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 370

거울의 변증법

거울의 변증법 거울, 시대를 비추다국립청주박물관 특별전 표제이다. 눈에 확 들어온다. 거울이 비추는 시대는 어떤 모습일까. 청주박물관 정원은 봄이 넘쳐난다, 철쭉이 피고 송화도 핀다. 흰철쭉, 이팝나무꽃, 산딸나무꽃, 공조팝나무꽃 같은 하얀 꽃들이 피기 시작한다. 오월이다. 돌계단에 할미꽃은 피었다지고 은발만 남았다. 카페에 들러 개관 시간을 기다리며 커피를 마셨다. 전시회 포스터를 보며 문득 윤동주의 거울이 떠올랐다. 핸드폰을 열어 과 을 읽으며 동주가 가졌던 거울의 의미를 상상해본다.동주의 시 에서 시적자아는 우물을 들여다본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우물은 동주의 거울이 되었다. 동주의 거울은 그냥 일상의 자연을 비추는 것처럼..

K-에세이와 한국의 수필

수필미학 여름호 권두언 K-에세이와 한국의 수필 한국의 전통수필이 2020년대에 이르러 ‘k-에세이’라는 이름으로 세계 문단에 새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우리가 모르고 지나는 한국 수필의 맛을 세계가 먼저 알아본 것이다. 지난 3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2025년 아르코문학작가펠로우십 지원사업 공모 결과를 발표했다. 기존의 아르코문예진흥기금 지원사업을 대폭 수정하여 공모하고 지원대상자를 선정 발표한 것이다. 종전에 원고를 심사하여 작품집 발간비를 지원하던 방식과 달리 문학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중진 작가를 집중 지원하기로 하고 종전의 2배 정도의 활동비를 배정하였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는 작가들의 그간 업적을 바탕으로 국내에서는 물론 세계적인 작가로 입체적인 활동을 하도록 지원하는 방식이라고 밝혔다..

개미귀신 삼생기三生記

개미귀신 삼생기三生記 놀라운 일이다. 개미귀신이 명주잠자리가 된다고 한다. 작지만 흉물스럽게 생긴 개미귀신이 껍질을 벗고 성충이 되면 어여쁜 명주잠자리가 된다. 대상은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에 따라 달리 보인다. 명주잠자리는 현재를 보면 어여쁘고 과거를 알면 흉측하다.무심천 지류인 율량천 산책길을 걷다가 개미귀신 집단서식지를 발견했다. 마른 모래밭에 개미귀신 굴 수십 개가 늘어섰다. 깔때기를 모래땅에 박아놓은 것처럼 지름 5cm쯤 되는 굴이 오밀조밀하다. 어린 시절 하굣길에 신기하게 봤던 기억이 살아난다. 아이들이 개미를 잡아먹는 개미귀신 집이라 해서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개미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개미는 한 마리도 지나가지 않았다. 우리가 보고 싶은 개미귀신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답답해진 우리..

사월이 오면

한국수필 4월호 권두 칼럼 사월이 오면 부이사장 이방주 사월이다. 자연이 꿈틀댄다. 사월의 생명력이다. 누가 사월의 꿈틀거림을 막을 수 있을까. 다만 몸과 마음으로 따를 뿐이다.사월이 오면 10일이나 15일쯤 녹음을 찾아 떠난다. 어디가 좋을까. 세종시 조치원읍을 지나 비암사를 찾아간다. 비암사는 뱀서방 전설이 전해지기 때문에 충청도 말로 ‘비암[蛇]절’인 줄 알고 있었지만, 극락보전 앞 삼층석탑 상륜부에서 3점의 불비상이 발견된 후 ‘비암(碑岩)’절이 분명해졌다. 이 불비상은 부흥백제시대 유민들의 애끓는 염원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오늘은 불비상 유래담보다 사월을 맞아 비암사로 가는 길의 초록을 말하려 한다. 조치원에서 연서면 쪽으로 낮은 고개를 살짝 넘어 과수원길 모롱이를 돌아서면 꽃더미 속에 우뚝 서..

그냥 떠나신 아버지

그냥 떠나신 아버지 “아들, 막내야”아버지의 외마디 부름이다. 나는 가까이 사는 형님에게 급하게 전화를 하는 중이었다. 새벽 2시 형인들 쉽게 전화를 받을 수 있을까.아버지에게 달려갔다. 의사가 고개를 저었다. 아파트에서 업고 내려왔지만 차에서 내려서 응급실까지는 걸어오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별일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직의사가 급하게 x-ray 검사를 하더니 심근경색이 심하게 왔다고 했다. 이 정도면 삼십대도 힘들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술이 확 깼다. 급하게 형님에게 전화를 거는 중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아무 말씀도 못하셨다. 의사는 최후진단을 내렸다. 새벽 2시 40분이다. 이렇게 허망할 수가 있나. 그때 형님과 형수님이 도착하셨다. 나는 죄인처럼 말했다. 나는 죄인이다. “돌아가셨어요.” 형님도..

