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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은뱅이 일으키기

앉은뱅이 일으키기 교회는 조용했다. 살그머니 들여다보았다. 앉아있을 수밖에 없는 앉은뱅이 노인 옆에 전도사가 무릎을 꿇은 채 기도하고 있었다. 기도는 고요하고 경건해 보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기도가 격렬해진다. 멀어서 알아들을 수는 없어도 간절함이 보였다. 하느님이 강림하신 듯, 예수처럼 성스러웠다. 예수께서 마지막 날 게쎄마니 언덕에서 기도를 마치고 돌아와서 누워 자고 있는 제자들에게 ‘아직도 자고 있느냐. 깨어 기도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했던 성스럽고 안타까운 모습이 보였다. 절대자 앞에 우리를 데려다 주는 진정 사제의 모습이었다. 그는 접신(接神)을 한 것일까. 스스로의 생존이 아니라 앉은뱅이 일으키기에 몰입한 전도사가 무아(無我)의 경지에 이른 것으로 보였다. 전기도 없어 어둡고 침침한 예..

자벌레는 얼음을 재고, 개구리는 바다를 말하고

책머리에(수필과비평 11월호) 자벌레는 얼음을 재고, 개구리는 바다를 말하고 이방주 가을비가 그치고 날이 서늘해졌다. 아파트 정원에 나무들이 고요하다. 정원에 나가보았다. 오감이 상쾌하다. 비 그친 가을날에 받는 반기가 흡족하다. 새팥덩굴이 철제 담장을 칭칭 감고 올라가 노란 꽃을 피웠다. 노란 꽃 사이로 두 치쯤 되는 가느다란 새팥꼬투리가 맺혔다. 새팥꼬투리 진한 녹색이 갈색으로 변하면 겨울을 준비해야 한다. 꼬투리가 터지고 떨어진 씨알들이 겨울잠을 자며 봄을 기다린다. 씨알은 얼음 속에서 깊은 잠을 자고 나야 초록의 새싹을 틔운다. 그것이 춘화(春化)라는 시간의 섭리이다. 노란 꽃이 예쁘고 꼬투리가 신기해서 들여다본다. 계절의 순환이 여기 담겼다. 새팥덩굴 가느다란 줄기를 따라 자벌레가 기어간다. 새..

에코페미니즘과 섹슈얼리티 수용에 관한 제언

수필미학 문학캠프 주제발표 에코페미니즘과 섹슈얼리티 수용에 관한 제언 이방주 ◇ 필요성 - 지난 20세기는 산업혁명, 정보산업의 급속한 발전으로 인간이 물질에 지배당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었다. 그 결과 인간성, 인간의 정서, 민족정서가 그 신성함을 상실하였다. 신에 대한 신성한 믿음이 있어야 인간성이 존중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반드시 회복하고 찾아야 할 가치라 생각한다. - 최근에는 AI가 모든 예술 창작을 대신하려 하는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챗 GPT가 소설을 창작하고, 시를 쓰고, 자서전이나 자기소개서를 대신 써 준다고 한다. 그런데 수필은 감성과 이성 중심의 문학이고 관조와 자아성찰의 문학이다. 아무리 인공지능이 첨단을 걷는다 해도 수필가의 감성을 대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 철학의 빈..

빗장을 풀고 존재로 나아가기--강현자의 <대문 즘 열어봐유>-

빗장을 풀고 존재로 나아가기 -강현자의 - 이방주 nrb2000@hanmail.net 인간의 기본적인 본능을 식욕과 성욕이라고 말한다. 그럴듯하다. 식욕은 생명의 에너지이기에 존재로 나아가려면 일단 생명을 유지해야 한다. 성욕은 종족보존을 위한 본능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다. 생각해보면 생명의 유지와 종족의 보존만큼 소중한 일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이것은 인간을 생태계의 일부인 동물로서의 개체로 이해한 것이다. 식욕과 성욕은 생명유지와 종족보존이라는 하나의 본능으로 치부하고, 인간을 동물이 아닌 철학적인 존재로 이해하면 하나의 본능을 더 들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고독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본능이다. 인간은 고독감, 무력감, 허무감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무던하게 애를 태운다. 다시 말하면 관계에 대한 본..

구녀산성에서

성사랑은 끝났다. 높고 가파른 산을 몸이 허락하지 않는다. 인제는 몸이 산성과 겨루기를 할 이유도 없다. 마지막으로 나지막한 구라산성을 갔다. 구녀산성이라고도 하는 구라산성은 초정에서 미원으로 넘어가는 이티재에서 30분이면 오를 수 있다. 상당산성에서 한남금북정맥을 따라 좌구산 쪽으로 등마루를 밟으면 구라산성과 만나기도 한다. 구녀산성에는 아홉 누이와 막내아우의 성 쌓기 내기 전설이 있다. ‘오누이 성 쌓기 내기’ 유형의 전설은 예산의 임존성에도 ‘묘순이 바위’ 전설이 전해지고, 세종시 애기바위성에도 유사한 전설이 전해진다. 함께 쌓으면 될 것을 혈육이 다투다 함께 파멸을 맞는 이야기이다, 구녀산성 전설은 구라산성이 구녀산성으로 이름이 바뀌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 고구려 산성이라는 의미에서 ..

