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가지 못하는 일요일이다.
이 나이에는 조금이라도 땀을 내야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가까운 우암산이라도 가기로 했다.
점심을 먹고 시내버스를 타고 상당공원에서 내려 삼일공원에 올라가려니 진땀이 바작바작 났다. 동상은 넘어진 정춘수 목사의 좌대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아랫배가 쌀쌀 아파 왔다. 어제 저녁의 탐욕이 말썽을 부리는가 보다. 급히 공원 주차장 옆에 있는 간이 화장실 문을 여니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다.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인간의 타락의 오지를 잘도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도 내가 급하니까 어쩔 수 없이 발을 들여놓자니 플라스틱 상판이 "우지직" 죽는소리를 내었다. 아랫배에서 꿈틀대는 그놈이 그새 몸무게를 늘였나 보다.
갑자기 아프던 배가 사르르 정상으로 돌아온다. 그냥 올라가자. 올라가면 시민들이 많이 오니까 간이 화장실이라도 있겠지. 아니 전에 올랐을 때 있었지 않았나? 아니 있었어.
그냥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10 분쯤 올라가니 어떤 사람이 진달랜지 철쭉인지 심어 놓고 물을 뿌리고 있었다. 아마도 시에서 하청 받은 듯하다. 호스에서 쏟아지는 물줄기가 시원하다. 시원한 물줄기를 보니 반사적으로 갑자기 아랫배가 싸르르 아프고 뒤가 무직해 온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몸 가릴 데라곤 없다. 그냥 뛰어 올랐다. 먹거리에 대한 나의 탐욕이 팔뚝만한 막대기가 되어 꼿꼿하게 뻗치어 여기 저기를 꾹꾹 찌르는 듯하다. 도저히 걸음을 걸을 수 없다. 통나무를 잘라 만든 앉을개가 있다. 거기 앉았다. 그렇게라도 가로막을 수밖에 없다.
내 얼굴은 어떤 표정이었을까. 아마 인간 최초의 괴로움의 표정은 이렇게 나타났을 것이다. 주린이에 대한 자비를 잃은 죄의 대가가 괴로움이 되어 돌아온 것일까? 또 다시 부드럽게 또 가라앉는다.
그렇게 참으며 송신소까지 올랐다. 온 몸이 땀에 젖는다. 송신소에 가면 대피소가 있겠지. 그러나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높은 철조망만이 그 높이만큼의 절망을 안겨주었다.
그냥 돌아 내려가려니 송신소 건물이 원망스럽고 닥쳐올 일이 두려웠다. 몇 번이나 의자에 앉았다 일어섰는지 모른다.
이제 정상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 아니면 '짙은 숲이라도 있을 테니까'하고 자위하며 가파른 마지막 정상으로 계단을 오른다. 아랫배는 더욱 무거워진다.
하늘을 찌르는 나무 사이로 내리비치는 햇살에 계단 옆 떡갈나무 잎이 정말로 실하게 보였다. 넓고 토실토실하고……. 뜯어 떡을 쌀 일도 없는데 자꾸 그리로 눈길이 간다. 주머니에 휴지가 없는게 아까부터 걱정이었다. 등산객들이 보지 않을 때 떡갈나무 잎 몇 개를 따서 조끼 주머니에 넣었다. 만약을 위해서. 이 정도의 자연 훼손은 그냥 용서되겠지. 누가 탐욕은 근심이 되어 또다른 탐욕을 낳는다고 욕할 사람이 있겠는가.
등줄기에 땀이 밴다. 정상에 올랐다. 그러나 나의 근심을 풀어줄 화장실은 없었다. 나의 착각이었다. 절망은 뒤꽁무니에 뻗치는 막대를 더욱 곤두서게 하였다. 어쩔 수 없다.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야 한다. 떡갈나무 잎도 준비되었으니까. 그러나 정상에는 사람이 더 많다. 여자들은 왜 그리 많은가. 오늘 같이 좋은날 젊은이들이 갈데 없어 여기까지 왜 그리 많이 왔는가.
오솔길을 찾아도 빨간 내 셔츠를 숨길 곳은 없다. 할 수 없다. 경사진 오솔길을 엎어질 듯 뛰었다. 낭패를 보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송신소를 드나드는 시멘트 길을 뛰었다. 등이 땀에 젖는다. 마을에 이르니 화장실인 듯한 곳이 보인다. 구세주를 만난 듯했으나 주먹만한 자물쇠가 땅에 떨어지면 지구가 깨어질 듯 절망의 무게처럼 매달려 있다.
무당 집에는 푸닥거리하는 소리가 요란하다. 무당집 아래에 초파일이 지나 고요한 사찰이 있었다. 멀리 화장실인 듯한 건물이 보였다. 도량은 너무나 고요하다.
나는 아랫배에 죄를 끌어안은 채 부처님께 들킬세라 오금을 굽혀 발자국 소리를 죽이고 대웅전 앞을 지났다. 정말로 가까스로 아무 일 없이 화장실 문고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제서야 문짝에 씌여진 '解憂所'란 명필이 눈에 띠었다. - 근심을 푸는 곳.- 정말로 깨끗하다. 淨廊이란 말이 무색하다. 화장지까지 가지런하게 준비되었다. 옛날 시골 변소같이 잠자리만한 시커먼 모기가 덤빌 듯도 한데 까마득하게 먼 정랑에는 파리 한 마리 없다. 인간의 탐욕스러움만이 누렇게 정화되어 쌓여있다.
고통스럽게 이 순간을 기다렸던 탐욕의 덩어리는 노골노골한 가래떡이 되어 정낭으로 떨어진다. 후련하다. 극락이 따로 없다. 이렇게 극락은 바로 발아래 있는 것을---.사람들은 저 혼자만이 극락을 가려는 듯이 발버둥친다.
이렇게 근심을 풀 수 있는 곳을 마련해 놓고 나를 기다려오신 부처님의 은혜에 정말 절실한 감사를 드렸다. 부처님은 나의 죄를 다 용서하신 것인가? 굳었던 아랫배는 평정을 되찾았다.
解憂所를 나와 대웅전 앞마당을 지나며 근심의 막대기 때문에 잊었던 부처님 은혜에 새삼 감사하며 조용히 삼배를 올렸다.
(2000. 05.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