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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소(謫所)에서

적소(謫所)에서 적소에서 봄을 본다. 호수 가까이 버드나무 가지가 노릇노릇 연두로 물들었다. 소나무 숲엔 진달래가 흐드러졌다. 산은 마을을 가로막고 강은 산을 비집고 세상으로 나가는 길을 내어준다. 등잔봉 줄기가 호수에 잠기는 산자락 끄트머리에 노수신 적소인 수월정(水月亭)이 있다. 봄이 오듯 나도 적소에 왔다.노수신(1515~1590)은 상주 사람이다. 중종 때 벼슬에 나아가 명종 때 유배되었다가 선조 때 풀려난 정치가이자 유학자이다. 열일곱 살부터 장인 이연경에게 십년공부를 하여 스물일곱에 급제했다. 이조좌랑까지 올랐으나 소윤이 대윤을 몰아낸 을사사화 때 순천으로 유배되었다가 진도로 옮겨져 19년간이나 귀양살이를 했다. 다시 이곳 산막이 마을 달래강 가운데 작은 섬으로 옮겨졌다. 여기에 초막을 짓고 ..

[평론가가 뽑은 좋은 수필-4] 240325 ‘고백 없는 길에 대한 그리움’(임미옥의 수필 이방주 단평)

평론가가 뽑은 좋은 수필-4] 이방주 ‘고백 없는 길에 대한 그리움’ 임미옥 수필 ---『좋은수필』 1월호 게재https://daily.hankooki.com/news/articleView.html?idxno=1065759 고백 없는 길에 대한 그리움 사랑은 고백하는 순간부터 의무가 된다. 고백의 말은 윤리적 책임을 동반하기 때문에 용기가 필요하다. 과거의 과오를 고백하거나 미래의 다짐을 고백하는 말도 용기로부터 비롯된다. 수필은 고백의 심정을 받아 쓴 글이기에 윤리적 책임감이나 부끄러움을 넘어설 용기가 필요하다.월간 『좋은수필』 1월호에 발표된 임미옥 수필가의 작품 을 읽는 동안고백 없는 줄다리기가 가슴을 졸이게 했다. 두 청춘의 ‘말 걸어오기’ 줄다리기의 배경은 눈 쌓인 밤길이다. ‘눈..

내가 생각하는 좋은 수필(수필미학 세미나 자유발표 원고 20240328)

수필미학 세미나 자유발표 원고/ 2024. 3. 28./ 이방주 내가 생각하는 좋은 수필 - 읽히는 수필을 위하여- 수필문단의 가장 큰 문제는 읽히지 않는 것이다. 일반 독자들은 물론이고 수필가도 다른 작가의 수필을 읽지 않는다. 대부분의 수필가들은 자신의 글에만 도취되어 있는 것이다. 밥은 육신의 에너지원이 되기도 하지만 맛의 여운도 소중하다. 밥은 먹고 난 뒤 몇 시간이면 공복이 되고 남은 향기도 사라지지만 좋은 수필은 읽고 나면 시간이 지날수록 더 배가 고프고 여운도 더 진하게 남는다. 그러한 공복에서 오는 쾌감과 여운이 우리네 아픔을 치유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작가는 창작 과정에서 변환과 성장을 가져오고 독자는 읽는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고 갈등을 해결한다. 이와 같이 수필을 치유의 문학이라고 하지..

[평론가가 뽑은 좋은수필-3] 240319 <이토록 유쾌한 자기 긍정>(이명지 작품 한혜경 단평)

이명지 '성당 가는 길'...'문장' 2024 봄호 게재 한혜경 교수 섬네일. 사진=데일리한국DB "우리 인생의 여기저기 흩어진 조각들을 가지고 서사를 만들거나 발견하는 작업을 하면 우리 삶은 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이 된다" 미국의 저명한 법철학자이자 윤리학자인 마사 누스바움의 말이다. 이 말처럼 삶을 되돌아보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기억을 재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때 놓쳤거나 인식하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한다. 수필은 이 과정에서 길어 올린 삶의 지혜, 사유의 정수를 언어로 형상화한 글이다. 이명지의 은 착한 아이로 알려졌으나 기실 나쁜 아이였던 자신을 돌아보는 글이다.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착한 아이라는 '족쇄'를 스스로 깨부숨으로써 반전의 묘미를 선사한다. 글은 어린 시..

[좋은수필-2 ] 240312 날것에서 숙성으로(정옥순 작품 이방주 단평)

[평론가가 뽑은 좋은 수필-2] 이방주 ‘날것에서 숙성으로’ 정옥순 수필 ---『한국수필』 1월호 게재 이방주 문학평론가 섬네일. 사진=데일리한국DB 날것에서 숙성으로 ‘우리는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 노사연의 히트곡 의 노랫말이다. 맞다. 우리는 갖가지 고통을 이겨내면서 날것에서부터 조금씩 익어가는 것이다. 수필은 일상에 대한 인식을 철학적으로 해석하여 아름다운 언어로 형상화하는 문학이다. 형상화 과정에 문학적 구성이 필요하다. 수필을 철학과 문학 사이에 있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수필은 짧은 산문이기에 구성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히려 작가의 사유를 밀도 있게 짧은 산문에 담아내려면 치밀한 구성이 절실하다. 구성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깊은 사유만..

