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서리와 햇살(교단)

손가락을 자르며

느림보 이방주 2011. 2. 17. 04:55

오늘 드디어 15년이나 끼던 가죽장갑의 손가락을 자르기로 했다. 내년까지라도 기다리려고 했는데 안쓰러워 두고 볼 수 없을 정도이다. 손가락 끄트머리마다 닳아 터져서 손가락이 불거져 나온다. 왼손 검지는 손가락이 통째로 비어져 나온다. 자르자. 잘라서 운전 장갑으로 쓰면 더 오래도록 쓸 수 있을 것이다.

 

날이 퍼렇게 서 있는 가위로 손가락 끝에서 두 마디쯤 되는 부분을 하나씩 물고 지그시 오므리면 까만 손가락끄트머리가 잘려 바닥에 떨어진다. 사르륵사르륵 잘려 떨어지는 까만 손가락이 마치 내 손가락 같다. 가위를 든 오른손으로 싱싱한 생선살에 칼집을 낼 때처럼 살기어린 야릇한 쾌감이 전해진다. 그런 쾌감으로 열 개나 되는 손가락을 잘라내는 데는 꽤나 잔인한 인내가 필요했다.


수아는 내가 대학 1학년 때 처음 만난 절친한 친구 맏딸이다. 고 귀여운 녀석이 여고 2학년 때 나는 그네 학교로 부임했다. 4월의 여린 떡갈잎 같은 큰아기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짐작되고 남았다. 더구나 주당 여섯 시간이나 수업을 하게 되어 있었다. 부모는 더할 수 없이 마음이 놓였겠지만, 큰아기 마음은 일생일대 최악의 운명을 만난 기분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운명의 만남을 피할 수도 없어서 잘못한 일도 없이 수아에게 미안했다.

 

열여덟 살 수아에게 가랑이 터진 바지를 입었을 때로부터 제집 드나들듯 하던 아버지 친구인 ‘아저씨’로부터 배울 ‘문학’이 문학이 될 수 있었을까? 아저씨를 선생님이라 불러야 하고, 아저씨가 낸 문제를 풀어야 하고, 아저씨에게 글을 지어 바쳐야 하는 일, 모두가 꿈조차 꿀 수 없었던 수난이었을 것이다. 녀석은 내가 제 학교로 간다는 소식을 들은 후 밤을 새워 울었다고 한다.

 

부임 첫날 교무실로 불렀다.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선생님이란 자리에 앉아 “조수아”하고 불렀다. 머뭇거리다가 “예”하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그리고는 말이 없다. 타고난 쾌활함도 상냥함도 없다.

“따라 해 봐. 예, 선생님 부르셨어요?”

“예, …… 부르셨어요?”

“다시”

“예, 선생님 부르셨어요?”

“맞아. 이제부터 아저씨가 아니다. 선생님이다.”

 

그렇게 나는 수아의 선생님이 되었다. 그로부터 졸업하는 날까지 2년간이나 국어와 문학을 가르쳤다. 붙임성 있고 상냥한 수아는 나와 날로 가까워졌다. 자연히 그는 나를 대할 때 아버지 친구라는 생각에서 멀어졌다. 제 아빠를 만나러 제집에 가도 자연스럽게 ‘선생님’이라 부른다.

 

다행히 수아는 공부도 열심히 하고, 아이들을 넓게 사귀며, 학교생활이 행복해 보였다. 어른들의 눈으로 보아도 나무랄 데 없는 학생이었다. 좋은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고 공부도 함께 하는 좋은 모습이었다. 그렇게 밝은 모습은 다른 교사들이나 다른 학생들에게 소문이 날 정도였다. 선배 남학생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나있다는 이야기를 수아와 가장 친한 아이가 내게 귀띔해 주었다. 나도 과연 그럴 만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내게도 아주 익숙해져서 여느 학생들처럼 스스럼없이 대했다. 멀리서도 쫓아와 인사하고, 어려운 일 있으면 찾아오기도 했다. 어떤 때는 아빠처럼 대하고 어떤 때는 선생으로 대해 주어서 내게 수아는 없는 것보다 편안했다. 그래도 절친한 친구의 딸을 사제지간으로 만나는 일은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대부분 아이들은 아빠 친구인 선생을 피해 다닌다. 그런데도 수아가 나를 피하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가깝게 대해 준 것은 생각하면 지금까지 고맙다.


오늘 손가락을 자르는 이 장갑은 바로 수아의 선물이다. 그 녀석이 대학에 합격하고 졸업하는 날 아르바이트를 해서 샀다면서 이 장갑을 내밀었다. 졸업선물을 준비하지 못한 나를 민망하게 했다. 나는 친구 딸내미인 제자로부터 받은 장갑이 자랑스러워서 아껴서 끼고 다녔다. 품위를 지켜야 할 자리에 가거나 어려운 손님을 만나는 날만 끼었다. 장갑을 끼면 가죽이 부드러워서 꼭 내 살 같았다. 아주 추운 날, 가죽 장갑을 끼면 손이 시린 법인데 이 장갑은 수아의 마음 씀씀이처럼 따뜻했다. 

 

어느새 그 녀석이 졸업한지 15년이 되었다. 수아는 고등학교 선배인 늠름한 청년을 만나 결혼을 하고 행복하게 잘 산다. 지금도 그는 나를 선생님으로 만난다.

 

오랜 세월 차가운 겨울 날씨로부터 내 손을 지켜준 장갑도 이제 닳고 닳아 구멍이 났다. 장갑을 새로 사고 버리려고 하니 수아의 순박한 마음을 버리는 것 같았다. 더 오랜 세월 그 아이의 고마운 마음을 더 곁에 두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손가락을 잘라 운전할 때 끼기로 한 것이다. 잘라놓고 보니 마음은 아프지만 훌륭한 운전 장갑이 되었다. 한 15년은 더 낄 수 있을 것 같다.

(2011.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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