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같이 갑자기 날씨가 싸늘해지면 '서리병아리'가 생각난다. '서리병아리'는 말 그대로 서리 내릴 때쯤 부화시켜서 기르는 병아리를 말한다. 이른봄 열심히 알을 낳던 어미 닭이 "걀걀"하며 앓는 소리를 하면 그동안 모아둔 달걀을 둥우리에 넣어준다. 양지쪽에 개나리가 필 때쯤, 꼭 개나리 색깔처럼 노랗고 앙증맞은 병아리가 나오게 마련이다. 이것이 봄병아리다. 병아리는 커갈수록 날씨가 따뜻해져서 별탈 없이 무럭무럭 자라 한여름을 지내고 가을이 되면 제법 제 모습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이와 달리 서리병아리는 가을에 부화시키기 때문에 봄 병아리만큼의 성장이 어렵다. 이른 가을 서산에 지는 햇볕이 그림자를 길게 늘이며 감잎에 반짝반짝 묻어날 때쯤 알을 한 스무 개 정도 안긴다. 어미 닭은 들며나며 품어서 서리 내릴 때가 되어야 "삐약삐약" 가냘픈 소리를 내는 병아리가 나오게 마련이다.
그 노랗고 보송보송한 깃털로는 서리를 몰아오는 싸늘한 바람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바로 어미 닭에게 주지 않고 상자에 담아 방에 들여놓아 며칠을 보낸 다음 깃털이 좀 여물면 양지쪽에 둥우리를 놓고 어미 닭에게 인계한다. 병아리들은 따뜻한 한낮엔 저희들끼리 모이를 찾고 놀다가 해가 서산에 설핏하면 "삐삐삐" 어리광을 하며 어미 품속으로 찾아들게 마련이다. 어미 닭은 깃을 있는 대로 벌려 병아리를 싸안는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기온은 떨어지고, 병아리는 커져서 추위를 피할 수 있는 어미 품은 점점 좁아진다.
병아리가 털갈이를 하기 위해 추위에 언 살이 발갛게 드러날 때부터 어미의 품 쟁탈전이 벌어진다. 병아리들은 결사적으로 어미의 품을 파고들고, 어미의 품은 한정되어 끝내 포기한 한두 마리는 붉은 긴 꼬리를 남기며 매정하게 서산으로 넘어가는 태양을 향하여 쉰 목소리로 "삐약삐약" 불만을 터뜨린다. 한번 "삐약삐약"을 시작한 병아리는 다시 한번 도전할 것을 아예 포기하고 공허한 "삐약"만을 계속한다. 제 깃이 모자란 것을 아는 어미 닭은 안타깝게 고개를 갸우뚱하며 '꼬꼬꼬꼬'만을 계속할 뿐 별다른 방법을 찾지 못한다.
한해가 저물어간다. 우리 아이들 중에는 제갈길도 의지도 잃고 서쪽 하늘을 향해 "삐약삐약" 소리지르는 소외된 아이들이 없나 돌아보아야 할 계절이 되었다. 그들에게 한번 더 힘차게 다리를 내뻗을 수 있는 용기를 주어야 한다. 세파에 좌절하여 엉뚱한 곳을 향하여 "삐약"거리는 소외된 병아리들을 모두 쓸어안을 수 있는 넓고 안락한 마음의 깃을 마련해야 할 계절이다.
(1999. 11.15. 충청일보 게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