[좋은수필-1] 240305 길 잃은 자(박엘리아 작품 한혜경 단평)

글/박엘리야/ 계간수필 2024 봄호 육중한 나무문을 열었다. 저 멀리 서 있던 어느 노승이 나에게 무어라 중국어로 외쳤다. 중국어를 모르는 나는 그것이 다시 나가라는 뜻인지 아니면 무엇을 하라는 것인지 몰라 멀뚱멀뚱 서 있기만 했다. 노승은 아랑곳하지 않고 중국어로 계속해서 나에게 외쳤다. 지나가던 사람 하나가 친절하게도 손을 소독하라는 뜻이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허둥지둥 손을 소독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노란 조끼를 입은 봉사자 두어 명은 기념품 판매대에 서서 무언가를 포장하느라 바빠 보였다. 절의 내벽은 작은 불상으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고 층층이 쌓인 불상들은 몇천 개는 되는 것 같았다. 안쪽으로 들어서자 금박을 입고 손가락과 이마를 오색진주로 치장을 한 커다란 불상들이 세워져 있었다. 제 몸에 그..

완보緩步 그리고 노두老蠹

완보緩步 그리고 노두老蠹 오랜만에 간재사고(艮齋私稿)를 펴보았다. 이 책은 1927경 간행된 조선 말 성리학자인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년~1922년)의 문집이다. 팽개치듯 서가에 묻어두었는데 갑자기 궁금하다. 간재사고가 내 손에 들어오게 된 사연은 중요하지 않다. 소중한 고서로 알고 있기는 했으나 관심은 크게 없었다. 내용은 뚝눈으로 봐도 방대하다. 당시 학자들과 주고받은 서신은 물론 성리학에 대한 학문적 소신이 담긴 듯하다. 몇 장 넘기니 책장 일부가 지렁이 기어 간 자리처럼 훼손되었다. 종이가루가 하얗게 묻어난다. 하필이면 글자를 따라 먹었다. 좀이 쏠은 자리이다. 아파트에 좀벌레가 있을 리가 없으니 40여 년 전 내게 오기 전에 이미 먹은 것이다. 그것 참 희한하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22. 조정순 <손톱>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한국수필] 2024 3월호

심사평수필은 변환과 성장의 문학이방주조정순의 두 작품을 당선작으로 한다. 수필 창작은 수행의 과정이라는 문학적 효과를 잘 드러낸 작품이다. 수필 창작에 임하는 사람은 자신이 체험한 기억을 소환하여 현재의 삶을 비춰보는 거울로 삼는다. 이와 같은 사유의 과정에서는 대상이 된 체험에서 모순을 발견하고 현실적 삶에서 자아를 돌아보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삶의 가치를 설정하여 내면의 변환과 성장을 가져온다. 은 입원한 남편의 손톱을 깎아주다가 어머니의 손톱을 떠올리며 무심했던 자신을 반성한다. 어머니의 희생적인 참사랑을 깨닫는 순간이다. 는 시어머니의 차별 대우에 대하여 항의했던 자신을 돌이켜 반성하면서 아버지의 가르침인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의 참뜻을 깨닫는다. 두 작품 다 평범한 일상..

수필은 개인의 뿌리에서 피는 꽃- 이태준의 『無序錄』을 읽고 -

서울 문학 광장 고전에게 길을 묻다 1 (2024. 2. 21.) 수필은 개인의 뿌리에서 피는 꽃 - 이태준의 『無序錄』을 읽고 - 이태준의 수필집 『無序錄』을 대하는 순간 그의 수필관이 보였다. 그의 수필관은 화가이며 수필가인 김용준의 그림으로 알려진 표지화에 한마디로 시사되고 있다. 활짝 핀 수선화가 뿌리까지 다 드러났다. 그는 ‘작품은 개인의 뿌리에서 피는 꽃이다.’라고 했다. 18세기 독일의 시인이며 철학자인 노발리스(Novalis 1772~1801)는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닿아있다.’라고 말했다. 소재를 관찰할 때 불가시한 영역을 봐야 한다고 강조한 말이다. 김용준은 이태준의 말을 담아 표지화를 그렸을 테지만, 지금 우리는 노발리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곳까지 대상을 인식해야 한다는 의..

수필미학 신인상 시상식 축사(2024. 1. 24.)

수필미학 시상식 축사 2024년 수필미학상 시상식이 있었다. 수필미학 문학상 작품집 부문 : 이양주, 선집부문 : 권민정, 조한금 수필미학 작품상 : 김응숙 (2023 봄호 , 39호) 수필 신인상 : 김광순, 박보현, 김종성, 장봉환 비평 신인상 : 강진우, 김국현, 장창수 나는 수필미학 작가회 이사이고, 수필미학문학상 운영위원으로 참여했다. 또 수필선집부문 수상한 조한금 수필가의 작품해설을 썼다. 모든 진행이 다른 어떤 문학회와 다르게 품위 있고 편안했다. 첫째, 내빈석이 따로 준비되지 않아 모든 회원이 동등하고 편안하게 앉았다. 둘째, 내빈 소개가 없고 이운경 주간이 회원을 그룹별로 소개 했다. 상을 받은 모든 사람이 소감을 말했고 수상자와 친분있는 회원이나 비회원이 축사를했다. 모든 사람이 기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