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5월 15일 아침 하늘이 침울하다. TV에서는 점잖은 기자가 나와서 '서울 아무개초등학교가 스승의 날 휴업을 한다더니 14일에 행사를 했다.'면서 고급 승용차와 꽃다발이 쌓인 교사들의 책상 그림과 함께 눈을 치뜨며 흥분하고 있다.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 정말이지 한 25 년쯤 되돌아가고 싶다. 문을 열면 아카시.. 느림보 창작 수필/서리와 햇살(교단) 2001.05.23
아빠의 김밥 김밥을 보면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소풍이 생각난다. 학교에 입학하여 처음 가는 소풍날은 조무래기들이 천국에라도 가는 날처럼 들뜨게 마련이다. 그날만은 김밥말이 두세 개를 통째로 가질 수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께서는 시장에서 파는 하얀 나무 도시락이나 쌀알에 노란 물이 묻어나는 .. 비평과 서재/완보 칼럼 2001.05.20
아내의 꽃다발 아침에 커튼을 열어 젖히고 창문을 열면 매봉산에서 날아오는 삽상(颯爽)한 바람 냄새를 맡을 수 있어서 좋다. 신문을 들고 거실에 불을 켜고 당신이 끓이는 된장찌개 냄새를 맡을 때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숨두부가 엉기듯 안락이 엉기어 온다. 똑, 똑, 똑 파를 써는 도마 소리도 좋고, 아사삭 아사.. 느림보 창작 수필/사랑의 방(가족) 2001.05.14
새우젓 금년에는 강경이나 광천에서 성황을 이룬다는 새우젓 축제에 꼭 한 번 가보려고 했다. 그러나 또 가지 못했다. 내가 게으르기도 하지만 다른 해에 비해 꼭 가야할 필요성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축제 구경을 하기 위해서라면 몰라도 새우젓을 구하기 위해서는 내년에도 후년에도 당분간은 .. 느림보 창작 수필/원초적 행복(맛) 2001.05.13
자작나무의 껍질벗기 지난 15일 한 모임이 주선하는 관광버스를 타고 설악산 관광을 떠났다. 관광버스를 타고 하는 여행은 직원 연수나, 수학여행 인솔이 더러 있을 뿐 나로서는 참으로 낯선 일이라 기대 반 우려 반이었다. 더구나 차안에 탄 사람들은 대부분 사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부인들이라 더욱 그랬다. .. 느림보 창작 수필/껍질벗기(깨달음) 2001.04.24
아내의 김치 나는 검은 콩밥을 좋아한다. 검은콩을 눌린 누룽지나 그걸 따끈하게 끓인 누른밥은 나를 향수에 젖게 한다. 누른밥을 한 숟가락 넘치게 떠서 속살이 노랗게 익은 배추김치를 올려놓아 한입에 넣으면, 입안 가득 어머니 맛이 되살아온다. 어렸을 적 병약했던 내가 겨울 바람을 맞으면서 분수에 넘치게 .. 느림보 창작 수필/원초적 행복(맛) 2001.04.01
만우절 有感 만우절에는 여러 가지 가벼운 거짓말로 남을 놀라게 하거나, 얼떨떨하게 만드는 풍습이 있다. 사람들은 이 만우절을 서양 풍습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동양에서 기원한 것이라는 설도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 인도에서는 춘분에 불교의 설법이 시작되어 3월 31일에 끝났는데, 4월 1일에 남에게 헛심부름을 .. 느림보 창작 수필/서리와 햇살(교단) 2001.03.21
아저씨 내가 처음 '아저씨'로 불린 것은 교복을 막 벗었을 때이다. 입을 옷이 마땅하지 않아 형님 양복을 걸치고 다녔는데, 골목에서 만난 젊은 부인들이 유달리 숙성해 뵈는 나를 '아저씨'하고 불렀다. 그 때마다 물고기를 움키려다 반쯤 썩은 쥐를 움켜쥐었을 때처럼 속이 뒤틀렸다. 그런데, 스물 몇 살 철부.. 비평과 서재/완보 칼럼 2001.03.16
눈 내리는 날에 어제 저녁에도 말짱하더니 밤사이 눈이 참 많이도 내렸다. 새벽 두 세시쯤에 잠이 깨어 도무지 잠이 오지 않는다. 오늘은 딸아이 고입 연합고사 합격자 발표 날이다. 모두들 걱정 안해도 된다고 했지만, 만약의 경우 실수했을 수도 있고, 어린애 같은 막내딸이라 도무지 여고생이 된다는 게 믿어지지 않.. 느림보 창작 수필/사랑의 방(가족) 2001.03.04
因 緣 퇴근길에 절에 들렀다. 청아한 목탁소리가 정적을 울린다. 뜰에 서 있는 보리수 잎이 떨리는 듯하다. 잦은 비로 골짜기 물소리도 제법 화음을 이룬다. 골목을 나서 대로에 이르면 수많은 자동차의 질주 속에 끼어야 한다. 그 북새통을 지나 동부우회도로와 교차로를 훌쩍 넘으면 금방 자연 속으로 빠져.. 느림보 창작 수필/축 읽는 아이(나) 2001.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