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축 읽는 아이(나)

단발머리 2

느림보 이방주 2001. 6. 1. 14:06
고등학교 1학년 4월의 토요일 하교길은 솟구치는 호기심으로 아무래도 그냥 집으로 직행하기 어렵다. 더구나, 흐드러지게 핀 왕벚꽃과 내리쬐는 태양으로 겨우내 웅크렸던 검은색 제복이 안으로부터 근질거리면 무슨 일이든지 꾸미게 마련이다.

무심천 제방도로는 지금처럼 도로가 아니고 그냥 제방이었다. 거기가 포장되어 4차선 도로가 되리라는 건 당시로서는 생각도 못했다. 인도도 차도도 없었다. 가끔씩 움푹 패인 곳이 물이 괴어 지나는 차들이 물탕을 쳤다. 그러나 뚝방길은 차보다 사람들의 차지였고, 아이들의 이야기가 그렇게 너르게 보이던 흙길을 가득 메우고도 남았다. 창 얇은 운동화 위로 전해지는 봄기운에 우리들 웃음소리는 마냥 높아지고, 제방에 심은 지 몇 해 안 되는 왕벚꽃은 여자아이들의 칼라만큼이나 화사했다.

친구와 나는 사실은 순진파면서 쓸데없는 영웅심으로 모자를 벗어 가방에 약간 드러나게 넣고 나팔바지를 날리며 팔자걸음을 걸었다. 누가 봐도 같은 길을 걸어 하교하는 하얀 칼라들을 의식한 행동이라는 것이 훤하게 내비치었을 것이니, 애송이들의 행진이 얼마나 가소로웠을까.

하교시간이 조금만 늦어도 길은 한산했다. 교문을 나서 모충교 쪽으로 단발머리 대여섯 명이 좁은 길을 횡대로 늘어서서 재잘대며 걷고 있었다. 우리가 뒤따라가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때로 단발머리를 넘었다. 단발머리는 하얀 칼라에 닿을 듯 말 듯 나풀거리고, 자지러지는 웃음소리를 따라 함께 자지러졌다. 끼가 있는 아이들의 단발머리는 가르마 아래를 핀으로 세워서 더 심하게 나풀거려 그런 아이들을 겉으로는 손가락질하면서도 내심으로는 가슴 죄는 것이 사내들이었다.

나는 갑자기 여자 다섯이 가면 틀림없이 '영순'이란 이름이 한 명쯤 있을 것이라고 우리들의 호기심을 부채질하던 국어 선생님 농담이 생각났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영순아!"하고 큰 소리로 불러 버렸다. 그런데 다섯 중에 유난히 단발머리가 나풀거리는 친구가 휙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으나 다행히 그들은 재잘대던 소리를 그치고 조용히 가던 길을 계속 걸었다. 나는 친구 녀석의 지청구를 들으며 다시 한 번 "영순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일은 저질러졌다.

아이들이 걸음을 멈췄다. 일제히 뒤로 돌아 우리 쪽을 바라본다. 어쩔 수 없이 그들과 마주 서게 되었다. 5:2다. 그 중에 영순이인 듯한 단발머리가
"왜 부르니?"
하며 노려본다. 누가 불렀는지 모를 테니 친구한테 떠넘길까 하고 비겁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 친구가 먼저
"얀마 왜 부르냐잖아."
하고 선수를 쳤다. 역시 비겁한 놈의 친구는 더 비겁한 놈이었다. 그러자 그 애는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려 불량한 한 남학생을 비웃는 듯 멸시하는 듯한 시선을 보내며
"너야, 왜 불러?"
하며 앙칼지게 다그쳤다. 나에게는 도망할 작은 구멍도 없었다. 모기소리 만한 소리로
"그냥"
하고 바보처럼 궁색한 대답을 하고 말았다. 더군다나 이 의리 없는 친구는
"얀마, 나 먼저 갈께 잘해봐. 네가 불렀으니까"
하고 그냥 가버렸다.

나는 혼자서 다섯 여자의 바심을 당해야 한다. 그러자 다행히
"영순아, 잘해봐. 먼저 갈께"
하고 모두 가버렸다. 뚝방길이 휑하니 넓어졌다. 그 넓은 길에 그녀와 나는 이상한 자세로 마주 선 꼴이 되었다. 아무도 없으니 그제서야 내도 남자라는 게 생각났나 보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우리도 가자."
하고 그녀를 이끌었다.

벚꽃은 만발하고 하교하는 아이들의 눈치를 보아가며 할 수 없이 나란히 걸었다. 여중생들이 힐끔힐끔 쳐다본다. 그 때만 해도 남녀 학생이 나란히 걸을 수 있는 시대는 아니었다. 남녀학생이 같이 걷는 다는 건 곧 불순 이성교제였다.

걸어가면서 나는 시인이신 우리 '국어 선생님'이 사건이 범인이셨다는 얘기부터 했다. 되도록 나는 불량스런 학생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말이다. 되잖게 시에도 관심이 있는 문학 소년임을 은근히 내비치기도 하는 엉큼함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학교 얘기, 선생님 얘기, 장래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우리는 얘기에 정신이 팔려 집으로 가는 길도 아닌데 쓸데없이 용화사 근처까지 걸었다.

영순이도 단발머리였다. 핀을 세웠으나 흔히 끼 있는 아이들이 하는 그런 아이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깨까지 덮은 하얀 칼라에 닿을 듯 말 듯한 짧은 단발 머리였다. 머리는 까맣고 윤기가 흘렀다. 가르마 가깝게 핀을 세워서 꽂아서 하얀 귀가 드러나 보였고 걸을 때마다 유난히 나풀거렸다.

처음에 독한 눈으로 쏘아보던 것과는 달리 말소리는 조용하고, 별 것 아닌 일에도 얼굴이 발그레해지며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는 그런 아이였다. 하얀 칼라를 보면 이슬만 받아먹고 사는 천사 같았고, 나풀거리는 머리를 보면 불량해 보였으나, 그녀는 천사도 아니고 불량소녀도 아니었다. 나처럼 그렇게 가난한 집 딸이고, 그 오빠의 동생이었다. 책을 나보다 많이 읽어서 한 마디마다 저 깊은 곳에서 은은히 우러나는 이야기처럼 들렸다. 나는 처음으로 나의 무식이 부끄러웠다.

우리는 그 후에도 가끔 만났다. 토요일에 친구들 눈을 피해 뚝방을 걸었다. 빵집에 갈 돈도 없었으니까. 걸으면서 학교에서 있던 얘기 같은 걸로 시시껄렁하게 보내도 시간은 빨리 지나가고 헤어지기는 아쉬웠다.

3학년이 되면서 서로 바빠지고 공부에 쫓기다 만나지 못하였다. 졸업을 하고 나는 대학에 진학하고, 영순이는 취업을 했을 것이다. 대학에 가고는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그 뒤부터는 대학에서도 단발머리를 만나면 가슴부터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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