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을 자르며 오늘 드디어 15년이나 끼던 가죽장갑의 손가락을 자르기로 했다. 내년까지라도 기다리려고 했는데 안쓰러워 두고 볼 수 없을 정도이다. 손가락 끄트머리마다 닳아 터져서 손가락이 불거져 나온다. 왼손 검지는 손가락이 통째로 비어져 나온다. 자르자. 잘라서 운전 장갑으로 쓰면 더 오래도록 쓸 수 있.. 느림보 창작 수필/서리와 햇살(교단) 2011.02.17
세배 세밑에 해마다 세배를 오던 제자에게서 이번 설엔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아들과 함께 오겠다는 전화가 왔다. 내심으로 부담스러웠지만 제 깐에는 삶을 힘들어 한다기에 그러라고 했다. 지난여름 우연히 한 번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덩치만 컸지 애기나 다름없었다. 무슨 이야기.. 느림보 창작 수필/서리와 햇살(교단) 2010.02.16
큰아빠 병실 문을 여니 다롱이는 수술한 다리를 높은 곳에 올려놓고 누워 있다가 나를 보고 “선생니임―”하며 우는소리를 한다. 쌍둥이 언니인 아롱이가 놀라며 “큰아빠다.” 한다. 하얀 붕대로 친친 감은 다리를 만져 보았다. 아픔을 억지로 참고 있는 모습도 예쁘다. 아이들 엄마와 함께 앉아있던 중년.. 느림보 창작 수필/서리와 햇살(교단) 2010.01.10
이런 제자 -고개 너머 세상을 찾아간 의학 박사- 9월 15일 한가위 이튿날이다. 친구 연선생과 백화산 정상에 올랐다. 1060m 정상에서 바라보는 세계는 이제 막 구름이 걷히기 시작한다. 억새가 여기저기 바람에 날리며 어느덧 가을도 지나가는 듯했다. 그러나 땀은 지독하게 흐른다. 멀리 문경 쪽을 바라보면서 한 20분을 보냈다. 아예 가방을 내려 놓았다.. 느림보 창작 수필/서리와 햇살(교단) 2008.09.20
사과 향기 속에서 책 읽는 엄마들 하늘이 종일 울상이더니 오후 들어 눈이 흩날리기 시작한다. 눈에 보일 듯 말 듯한 눈송이가 온 하늘을 부옇게 흐려 놓는다. 그런가 싶더니 금방 산아 하얗다. 교정의 정원수에도 하얗게 눈꽃을 피웠다. 커피 한잔을 들고 유리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본다. 눈은 아직 그칠 생각이 없다. 이제 산인지 하늘.. 느림보 창작 수필/서리와 햇살(교단) 2007.12.08
서리와 햇살의 섭리 새벽 학교 마당에 등불이 찬란하다. 외등에 비친 느티나무가 노랗게 물들었다. 산은 이미 물들이기가 한창이다. 산은 하늘 가까운 곳에서부터 노란 색으로 혹은 붉은색으로 물들어 간다. 낮에 먼 산을 바라보면 온통 그림이다. 어제 퇴근 후에 이화령에 갔다. 혼자 나서는데 이 선생님이 함께 가자고 .. 느림보 창작 수필/서리와 햇살(교단) 2007.11.01
매스게임하는 사과나무 매스게임을 준비하는 사과나무 연풍에서도 오지라고 할 수 있는 분지리로 올라가는 길목에 사과 꽃이 피었다. 어머니 머리에 두른 무명 수건처럼 하얗다. 그러나 사과꽃은 그렇게 그냥 하얗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가까이 가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얀 꽃잎의 가장자리마다 봉오리일 때의 붉은 빛이 남.. 느림보 창작 수필/서리와 햇살(교단) 2007.05.04
천둥소리 1학년 국어 수업 시간 도종환의 시 "어떤 마을"을 펼치고 막 한 줄을 읽었다. "사람들이 착하게 사는지 별들이 많이 떴다." 그 때 천둥 소리가 났다. 가을 천둥치고 큰 소리다. 비가 쏟아진다. 얼음이 섞였는지 눈으로 봐도 되직하다. 종현이가 소리를 질렀다. "와- 우박이다." "와- 큰일이다. 우리 사과 다 .. 느림보 창작 수필/서리와 햇살(교단) 2006.11.09
연풍일기 -들밥 나누는 마음으로- 그림 같은 연풍중학교 2월 28일. 연풍 출근 첫날이다. 3월 2일 시업식에 앞서 새 조직의 첫 만남이다. 인문고에만 줄곧 근무해온 나는 중학교 근무에 대한 기대와 설렘으로 초임 이후 33년 만에 처음으로 가슴이 떨렸다. 작고 아담한 연풍중학교는 아침햇살을 맞아 솜이불처럼 포근해 보였다. 교문 앞 느.. 느림보 창작 수필/서리와 햇살(교단) 2006.03.16
욕 가르치기 욕 가르치기 계발활동(클럽활동) 시간에 한 여학생이 교무실에 내 옆자리에 와서 쭈뼛거린다. 분명 뭔가 잘못한 일이 있어서 다른 선생님께 불려온 눈치다. 예쁘고 착하게 생긴 아이다. “뭐야?” “구아무개 선생님께서 가 있으래요.” “아무 일도 없이 그냥?” “아니요. 잘못했어요.” “…….” .. 느림보 창작 수필/서리와 햇살(교단) 2005.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