집 남은 고갯마루 마을을 지나자 커다란 개 한 마리가 나를 따랐다. 야간 수업이 끝나면 밤 11시 50분, 자정이 넘었을 텐데 이 밤에 웬 개가 따라오나. 송아지만하다. 누런 등줄기에 내리는 달빛이 신비롭다. 눈빛이 형형하다. 한 시간은 족히 걸리는 시오리길, 이미 집에 도착해 공부를 시작했을 시내 사는 친구들을 생각하며 발걸음을 재게 놀려야 했다. 개는 계속 나를 따라온다. 공동묘지 앞 방죽 옆길을 ..

지렁이가 품은 우주

지렁이가 품은 우주 새벽 산책길에서 딱한 중생을 만났다. 젓가락으로 입에 올리다 흘린 자장면사리 같다. 꿈틀꿈틀 힘겹게 기어간다. 지난 밤 폭우에 땅속 지렁이 은신처에 빗물이 괸 모양이다. 물구덩이에서 살만한 곳을 찾아 지상으로 나오셨을 것이다. 블록 위에 물이 없으니 숨쉬기는 괜찮겠다. 그런데 여기는 처참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파트 산책로는 입주민들이 새벽부터 산책을 한다. 폭우가 내리고 하늘이 말끔하게 갠 날 아침에는 걷는 사람이 더 많다. 시간이 좀 지나면 아이들이 자전거를 탄다. 쓰레기 수거 차량의 바퀴는 지렁이 눈으로는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무지막지하다. 새벽 총알 배송을 생명으로 아는 택배 차량을 지렁이가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운동화에 밟혀 으깨지고 자전거 바퀴에 치어 끊어..

생명

도무지 앉아서 견딜 수가 없다. 차를 몰아 안산 화랑유원지로 향했다. 살아서 꽃이었던 아이들이 다른 세계의 꽃에 묻혀 있었다. 아가들아, 너희들은 거기 있으면 안 되느니라. 너희는 아직 꽃이 아니냐? 꽃 속에 아이들은 말없이 웃는다. 총리를 찾지 못하는 나라. 총리가 거기 있었다. 장관도 있고 노벨상 후보도 있고, 평화의 사자도 있었다. 천사도 있고 훌륭한 교사도 거기 있었다. 다만 웃고 있을 뿐이었다. 아깝다. 웃고 있는 젊은 생명이 피눈물나게 아깝다. 딱하다. 어린 생명이 딱하다. 하늘도 어이없어 할 세월호 참사를 두고 학부모는 학교를 탓하고 학교나 국민은 정부를 탓하고 정부는 기업을 탓하고 기업은 하늘을 탓하고만 있다. 답답하다. 발이 땅에 붙어버렸는지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바닷바람이라도 쐬자..

인연 因緣 2 -慧光堂宗山大宗師 입적에 즈음하여-

새벽에 화엄사에 가는 아내를 전세 버스 정류소까지 전송하러 가는 중이었다. 고라니 주검을 보았다. 큰길에서 국립청주박물관으로 내려서는 작은 길목에 나뒹굴어 있었다. 배가 빵빵한 것으로 보아 변을 당한 지 시간이 좀 지난 것 같았다. 아내가 눈을 돌렸다. 상봉재 쯤에 무슨 볼일이 있었는지 와우산에서 내려와 급히 찻길을 건너가는 중이었겠지. 고라니는 그렇게 돌아갔다. 1994년쯤 금천고에 근무한 적이 있다. 금천동에서 용암동 버스종점으로 고개를 넘으면 보살사로 향하는 중고갯길을 만난다. 용암동이 주택가로 개발되기 전이라 비포장도로에 대형 트럭이 다녀서 울퉁불퉁하고 흙먼지를 뒤집어쓴 가로수 사이로 발 디딜 자리를 보아가며 고개를 넘어야 했다. 나는 종종 영운천 좁은 둑길로 차를 몰아 퇴근했다. 어느 날 퇴근길..

새해 첫날 석천암을 찾다

몸이 찌뿌둥하고 마음까지 찝찝하면 석천암에 간다. 석천암은 이름 그대로 바위샘에서 물이 나온다. 아니 물은 석굴 천장에서 방울방울 떨어지고 샘이 물방울을 받아 모은다. 그 석굴에 약사여래가 정좌해 있다. 석천암에 가서 석굴의 약사여래부처님을 만나면 하늘이 열리듯 마음이 열린다. 청천에서도 풍광 좋은 삼송리로 들어가 삼송학교 건물을 오른쪽에 두고 살상 기어 들어가면 달리다 보면 농바위 마을 쉼터가 나온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작은 다리를 건너가면 대야산 밀재로 가는 길이다. 다리를 건너지 말고 왼쪽 외길을 따라 쭉 올라간다. 길이 끝나는 지점에 석천암이 있다. 전에는 대야산에 빠져서 한 달이면 두 번 정도는 올라갔다. 아니 쉬는 날만 있으면 혼자서도 자주 갔다. 그럴 때는 경북 문경 쪽의 선유동 범바위 마을..

바람소리

바람소리 새벽이다. 아내의 코고는 소리에 잠이 깼다. 잠자리가 음전한 아내인데 친구들과 여행이 어지간히 요란했던 모양이다. 거실로 갈까, 서재로 갈까 하다가 모로 누웠다. 조용하다. 아내를 바라보고 베개에 오른쪽 귀를 묻고 모로 눕기만 해도 세상은 고요해진다. 왼쪽 귀에는 바람소리가 ‘쐐애애’ 여전하지만 감각은 이미 무뎌졌다. 귓속에서 바람이 분다. 이명耳鳴이다. 봄바람에 마른나무 잔가지가 휘파람을 불 듯, 여름 오후 수매미가 암컷을 부르듯, 한겨울 참나무 남은 이파리가 삭풍에 떨리듯 바람이 분다. 때로는 고막 너머에서 귀곡성처럼 울어대서 새벽이 괴롭다. 아내 코고는 소리쯤이야 오른쪽 귀만 막으면 되지만, 곤한 새벽에 왼쪽 귀 저 안쪽 바람소리는 막을 길이 없다. ‘망진자호야亡秦者胡也’라더니 새벽을 괴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