수필 쓰는 사람은 -무심수필 6호 권두 수필-

권두 수필 수필 쓰는 사람은 정원에 낙락장송들이 고요하다. 가지가 비바람에 얼마나 시달렸는지 흐느적거린다. 그제부터 엊저녁까지 태풍 카눈이 커다란 손으로 세상을 어루만지고 지나갔다. 카눈은 느림보 태풍이라는 이름으로 느릿느릿 왔지만 바람은 거세게 불었다. 우리 아파트 정원 큰 나무들은 크게 상처를 입지 않아 다행이다. 그제는 밤새 비바람이 몰아쳤다. 유리창에 물방울이 흥건하다. 밤새 비바람에 시달린 정원이 궁금해서 새벽에 나가보려니 바람에 막힌 공동 현관문이 쉽게 열리지 않는다. 간신히 문은 열었으나 나갈 수는 없다. 굵은 빗줄기가 전후좌우로 미친 듯이 쏟아 붓는다. 우산도 소용없다. 비를 맞히려고 정원 콘크리트 구조물 위에 올려놓았던 난분 하나가 바람에 날려 떨어졌다. 다행히 잔디밭으로 떨어져서 깨지지..

춤추는 호랑이

춤추는 호랑이 이방주 호무골은 청주시 상당구 금천동과 용담동 사이에 있다. 지금은 거대한 아파트단지가 들어앉았다. 2000년 즈음에 근무하던 금천고등학교 복도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하루 종일 따뜻한 햇살이 내리는 과수원이 보이고, 과수원 한가운데 평화로운 집 한 채가 아주 가깝게 보이기도 했었다. 한 5년쯤 지나서 주변이 시가지가 조성되고 아파트가 들어섰는데도 과수원 마을은 그대로 보였다. 어느 토요일 찾아가보기로 했다. 학교 뒤쪽으로 4차선 도로를 따라 주성고등학교 쪽으로 가다보면 산성초등학교가 나오는데, 산성초등학교 앞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골짜기에 아담한 마을이 나온다. 새로 생긴 아파트 단지에도 편입되지 않은 마을은 동글동글한 야산 아래 전설을 간직한 채 평화로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명태 한 코 사들고 가고 싶은 윗버들미

명태 한코 들고 찾아가고 싶은 윗버들미 -목성균의 을 읽고 이방주 그날은 가랑비가 내렸다. 목성균 선생의 생가를 찾아가는 날이다. 사과덩이가 불그스름하게 살을 찌우는 과수원 골짜기를 지나자 산협촌 막다른 길 끝자락에 산기슭을 따라 새로 지은 벽돌집들이 모여 앉았다. 마을 정자나무 밑에 차를 세우고 지나는 사람에게 선생의 생가를 물었다. 골목을 20m쯤 들어가서 선생이 살던 집을 허물고 부친에게 지어드린 아담한 집이 보였다. 골목에 백일홍이 빨갛게 피고 마당에는 잔디가 파랗다. 마당에서 차양을 타고 오르는 박덩굴에 하얀 조롱박이 대롱대롱 깔끔하다. 둘러보아도 명태 두 마리가 매달릴 만한 부엌기둥이 보이지 않아 아쉽다. 부인이 돌아가서 마음을 달랬다는 부엌궁둥이도 보이지 않았다. 노쇠하신 부친이 살기 편하도..

21세기 수필, 머묾과 벗어남의 미학

권두언 21세기 수필, 머묾과 벗어남의 미학美學 천명관의 장편 〈고래〉를 읽고 충격을 받았다. 이 작품은 인간의 꿈과 욕망 그리고 운명이나 현실과의 갈등을 다소 냉소적이고 해학적인 어조로 풀어낸 작품이다. 서사의 범위가 엄청나게 큰 데에도 놀랐지만, 규범과 상식을 벗어나는 낯설게 하기나 현실과 환상 사이의 드나듦의 서사구조는 읽는 사람을 빠져들게 했다. 처음에는 과연 현대에 창작된 소설인가 할 정도로 전기성傳奇性을 보여 황당하다가 어느 틈에 현실로 돌아온 서사에 빨려드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상식에서 벗어나는 듯 되돌아오고 되돌아오는 듯 벗어난다. 염상섭의 〈삼대〉나 채만식의 〈태평천하〉처럼 단군신화를 원형으로 하는 삼대구조에 머물면서도 완전한 혈통도 아닌 여성 중심의 삼대구조로 틀을 벗어난다. 현실..

반야로 가는 길

반야로 가는 길 월류봉 광장에 우리가 모였다. 여기서 반야로 가는 길을 찾는다. 월류봉은 금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초강천에 감겨있다. 달이 경관에 취해서 머물다 간다는 월류봉 다섯 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바로 앞 오봉에서 바위 한 덩어리가 미끄러져 내려와 강 가운데서 불끈 일어섰다. 그 바위 마루에 월류정이 있다. 제 그림자에 취한 달도 편히 머물 수 있겠다. 정자까지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광이다. 월류정을 품은 광장은 풍류 마당이다. 시가 있고 향기로운 술이 있고 그리고 아름다운 것이 있고…. 예나 지금이나 색(色)의 공간이다. 우리는 여기서 투명한 참 지혜가 있는 반야(般若)의 세계로 찾아가야 한다. 초강천은 비단가람의 한 줄기이지만 성난 황소의 영각처럼 소리를 지르며 월류정 아래를 파고든다. 물안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