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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 삼계탕이 배달되었다. 여름감기로 입맛을 잃은 시부모를 위해서 며느리가 보냈단다. 뚜껑 있는 플라스틱 그릇에 담아서 아직도 뜨겁다. 백김치, 깍두기, 파 송송, 후추소금까지 정갈하다. 새로 담근 열무김치를 꺼냈다. 동치미무가 있었으면 금상첨화겠다. 아삭아삭 풋고추도 내놓았다. 상은 금방 차려진다. 아내가 다른 그릇에 다시 담아 먹자고 하는 걸 그대로 먹자고 했다. 내게는 격식을 차릴 겨를이 없다. 우선 김칫국물을 한 숟가락 떴다. 입안이 얼얼하다. 이 순간을 기다리며 목욕재계하고 얌전하게 엎드린 닭님을 뒤집어 상면했다. 젓가락으로 찍어 가르기에는 등짝이 너무 여리다. 이미 반쯤 갈라진 배를 열었다. 찰밥 덩어리가 얌전히 좌정하였다. 대추, 밤을 건져 잔반통으로 보냈다. 쓴맛은 빨아들이고 단맛을 내보냈으..

죽粥

죽(粥) 아내가 저녁으로 콩나물죽을 끓였다. 오랜만이다. 목감기로 고생하는 남편에 대한 배려이다. 한술 떠 보았다. 된장을 덜 풀고 고춧가루를 조금 더 넣었으면 칼칼한 맛이 더 진했을 것 같다. 그래도 콩나물이 많이 들어가서 구수했다. 뜨거운 죽을 한 숟가락 가득 떠서 후후 불어 입에 넣어 보았다. 깔깔했던 목이 확 뚫리는 기분이다. 식도를 타고 뜨겁게 흘러내리면서 니글니글한 기름기까지 개운하게 씻어 내려가는 듯하다. 잃어버린 입맛에는 콩나물죽이 약이구나. 죽은 치유이다. 구수하고 개운한 콩나물 맛으로 먹으면서도 죽사발을 휘저으면서 쌀알을 찾는다. 잠재된 습관이 이토록 오래 간다. 죽도 보릿고개도 참 지겨웠다. 조반석죽(朝飯夕粥)도 호화롭게 생각되던 시절이다. 아침에는 밥을 먹고 점심은 거르고 저녁은 으..

몽단이재 의마총(義馬塚)

몽단이재 의마총(義馬塚) 말무덤은 잡초에 묻혀 있었다. 주검 모양대로 봉분을 지었는지 몸통, 머리, 네 다리가 말의 형상 그대로이다. 7월의 햇살이 쪼아대니 풀이 삐들삐들 말랐다. 봄에 피었을 삐비꽃 한 무더기가 마른바람에 흔들린다. 의마가 찢어 물고 왔다던 주인 매은당梅隱堂 박동명朴東命 장군의 옷자락 같다. 청주시 옥산면 국사리 의마총을 찾아갔다. 봉분 앞 ‘義馬之塚의마지총’이란 표지석이 개망초 꽃대에 가렸다. 개망초가 하얗게 핀 제절이지만 옥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梅隱堂義馬之塚碑’ 육척 비문에 고스란히 남았다. 비석은 팔작지붕 모양의 가첨석까지 얹었다. 비를 세운 이들의 정성이 갸륵하고 격식이 있다. 제절 아래 2004년에 세운 ‘몽단이재와 의마총 유래비’는 옥산면 이장들이 정성을 모았다. ..

지금 율봉역에는

지금 율봉역에는 저녁 8시, 율봉공원은 활기가 넘친다. 유월초순, 비릿한 밤꽃 향기가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무대 위에 한 여성이 음악소리에 맞춰 춤인지 체조인지 흔들어댄다. 공원 잔디밭까지 점령한 사람들이 함께 흔들어댄다.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며 흘끔흘끔 쳐다보니 긴 머리 큰애기도 있고 빠글빠글 볶은 머리 아줌마도 있다. 엄마 따라온 젖먹이 아기는 유모차에서 흔들어댄다. 걸음마 어린 아가도 아장아장 흔들흔들 흔들어댄다. 조밥에 입쌀 섞이듯 사내들도 듬성듬성 흔들흔들한다. 강아지들은 잔디밭에서 제멋대로 뛰어다닌다. 밤이다. 밤꽃 냄새 흐드러지는 밤이다. 세상이 흔들어대니 나도 흔들린다. 사람들 사이를 빠른 걸음으로 빠져나간다. 철강으로 납작하게 만들어 세운 역마(驛馬) 세 필이 달리는 모습으로 멈..

별시인도 꽃시인도

별시인도 꽃시인도 별시인 얼굴에는 아직도 열여섯 윤기가 남았다. 나이는 이순이어도 정서는 열여섯 소녀이다. 생각은 유리처럼 투명하다. 때로 오해받을 만큼 영혼이 맑다. 누가 뭐라 말을 해도 맑게 웃으며 받아들이고, 솔직하게 대답하는 이분이야말로 귀가 순해지는 나이라는 이순(耳順) 값을 제대로 한다. 이름은 그냥 이르는 말일까, 소망하는 주문(呪文)일까. 주문이든 부름이든 ‘별’은 그에게 꼭 맞는 이름이다. 별시인은 어찌 별이 되었을까. 윤동주를 좋아한다고 한다. 맞아, 들여다보면 동주의 눈빛만큼 맑고 깊은 지성이 담겼다. 긍정 속에 동주만큼 쓸쓸함이 담겼다. 시선을 결코 높은 곳에 두지 않는다. 높은 곳만 바라보는 눈을 욕심의 창이라 한다면, 낮은 곳만 내려다보는 별시인의 눈은 사랑의 창이다. 그의 시는..