징벌과 사면의 10월 26일

징벌과 사면의 10월 26일 10월 26일 1909년영화 『하얼빈』을 봤다. 현빈이 분한 안중근이 늙은 늑대 이토 히루부미를 처단하는 역사적 사건을 다룬 영화이다. 이토 히루부미는 조선이라는 파이 나누어먹기를 협상하러 러시아로 가는 중이었다. 안중근의 총을 맞고 죽었다. 징벌이다. 그날이 1909년 10월 26일이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어두웠다. 현빈의 연기를 드러내는 구성을 피한 것 같았다. 다만 안중근의 인간적 고뇌와 영웅적 면모를 부각시켰다. 그것은 안중근이 전쟁 포로인 일본군 육군 소좌 모리 다쓰오를 만국공법에 따라 풀어준 일이다. 안중근은 그에게 ‘가정을 돌보라’면서 사면했는데 그는 끈질기게 독립군을 추적하면서 야비한 근성을 보였다. 영화가 역사적 사건을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안중근은 이토오 히..

관세음보살님 정말 다 보고 계시는지요

관세음보살님 정말 다 보고 계시는지요 관세음보살님 정말 다 보고 계시는지요. 이 시끄러운 세상의 소리를 다 보고 계시는지요.세상 사람들이 정말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까닭을 다 보아 알고 계시는지요. 얼마나 고고한 마루에 오르려기에 그렇게까지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그 눈물을 다 보아서 아시는지요. 정말로 세음(世音)을 관(觀)하셨는지요.답답하다. 정말 답답하다. 답답한 내안을 드러내 보일 수 없어서 답답하다. 그래서 어제 가서 처음 뵙고 온 증평 율리(栗里) 석조관음보살입상(石造觀音菩薩立像)을 또 뵈러 갔다. 행여 소리도 낼 수 없는 내 답답한 세음世音을 다 보고 그 두터운 손으로 어루만져 주실 거라는 엷지만 소망도 있다.율리 삼기저수지는 안개에 덮여 있다. 꽝꽝 얼어붙은 수면이 열흘밖에 남지 않은 입..

열림이냐 닫힘이냐

열림이냐 닫힘이냐★ 닭들의 변명 “우리가 열렸다. 야, 들어가자.”먹을 게 수두룩하단다. 먹거리가 권력이 되고 권력이 먹거리가 되는 법이다. 쉽게 주워 먹기 좋아하는 닭들은 다 모여라. 정체성 같은 건 내던지고 다 모여라. 이념 나부랭이 같은 건 필요 없다. 모가지에 푸르거나 붉거나 타이를 매고 ‘꼬끼오’ 목소리만 크면 된다. 울짱은 훤하게 열려있으니 뛰어 넘을 필요도 없다.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고? 우리는 닭이니까. 양심이나 도덕이나 이념 같은 건 없어도 되는 닭이니까. 먹이만 쪼는 파렴치한 닭대가리니까. 우리는 더불어 몰려가기만 하면 민주가 되고, 공정과 상식을 외치기만 해도 힘이 되니까. 사악함으로 빼앗기만 하면 그것이 민생이고, 아무에게나 어리석음의 간과(干戈)를 들이대도 그것이 공정이..

박힌 돌, 굴러온 돌(무심7호)

박힌 돌, 굴러온 돌 이방주미국 대통령 선거가 요동치고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민주당의 후보를 사퇴하고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후보로 확정되려는 추세이다. 반면 공화당은 이미 도널드 트럼프 전대통령을 후보로 확정하였다. 재미있는 일은 81세인 바이든 대 78세인 트럼프 구도에서 바이든 현 대통령이 열세였는데, 흑인이며 여성인 해리스 부통령이 후보로 유력해지자 미국인들의 지지 구도가 급격하게 변하여 59세인 해리스 부통령으로 쏠리고 있다는 것이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니 더 신선해 보이는 모양새이다. 문제는 공화당의 박힌 돌이다. 물때가 더께로 끼어 세상 돌아가는 걸 제대로 보지도 못하는 박힌 돌이 뿌리를 내리고 요지부동이다. 세상은 무서운 속도로 변하고 있다. 변화의 요구가 날마다 새롭다. 남의..

청주성 탈환과 주봉마을 민충사(愍忠祠)

청주성 탈환과 주봉마을 민충사(愍忠祠)  산양재 마을 탐방에서 박춘번 묘비를 읽고 청주성 탈환 영웅의 행적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순천박씨인 춘무(春茂), 춘번(春蕃), 동명(東命)이 그들이다. 이들의 행적은 산양재 마을(東陽村) 경로당 연혁비에도 있고 산양재 마을 박춘번 묘비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박춘번 묘비나 산양재 경로당 연혁비에는 청주성 탈환에 대하여 춘번을 중심으로 그의 형인 춘무, 조카인 동명이 도와 활동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집에 돌아와 자료를 찾아 살펴보았다. 순천박씨 세 분의 공로는 다를 게 없는데 그들의 활동이 대부분 춘무가 중심이 되고, 그의 아들인 동명이 크게 활약하였고 춘번도 여기에 함께한 것으로 기록된 것이 일반적이었다. 동명은 이괄의 난이나 병자호란에서도 공이 컸고 그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