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서리와 햇살(교단)

서리와 햇살의 섭리

느림보 이방주 2007. 11. 1. 13:12
 

새벽 학교 마당에 등불이 찬란하다. 외등에 비친 느티나무가 노랗게 물들었다. 산은 이미 물들이기가 한창이다. 산은 하늘 가까운 곳에서부터 노란 색으로 혹은 붉은색으로 물들어 간다. 낮에 먼 산을 바라보면 온통 그림이다.

 

어제 퇴근 후에 이화령에 갔다. 혼자 나서는데 이 선생님이 함께 가자고 했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조정하면서 그녀와 보조를 맞추었다. 이제 들꽃은 시들해 간다. 쑥을 뜯어 열한 명이나 되는 오랍아우를 부양하던 대장장이 딸의 한이 맺혀 피었다는 쑥부쟁이도 연보랏빛 꽃이 시들기 시작했다. 망초는 자잘한 꽃이 하얗게 씨나래를 날리며 사라졌다. 어머니 무명치맛자락 같던 취도 하얀 치마를 거두어들였다. 초록을 거두어들이고 시든 억새 사이에서 들국화만 더욱 샛노랗게 지조를 지킨다.

 

서리를 맞은 자연은 숨을 거둘 것은 이미 검은 색으로 그 생을 마감했다. 이렇게 한 번의 서리에도 약자와 강자는 사라지기도 하고 남기도 한다. 고구마 싹이나 호박잎은 참혹한 모습으로 생을 마쳤다. 들국화는 그 청초한 이파리가 더욱 파랗게 보인다. 그러나 강자라고 하는 것들도 된서리를 맞으면 고구마 덩굴처럼 시들어 버릴 것이다. 같이 서리에 약한 것이라도 응달과 양지가 다르다. 서리나 햇살이 다르기 때문이다. 섭리는 이렇게 서서히 자연을 정리해 간다. 서리를 맞아 숨을 죽이기도 하고 햇살을 받아 생명력에 북을 주기도 한다.

 

며칠 전 축제 공연의 총연습이 있었다. 나는 공연에 맡은 일이 없어서 무엇을 어떻게 도와야 될까를 가리지 못해 궁싯거리다가 총연습이라도 가서 끝까지 구경해 주기로 했다. 한두 마디 지적도 때로는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맡은 일만은 충실히 해냈다. 시화전과 독후감 발표대회는 어느 정도 준비가 끝났다. 아홉 명의 교사들이 하나가 되어 준비하는 축제는 6,70명이 불구경하듯 하는 행사보다 훨씬 옹골차다.

 

나는 총연습에서 이미 가슴이 움직였다. 일학년 담임인 김 선생님이 노래하는 현영이와 경아의 뒤에서 아이들과 함께 율동을 해주고 있는 모습 때문이었다. 이른바 백 댄서가 된 것이다. 단순히 교사가 아이들과 함께 활동하는 모습은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현영이는 지난 일 학기 동안 내게 기초 읽기와 쓰기를 공부한 아이다. 다른 선생님에게 셈하기까지 공부했다. 그래서 이제 읽기, 쓰기, 셈하기 때문에 공부에 큰 지장을 받지는 않게 되었다. 읽기와 쓰기가 막힌다는 이유로 초등학교 때부터 아이들이나 교사에게 소외되어 그 작은 가슴에는 퍼렇게 멍이 들었을 것이다. ‘학교’라는 말을 들으면 꿈을 키우기보다 수렁에 빠지는 것과 같은 좌절감을 먼저 느꼈을 것이다.

 

악성 빈혈에 걸려 삶과 죽음의 문지방을 넘나들었던 초등학교 5학년 때, 나는 뼈만 남은 앙상한 팔로 턱걸이를 한 번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담임선생님의 무시와 야유는 나에게 학교는 지울 수 없는 좌절의 멍이 되었다. 편견에서 벗어나면 읽기 쓰기를 못하는 것도 턱걸이를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현영이가 읽기와 쓰기에 서툰 것은 교사로서 내가 저지른 죄처럼 생각되었다. 그래서 한 번도 야단치거나 윽박지르지 않았다. 참회하는 마음으로 그에게 초등학교 3학년 과정을 가르쳤다. 그러나 때로는 마음속으로 참 야속하다는 생각도 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늘 부끄럽기만 했던 착한 현영이가 선망의 대상이던 평범한 친구들을 뒤에 세우고, 더구나 선생님까지 뒤에 세우고 노래를 부를 때 마음이 어떠했을까? 조금은 해학적인 대중가요 ‘어머나’를 귀엽게 부르는 동안, 처음에는 주눅이 들어 있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아침 햇살을 받아 나팔꽃이 조금씩 열리듯이 조금씩 웃음이 피어나더니 동작도 점점 커졌다. 바라보던 아이들은 손뼉으로 박자를 맞추며 추임새를 넣었다. 자신감 있는 율동을 넘어 이제 재미있는 표정까지 지어가며 노래를 부른다. 가슴조이며 바라보던 아이들이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나는 가슴이 뭉클했다. 김 선생님의 어머니 같은 미소는 한줄기 햇살과 같았다. 좌절감으로 스러지는 아이에게 내리는 한 줄기 따사로운 햇살이었다.

 

노래를 마치고 자리에 돌아와서도 내내 밝고 자신감 넘치는 현영이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나는 덩달아 행복에 젖었다. 교사의 따뜻하고 성스러운 마음 씀씀이가 이렇게 한 아이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교사가 마음만 먹으면 아이들의 표현할 수 없는 문제들도 이렇게 쉽게 해결된다. 김 선생님의 서두르지도 않고 미워하지도 비교하지도 않으면서 지난 한 학기 동안 아이들에게 적용된 아름다운 프로그램이 피운 꽃을 한 눈에 보는듯했다. 선생님의 어설픈 노래와 율동은 무엇보다 아름다운 성자의 손짓이었다. 어둠 속에서 연꽃이라도 피울 수 있는 아름다운 미소였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늘에서 고민하던 어린 가슴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햇살이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서리가 될 수도 있고, 햇살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서리가 되느냐 햇살이 되느냐는 작은 관심으로부터 시작된다. 자연을 관장하고 움직이는 섭리처럼 교사의 의도된 행동은 아이들을 변화시키는 하나의 커다란 섭리라는 생각이 든다.

 

항상 어둡기만 했던 현영이는 복도에서 만나면 미소 지며 인사할 줄도 안다. 얼굴을 붉힌 채 한두 번 교무실을 들여다보더니, 이제 다른 아이들처럼 교무실에 놀러 오기도 한다. 머지않아 다른 아이들처럼 교무실 탁자에 놓인 선생님들의 간식을 자연스럽게 집어 먹기도 할 것이다. 나도 그날을 기대하며 그에게 비칠 한 줄기 작은 햇살을 찾아야겠다.

(2007. 1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