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언어로 승화된 일상의 미학
-임미옥의 <모정의 영토>-
임미옥의 수필 <모정의 영토>는 한국수필 2023년 3월호 [특집 충북수필문학회]편에 게재되었다.
어떤 평론가들은 수필이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문학성이 떨어진다고 말한다. 수필의 소재는 일상을 떠나서 좀 더 특이한 것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수필은 물론이고 다른 어떤 장르이든 현실에서 건져 올리는 글감이 없이는 글을 쓸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맛있는 음식을 담을 그릇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일상이란 작가가 부닥치는 문제를 발견하고, 발견한 문제를 해결하면서 아픔을 치유하는 삶의 현실이다. 수필은 일상을 철학적으로 해석하여 따뜻하고 잔잔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치유의 문학이다. 그런데 일상을 떠나야 문학성을 제고할 수 있다는 말은 지극한 편견에 의한 수필 폄훼이다. 수필을 문학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아 안달하는 이들의 편협한 사고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들에게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수필은 일상에 대한 철학적 해석이다.”
수필의 제재는 한계가 없다. 다만 수필의 제재로 소환된 작가의 체험이 작가가 자신의 소양에 따라 어떻게 인식하고, 어떤 철학적 소양으로 해석하며 얼마나 진정성을 가지고 고백하느냐에 따라 문학적 가치는 결정된다.
임미옥의 <모정의 영토>는 단순하고 진부할 것 같은 삶의 체험이다. 작가가 가족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다. 임미옥은 이러한 평범한 일상을 단순한 일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임미옥의 창작 교양의 다락방에는 가족에 대한 사랑이 가득하다.
<모정의 영토>는 ‘어머니의 자식 사랑’이라는 주제를 흔해빠진 서사를 통하여 그냥 줄줄이 고백하는 서술이 아니다. 모정은 바로 ‘된장’이라는 상관물을 업혀서 독자에게 전달된다. 수필가들은 이럴 경우 된장이라는 소재에 담긴 어머니의 손맛에만 취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 감각적 미감에 취해 작가 혼자 취해 황홀해하는 것으로 마감한다. 이 경우 독자에게 전달되는 공명(共鳴)은 없다. 임미옥의 모정의 영토는 모정과 영토가 나뉘어 물리적 분석을 통해 철학적으로 승화하여 하나가 된다. 수필은 소재의 속성에 대하여 물리적으로 분석하여 그 본질을 끝까지 추구하여 그것을 형이상학적으로 승화할 때 큰 울림을 주게 마련이다. 이 작품은 된장의 본질을 물리적 속성으로부터 분석하여 모정이라는 철학적이고 영적인 본질로 승화함으로서 울림이 배가된 것이다. 문학은 인식과 형상의 산물이라면, 임미옥 작가의 인식은 수필적 상상의 단계를 차근차근 거치면서 설리(說理)에 맞게 형상화하였기에 예술적 공명을 잔잔하게 선물하고 있는 것이다.
독자에게 전해지는 공명은 작가가 삶을 대하는 진지한 자세와 진솔한 고백에서도 드러난다. 작가가 모정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겸허하고 진지하다. 작품에서 부수적인 일화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시누이들에 대한 포용이 전제되어 있으므로 단순한 경험이 ‘모정’과 ‘영토’라는 철학적 언어로 자연스럽게 승화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시누이들은 어머니가 딸이 아닌 며느리에게 베푸는 사랑의 영토가 더 크고 넓다는 것을 이해하고 기쁘게 수용한다. 이즈음에 이러한 가족 간의 관계를 드러내는 일은 흔하게 볼 수 있는 삽화는 아니다. 아마도 그것은 사랑의 상관물이 된장이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며느리인 작가는 그러한 시누이들에 대한 신뢰를 비빌 언덕 삼아 모정의 영토를 혼자 차지할 수 있었다. 된장으로 표현되는 사랑의 영토를 말이다. 결미에서 이 가족의 사랑은 혈육을 넘어 세대를 넘어 작가와 독자의 관계를 넘어 인간 모두의 사랑으로 승화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바로 관계의 미학이다.
지구상의 모든 생태계에서 인간이 가장 존엄하다는 것은 인간의 사랑은 존재를 넘어 관계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관계’라는 말에는 본능보다 문화적 질서와 규범을 암시하고 있다. 임미옥 수필가는 그의 체험에서 사랑의 문화를 찾아내는 혜안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자신의 사유를 진정성 있는 언어로 풀어냈기 때문에 문장이 걸림도 없이 독자의 가슴으로 다가간다. 이 작품의 시사점은 단순하다. 그러나 언어가 단순한 만큼 그 의미는 심원하다.
“수필은 일상을 떠날 수 없다. 일상의 철학적 해석이 그 문학성을 좌우한다.”
[일상의 철학적 승화]
모정의 영토
임미옥
어머니는 해마다 장을 담그셨다. 팔남매 중 스스로 담가 먹는 큰 시누이를 제외한, 일곱 집이 먹을 양을 담그셨다. 시누이들은 된장을 친정에서 퍼다 먹었다. 오십 줄이 넘도록 어머니가 살아계실 동안 그 일은 이어졌다. 시누이들에게도 각자 시어머니가 계시고 대한민국 어머니들 장 담그는 솜씨는 모두 선수 아니던가. 그런데도 된장만큼은 친정에서 퍼갔다. 몸은 시집갔어도 된장 맛은 두고 갔나 보다.