철학적 언어로 승화된 일상의 미학 -임미옥의 <모정의 영토>-

철학적 언어로 승화된 일상의 미학 -임미옥의 - 임미옥의 수필 는 한국수필 2023년 3월호 [특집 충북수필문학회]편에 게재되었다. 어떤 평론가들은 수필이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문학성이 떨어진다고 말한다. 수필의 소재는 일상을 떠나서 좀 더 특이한 것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수필은 물론이고 다른 어떤 장르이든 현실에서 건져 올리는 글감이 없이는 글을 쓸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맛있는 음식을 담을 그릇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일상이란 작가가 부닥치는 문제를 발견하고, 발견한 문제를 해결하면서 아픔을 치유하는 삶의 현실이다. 수필은 일상을 철학적으로 해석하여 따뜻하고 잔잔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치유의 문학이다. 그런데 일상을 떠나야 문학성을 제고할 수 있다는 말은 지극한 편견에 의한 수필 폄훼..

CJB 라디오 박용관의 라디오 쇼 시나리오

코너 : 리딩충북(책읽는 충북 캠페인) 출연 : DJ(박용관) , 출연자 이방주 시간 : 매주 목요일 (3/4부) [PM 6:40 /7:00 생방송] 2023. 6. 8. 장소 :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사운로 59-1 CJB 청주방송 5층 라디오 (편성제작국/제작팀FM) 내용 : 독서의 즐거움을 함께 공유하며 책을 소개하는 코너 (독서모임처럼 대화하듯이 진행하게 됩니다) 노래 3곡 선곡 (선곡 이유도 생각해주시면 더 좋습니다.) 1. 송창식의 [우리는] 기분이 썩 좋은 일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제게 외모가 송창식과 닮았다고 합니다. 제가 좋아 하는 노래이고 가사가 주는 의미가 참 깊습니다. 제가 수필을 쓰면서 연인 같은 팬이 많습니다. 그 분들에게 이 노래를 선물하고 싶습니다. 2. 조용필의 [친구여] ..

동주를 찾아가는 길

동주를 찾아가는 길 아침 식사를 마치고 용정으로 향했다. 용정은 이도백하시에서 연길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작은 도시이다. 용정으로 향하는 길목은 그냥 1970년대 우리 고향 마을을 지나는 것 같다. 길림성을 뒤덮었던 옥수수밭도 여기서는 뜸하다. 우리 고향 야산 같은 산에는 사과나 복숭아 과수원이 있고, 과수원 언덕을 내려오면 나지막한 초가집이나 기와집이 있고, 마당가에 헛간을 들이고, 울타리에는 덩굴강낭콩이 보랏빛 꽃을 피우는 그런 마을이다. 사립문으로 들어가는 오솔길에는 빨갛고 노란 백일홍이나 빨간 맨드라미가 피고, 뜰에는 분꽃이 피어 누나에게 저녁 보리쌀을 안칠 시간을 알려 주는 그런 마을이다. 텃밭에는 고추가 열리고 꽃대를 올린 상추가 자잘한 꽃을 피운다. 들로 나가면 이제 나락이 패어나기 시작할 ..

뽀리뱅이와 흙

뽀리뱅이와 흙 뽀리뱅이가 꽃을 피웠다. 공원 잔디밭 경계석 이음매 틈에서 꽃대 서너 줄기를 쑥 뽑아 올리고 노랗게 꽃을 피웠다. 고향 마을에서는 밥보재기라고 불리는 나물이다. 이른 봄 부드럽고 습기가 촉촉한 흙에서 밥보자기만큼이나 널찍하게 땅을 차지한다. 그런데 잔디밭 경계석 이음매나 경계석과 보도블록 틈에서 나와 꽃대를 세우고 노랗게 야들야들한 꽃을 피웠다. 아파트 축대로 쌓은 거대한 자연석 위에서도 여린 꽃을 피웠다. 울퉁불퉁한 바위에 바람으로 날려 쌓인 흙에 뿌리를 내리고 아기 손바닥만 한 밥보재기를 펼치고 꽃대를 세웠다. 한 숟가락도 안 되는 흙에 뿌리를 내린 것이다. 꽃을 피운 그놈의 생태가 신기하고 기특하다. 악착같은 뽀리뱅이도 기특하지만 흙은 더 위대하다. 바위 위에 쌓인 한줌도 안 되는 흙..

비움, 변환하는 존재의 아름다움 (허석 수필론)

허석(허정진)의 수필 세계 비움, 변환하는 존재의 아름다움 허석의 《시간 밖의 시간으로》 《꿈틀, 삶이 지나간다》에서 이방주 □ 수필이 찾아가는 길 신은 죽었다.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의 말이다. 그가 왜 신은 죽었다고 말했는지는 상관할 바 아니다. 신이 사라진 세계에서 우리가 어떻게 안식을 얻을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오늘날 우리가 의탁해야 할 곳은 신이 아니라 과학이고 물질이 되었다. 과학이나 물질이 신보다 성스럽게 생각되는 시대이다. 20세기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이 시대를 ‘궁핍의 시대’라고 규정했다. 그는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궁핍함도 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