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들꽃 들풀에 길을 묻다

뽀리뱅이와 흙

느림보 이방주 2023. 4. 21. 11:33

뽀리뱅이와 흙

 

뽀리뱅이가 꽃을 피웠다. 공원 잔디밭 경계석 이음매 틈에서 꽃대 서너 줄기를 쑥 뽑아 올리고 노랗게 꽃을 피웠다. 고향 마을에서는 밥보재기라고 불리는 나물이다. 이른 봄 부드럽고 습기가 촉촉한 흙에서 밥보자기만큼이나 널찍하게 땅을 차지한다. 그런데 잔디밭 경계석 이음매나 경계석과 보도블록 틈에서 나와 꽃대를 세우고 노랗게 야들야들한 꽃을 피웠다. 아파트 축대로 쌓은 거대한 자연석 위에서도 여린 꽃을 피웠다. 울퉁불퉁한 바위에 바람으로 날려 쌓인 흙에 뿌리를 내리고 아기 손바닥만 한 밥보재기를 펼치고 꽃대를 세웠다. 한 숟가락도 안 되는 흙에 뿌리를 내린 것이다. 꽃을 피운 그놈의 생태가 신기하고 기특하다.

악착같은 뽀리뱅이도 기특하지만 흙은 더 위대하다. 바위 위에 쌓인 한줌도 안 되는 흙에 얼마나 많은 생명력을 품었기에 이렇게 꽃을 피워낼까 궁금하다. 흙에는 거름이 있고 물이 있고 너무 뜨겁거나 차가운 기운을 막아주는 어떤 힘도 있나보다. 흙이 가지고 있는 상생의 힘은 뽀리뱅이를 살리고 사람을 살리고 만물을 살린다. 흙은 그래서 생명의 근원이다.

뽀리뱅이의 생태를 보면서 오행(五行) 상생(相生) 원리를 생각한다. ‘土生金, 金生水, 水生木, 木生火, 火生土’라는 흙에서 시작해서 트랙을 한 바퀴 돌 듯 온전하게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완전 상생의 원리를 떠올린다.

상생의 원리를 보면 다 이루면 결국 다시 자신으로 돌아간다는 원리를 깨닫게 된다. 시인 오세영님은 그의 시 <모순의 흙>에서 ‘흙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진/ 모순의 흙, 그릇’이라고 했다. 흙으로 빚었지만 결국은 깨져서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모순된 상생의 원리를 말했다. 결국 자신으로 돌아가야 하는 흙과 그릇의 ‘이룸’과 ‘무너짐’의 과정이 예사롭지 않다. 그것을 ‘모순’이라고 지적한 것은 참으로 탁월한 사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이룸’이고 무엇이 ‘무너짐’인지 나의 얇은 사유로는 가늠할 수 없다. 시인은 사람도 결국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오행 상생법의 흙에서 시작해서 흙으로 돌아가는 일반적 법칙을 억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金生水, 水生木, 木生火, 火生土, 土生金’이면 어떠냐고 우길 수도 있을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金, 水, 木, 火, 土 중에서 만물은 쇠가 아니라 흙으로 이루어진 대지가 품어 안고 있지 않은가.

흙이 다른 모든 것을 한 울로 안고 있다는 사고는 훈민정음 제자 원리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훈민정음 제자 원리에서는 ‘순음(脣音)’ 계열인 ‘ㅁ,ㅂ,ㅍ’을 ‘토성(土性)’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입술이 모든 조음기관을 머금고 있는 것은 흙이 만물은 안고 있는 것과 같은 원리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면서 목구멍소리를 ‘水’, 어금닛소리를 ‘木’, 잇소리를 ‘金’, 혓소리를 ‘火’로 그 소리의 느낌과 견주어서 설명하였다. 입이 모든 조음 기관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 역시 탁월한 사고이다.

흙의 모순은 결국 흙이 되기 위하여 그릇으로 빚어진다는 것이다. 흙을 이기고 다지고, 두드리고 주물러서 만든 그릇이 불가마에 들어 잘 익은 홍시처럼 발갛게 고통을 견디어 모두 이루어낸다. 그 가장 영광된 순간에 깨어져 흙이 되는 파멸의 아름다운 모순을 인간의 삶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릇 뿐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은 흙으로 빚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고통으로 빚어진 만물은 가장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순간에 흙으로 돌아간다. 불경이나 창세기 같은 신화의 힘을 빌지 않아도 ‘흙의 모순’은 세상의 원리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우리는 물을 마신다. 土生金, 金生水니 우리가 마시는 물의 근원은 곧 흙이다. 우리는 밥을 먹고, 김치를 먹고, 미역국도 먹는다. 土生金, 金生水, 水生木이니 밥, 김치, 미역의 근원도 흙일 수밖에 없다. 고기도 먹지 않느냐고 이의를 제기하겠지만, 고기를 살려낸 것은 바로 뽀리뱅이 같은 식물이니 그 근원은 흙이다.

우리가 돌아가는 곳은 결국 어디일까. 거기는 바로 우리가 밟고 서 있는 흙이다. 우리의 숨소리도 흙으로 스미고, 우리의 허튼 말소리도 땅속으로 스민다. 우리가 더럽다는 모든 유형 무형의 배설물들이 땅으로 스며 흙이 된다. 흙은 깨끗하거나 더럽거나 다 받아들여 생명을 기르는 영양을 만든다. 오늘날 시멘트나 아스콘으로 흙을 싸바른 것이 문제이긴 하다.

우리의 육체는 날마다 조금씩 흙으로 돌아간다. 머리카락이 홀홀 날려 흙으로 돌아가고, 살갗도 한 껍질씩 흙으로 돌아간다. 현재의 나는 10년 전의 나가 아니다. 10년 전의 나의 육체는 이미 땅 속으로 스민 지 오래다. 뽀리뱅이가 힘겹게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도 결국 흙으로 돌아가듯이 흙으로 이룬 만큼 우리는 날마다 흙으로 되돌린다. 하루도 흙이 내가 되지 않는 날이 없고, 내가 흙이 되지 않는 날이 없다. 내가 흙이고 흙이 나이다.

흙은 살며 이루어온 나를 받아들이기도 하고, 내 삶의 종착역이기도 하다. 흙은 만물을 생성하고 만물을 다시 받아들인다. 이만큼 대지는 위대하다. 대지는 우리의 어머니이다.

(2023. 4.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