시누이들은 모였다 흩어질 때가 되면 장독으로 우르르 간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까르르 까르르 장독이 들썩인다. 나로선 끼어들 수 없는 그녀들만의 세계가 펼쳐진다. 그날 나는 그 세계를 엿보다가 흥미로운 풍경을 관찰하게 됐다. 그녀들은, 어머님께 용돈도 넉넉히 드리고 형제자매간에 선물도 나누고 때로는 돈도 통용하는 관계다.
그런데 된장 앞에서는 눈빛이 달라진다. 장맛이 좋아서라고 만 하기엔 그 몸짓들이 너무들 진지하다. ‘이것만은 양보 안 해!’ 하는 저 치열한 손놀림들은 뭔가. 값으로 치면 자신들이 사온 비싼 어머님 옷값에 비할 게 아니잖나. 무언가 있다. 그 무엇이 무얼까. 그것은, 장맛을 넘어 공평하게 분배받는 모정의 영토인 거다.
어머니에게는 사랑을 분배하는 방식이 있었다. 마늘도 감자도 알밤도 제일 실한 건 장남인 남편 몫으로 갈라놓으신다. 그런데 된장만큼은 각자 퍼가라고 놔두셨다. 장독이 시끌벅적하다. 된장만큼은 큰오빠 우선이 아닌 공평한 우리 영토가 있다며 깔깔댄다. 그녀들이 주걱을 휘두르며 모정의 영토를 누린다. 그리움 맛 추억 맛을 푼다. 큰 양푼에 썩썩 비빈 밥 앞에 숟가락 들고 대들듯 독을 들여다보며 장을 푼다.
2014년, 겨울 초입쯤 어머님 전화를 받았다. “에미야 올해는 된장을 놔서 담아야겄다. 메주콩 여섯 말 샀으니 그리 알아라.” “어머니, 해마다 서 말씩 사시더니 올해는 많이 사셨네요?” “그래야 할 것 같다.” 서 말 사면 일곱 집이 퍼다 먹어도 남아갔기에 갸우뚱했으나 별다르게 생각 안 하고 콩값을 입금해 드렸다. 그리고 이듬해 어머님이 쓰러지셨다. 두 배로 담그신 게 마지막 장을 담그는 일이 되고 말았다.
그날 나는 구급차로 어머님을 모시고 서울 큰 병원으로 가고 있었다. “우리 나이에 한 번 나가면 다시는 못 돌아온다더라.” 하시며 구급차 안에서 눈물을 흘리셨다. “의학이 좋으니 어머님은 그런 일 없을 거예요.” 하고 안정시켜 드렸다. 그랬더니 “에미야… 된장 죄다 퍼다 늬집 김치냉장고에 넣어라. 이번 장은 다른 애들 퍼가기 전에 한 주걱도 남기지 말고 모두 퍼가야 한다. 꼭 그래야 한다.” 하시는 거다. 평생 사신 집과 정든 세간들을 고스란히 두고 가시면서 된장을 말씀하시다니….
나는 대답을 못했다. 갑자기 당한 일에 이대로 돌아가시는 건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유언처럼 된장 말씀을 하시는 거다. 구급차 안에서 하신 말씀은 사실이 되었다. 3차 병원에서 요양병원으로 다시 3차 병원으로 입퇴원을 반복하시며 6개월 넘게 전전하시다 결국 요양원에 안정하셨다. 그리고 7년 후 하늘나라로 가셨다. 요양원이 우리 아파트에서 도보로 5분 거리인지라 코로나 전까지 아침저녁으로 들러 안부를 여쭈었다. 시골집에 한번 가고 싶다고 하셨으나 누우신 상태로 수백 리 이동하시다 큰일 당할까 두려워 그리할 수 없었다.
하루는 큰시누이로부터 전화가 왔다. “엄마 말대로 해요. 애들에게 이번에는 퍼가지 말라고 전화했어요.” 내가 실행을 안 하니 어머니가 큰시누이에게 전화하셨나 보다. 나는 그녀들 영토는 남겨놓고 된장을 퍼왔다. 그리고 얼마 후 막내시누이 전화를 받았다. “언니, 된장 마르기 전에 모두 퍼다 김치냉장고에 넣으셔요. 엄마 유언이고 유산이잖아요.” 하는 거다. 나는 그녀들의 영토를 갈취하는 심정으로 나머지 된장을 퍼 담았다. 어머니가 다시는 장을 담글 수 없다는 사실에 울면서 펐다.
남편을 키운 산골바람에 숙성하여 내 집으로 와 자리 잡은 된장은 내 집 보물 1호다. 8년이란 시간이 숙성시킨 보물을 아껴 파먹는 방식이 있다. 큰 김치통에 담겨 꾹꾹 눌린 된장을 한 주걱 파서 작은 통에 옮겨 담고는 다시 꾹꾹 눌러 뚜껑을 덮어 놓는다. 그리고 누가 보면 안 될 것처럼 그 위에 김치통을 올려놓는다. 된장만큼은 점 하나만큼도 나가지 않는다. 어머니 사랑 한 숟가락 떠서 뚝배기에 풀 때마다 공평한 우리 영토라며 깔깔대던 소리가 들린다. 눈이 시리게 그리운 날들이다.
(한국수필 2023년 3월호에서)
'비평과 서재 > 문학과 수필평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빗장을 풀고 존재로 나아가기--강현자의 <대문 즘 열어봐유>- (0) | 2023.08.15 |
---|---|
명태 한 코 사들고 가고 싶은 윗버들미 (0) | 2023.08.11 |
비움, 변환하는 존재의 아름다움 (허석 수필론) (0) | 2023.04.18 |
김정옥의 <꺼꾸리에 올라> (0) | 2023.02.12 |
임미옥의 <하염없이 기찻길> (3) | 2023.0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