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서리와 햇살(교단)

연풍일기 -들밥 나누는 마음으로-

느림보 이방주 2006. 3. 16. 22:04

그림 같은 연풍중학교

 

  2월 28일. 연풍 출근 첫날이다. 3월 2일 시업식에 앞서 새 조직의 첫 만남이다. 인문고에만 줄곧 근무해온 나는 중학교 근무에 대한 기대와 설렘으로 초임 이후 33년 만에 처음으로 가슴이 떨렸다. 작고 아담한 연풍중학교는 아침햇살을 맞아 솜이불처럼 포근해 보였다. 교문 앞 느티나무, 회양목으로 둘러싼 꽃밭이 정답다.

 

부임인사를 하고 직원회의에서 단촐한 아홉 식구가 맡아야 할 학급 담임과 교무분장을 배정받았다. 손을 뻗으면 바로 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던 건너편 선생님들의 자리가 어느새 조금 멀리 보였다. 그만큼 새로 살아야 할 사무실에 익어가는 것이다. 책상을 옮기고 약간의 주변 청소를 하고 그런 저런 일상의 일과가 끝났다.

 

선 채로 업무 협의도 대충 끝나고, 교무실도 정리되고, 새 식구들의 얼굴도 익어갈 무렵, 친목회장이라는 김 선생님께서 점심 식사 준비가 다 되었다고 했다. 친목회장이 점심 식사까지 챙기는 분위기가 참으로 낯설었다. 친목이 일상이 된 분위기다. 밖에는 함박눈이 흩날린다. 그러나 마음은 더 할 수 없이 포근하다.

 

우리가 안내된 식당은 희양산이 있는 은티 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었다. 식당 마당에서 바라본 연풍면 소재지는 포근하고 아늑하다. 너른 공터, 널찍하게 잘 닦여 포장된 고샅길과 연풍 향교, 천주교 연풍성지는 현대와 고풍스러움이 적당히 구색을 맞추고 있다. 게다가 백두대간의 신선봉, 마패봉, 깃대봉, 신선암봉, 조령산, 백화산, 이만봉, 희양산, 구왕봉, 악희봉이 마을을 빙 둘러싸고 있어 언뜻 오지처럼 보인다. 그러나 마을 서쪽 산기슭으로 중부내륙고속도로가 터널을 지나 서울로 바로 통한다. 희양산과 이만봉 골짜기에서 얼음이 녹아 내려오는 물에는 아이들의 맑은 얼굴이 담겨 흘러오는 듯하다. 

학교 뒤에서 멀리 보이는 신선암봉

촌스런 음식이 정갈하게 차려진 방으로 안내되었다. 식당 주인은 마치 암행어사라도 출두한 것처럼 우리를 맞아 준다. 쑥스럽다. 그런 대접을 받아본 것이 정말 몇 해 만인가? 교육에 대한 나의 철학이 뼈를 내려 받은 교직의 고향 의풍에 돌아온 기분이다.

 

달래무침, 고추튀각, 들기름 발라 구운 김, 자연산 버섯볶음, 얼갈이 배추겉절이에 저가 자꾸 간다. 게다가 아욱을 넣고 집된장을 풀어 끓인 올갱이국 맛이 이 고장 인심처럼 부드럽고 구수하다. 국과 밥을 자꾸 더 내어 놓는 주인 여자의 푸근함이 밥 인심이 남다르게 좋으셨던 숙모님을 생각나게 한다.

이래도 타산이 맞는가. 싶어 물어 보았다.

“예전에 들밥을 내갈 때는 지나가는 사람 몫까지 따로 내갔잖아요. 우리네 먹는 인심이야 어디를 가나 나누는 것이 제일이지요. 하물며 선생님들이 오셨는데요. 입에 맞으시면 많이 잡수세요. 그러시면 저희가 고맙지요.”

“들밥 나누는 마음”

 

나는 가슴이 뭉클했다. 들밥을 나누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그렇게 연풍의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 각오도 없이 연풍 아이들을 대할 수 없다. 사택이 있지만 여기에 머물러 살지 못하고 날마다 잔인한 도시에서 드나들어야 하는 처지이므로 참으로 난감하기 짝이 없다. 이 황홀한 성찬을 3500원을 받고 500원을 이웃돕기 성금으로 낸다고 한다. 그분의 잔잔한 미소로 보아 ‘돕기’보다는 ‘나눔’에 진정한 의미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들밥 나누는 마음”

도시에서 온 내가 내일부터 이 천사와 같은 이들의 자녀들에게 나누어줄 들밥은 무엇일까? 두렵다.

천사들의 휴식시간

    

3월 2일, 밤새 눈이 내렸다. 참 많이도 내렸다. 소리도 없이 내린 눈이 온통 하얗게 세상을 덮었다. 도회나 시골이나 모두가 하나의 세계로 변해버렸다. 빙판길 일백팔십 리를 기어 학교 도착하니 9시 40분이다. 정말이지 그동안 호강한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아직도 함박눈이 흩날리는 창가에서 선배 선생님이 타 주는 따끈한 커피를 마시면서 머릿속으로 아이들에게 나누어줄 들밥을 정리했다. 그러나 내안에 쌓아 놓은 들밥도 없이 나눔의 길은 멀고도 험난하기만 했다.

(2006.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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