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들꽃 들풀에 길을 묻다 57

뽀리뱅이와 흙

뽀리뱅이와 흙 뽀리뱅이가 꽃을 피웠다. 공원 잔디밭 경계석 이음매 틈에서 꽃대 서너 줄기를 쑥 뽑아 올리고 노랗게 꽃을 피웠다. 고향 마을에서는 밥보재기라고 불리는 나물이다. 이른 봄 부드럽고 습기가 촉촉한 흙에서 밥보자기만큼이나 널찍하게 땅을 차지한다. 그런데 잔디밭 경계석 이음매나 경계석과 보도블록 틈에서 나와 꽃대를 세우고 노랗게 야들야들한 꽃을 피웠다. 아파트 축대로 쌓은 거대한 자연석 위에서도 여린 꽃을 피웠다. 울퉁불퉁한 바위에 바람으로 날려 쌓인 흙에 뿌리를 내리고 아기 손바닥만 한 밥보재기를 펼치고 꽃대를 세웠다. 한 숟가락도 안 되는 흙에 뿌리를 내린 것이다. 꽃을 피운 그놈의 생태가 신기하고 기특하다. 악착같은 뽀리뱅이도 기특하지만 흙은 더 위대하다. 바위 위에 쌓인 한줌도 안 되는 흙..

디아(Dia)를 따라 가는 길

디아(Dia)를 따라 가는 길 여기 길이 있다. 길은 바로 내 발아래 있다. 나와 흙이 처음 만난 발자국이 모여 길이 되고, 내 걸음걸이를 따라 길 모양이 생겨난다. 공동체의 관습이 문화를 형성하듯이 걸음걸이에 따라 길이 이루어진다. 길은 우리네 삶의 흔적이고 곧 민족의 역사이다. 의미 있는 역사로 남은 길에는 진리가 담겨 있다. 그래서 우리는 망설이지 않고 그 길을 따라 간다. 힌두인들의 성지인 바라나시를 여행한 적이 있다. 바라나시를 가보지 않고 인도 여행을 말할 수 없다고 한다. 나는 바라나시 화장 가트를 보지 않고 죽음의 성스러움을 말할 수도 없다고 말하고 싶다. 갠지스 강가 화장터인 다샤스와메드 가트(Dashashwamedh Ghat)에서 행하는 아르띠뿌자(Arti Pooja)를 참관했던 감동을..

조롱박꽃 피는 사연

조롱박꽃 피는 사연 새벽 6시쯤 주중리에 갔다. 벌써 볕이 뜨겁다. 오늘은 조롱박꽃을 보았다. 야산 비얄에 있는 블루베리 밭에 고라니 침입을 막으려고 쳐놓은 그물 담장에 덩굴을 걸어놓고 다만 몇 송이가 피었다. 박꽃은 초가지붕에 달빛을 받으며 피어야 제 멋이라는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야겠다. 이렇게 피어 있어도 새벽하늘보다 처절하게 하얗다. 하얀 꽃잎 다섯이 다소곳하다. 다섯 꽃잎을 하나로 겹치면 한 잎으로 보일 만큼 크기도 모양도 닮았다. 화심은 연한 노란색이다. 수꽃은 수술을 지니고 암꽃은 암술을 지녔다. 수술은 하나가 불끈 솟았고 암술은 세 쪽이 가운데가 갈라진 모습이 똑같다. 호박꽃도 그렇고 박꽃도 그렇고 수술은 수컷 모양이고, 암술은 암컷 모양이다. 식물은 꽃이 생식기이다. 사람은 생식기를 부끄..

앗싸, 호랑나비

이제 지겹다. 정말 멀미난다. 유월 하순에 시작한 장마가 칠월을 빗속에서 지내게 하더니 입추가 지나도 멈출 줄을 모른다. 세상에 물이 흥건하다. 세상 뿐 아니라 세상살이가 장마에 빠져 버렸다. 정월에 듣도 보도 못하던 코로나가 들어와 세상에 겁을 먹이더니, 일마다 급류에 휘몰아쳐 제정신이 아니게 했다. 어떤 이는 코로나 방역에 날밤을 새우며 싸우다 목숨까지 버리는가 하면, 어떤 이는 코로나를 파도 타듯 올라타고 유유히 대양으로 나가 깃발을 날리기도 했다. 부동산 정책은 오르락내리락 우왕좌왕, 정부는 으르렁으르렁, 검찰은 비실비실, 의원은 두리번두리번, 무지하고 무능하고, 오만하고, 염치없고, 비굴하게 몽니부리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휘말리고 돌아쳐 갈피를 잡지 못한다. 가치는 바퀴 빠진 ..

불두화의 고백

불두화 2007일 5월 13일 연풍중학교 교정에서 교정에 불두화가 피었다. 뒤뜰 야생화단지에 화사하게 피었다. 회양목이 울타리처럼 둘러싼 야생화단지에는 모두 일년생 화초이고, 나무라곤 모과나무와 불두화 단 두 그루뿐이다. 봄에 피어난 야생화들은 다 지고, 금낭화조차 화사한 붉을 빛을 잃어가고 있는데, 불두화만 하얗게 피어났다. 불두화는 이렇게 봄꽃이 지고 여름 꽃이 피기 전, 5월의 한 복판에서 허허로운 뜰을 소담하게 채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연두색으로 쑥향이 솔솔 피어나는 찐빵 같더니, 어느새 여인의 하얀 가슴처럼 소담하게 피었다. 불두화는 향기가 없다. 어떤 사람은 꿀샘이 아예 없다고도 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꿀샘은 잎자루 바로 밑에 숨어 있다. 그래서 벌 나비가 별로 날아들지 않는다. 소담하게..

여섯번째 수필집 [들꽃 들풀에 길을 묻다] 여는 글

여는 글 들꽃 들풀에 길을 묻다 나비가 있으므로 꽃이 사랑을 이룰 수 있다. 꽃이 사랑을 이루어야 나비도 살아갈 수 있다. 나비는 꽃에게 존재 의미이고 꽃은 나비에게 존재 의미이다. 꽃과 나비가 있으므로 나도 살아갈 수 있다. 꽃이나 나비는 내 생명의 에너지원이다. 상생이 삶의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