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미학 문학캠프 주제발표
에코페미니즘과 섹슈얼리티 수용에 관한 제언
이방주
◇ 필요성
- 지난 20세기는 산업혁명, 정보산업의 급속한 발전으로 인간이 물질에 지배당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었다. 그 결과 인간성, 인간의 정서, 민족정서가 그 신성함을 상실하였다. 신에 대한 신성한 믿음이 있어야 인간성이 존중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반드시 회복하고 찾아야 할 가치라 생각한다.
- 최근에는 AI가 모든 예술 창작을 대신하려 하는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챗 GPT가 소설을 창작하고, 시를 쓰고, 자서전이나 자기소개서를 대신 써 준다고 한다. 그런데 수필은 감성과 이성 중심의 문학이고 관조와 자아성찰의 문학이다. 아무리 인공지능이 첨단을 걷는다 해도 수필가의 감성을 대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 철학의 빈곤 시대에 수필은 인간을 새롭게 탐구하고 챗 GPT로는 따라올 수 없는 영혼의 울림과 영적 깨달음으로 인간의 아픔을 치유하는 문학이다. 이와 같이 21세기가 요구하는 수필의 방향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으나 여기서는 수필창작에 에코페미니즘과 섹슈얼리티 수용의 필요성을 제기하고자 한다.
에코페미니즘
◇ 에코페미니즘
21세기 수필은 ‘사람과 치유’가 중심 화두로 떠올랐다. 사람이 수필의 중심 화두라는 말을 언뜻 들으면 인간이 세계의 중심인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또 ‘치유’가 중심 화두라고 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비극을 통한 카타르시스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과 치유라는 진정한 의미는 에코페미니즘을 사유의 바탕에 두어야 한다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에코페니미즘ecofeminism은 생태주의ecologism와 페미니즘feminism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말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이 사회에서 남성에 비해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은 생태계에서 인간을 중심으로 생각하면서 자연을 우습게 아는 사고와 같다고 규정한다. 그러면서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고 생태계에서 하나의 종種임을 자각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생태계에서 다른 종을 지배하고 스스로를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사상은 인류사회에서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고자 하는 사상에 연결된다. 이와 같이 페미니즘과 생태주의는 하나로 연결되는 사고이기에 에코페미니즘이 새로운 시대에 지향해야 할 가치라고 생각한다.
에코페미니즘은 21세기의 모든 사회와 삶의 문제를 폭넓게 수용할 수 있다. 자유주의, 사회주의, 페미니즘, 환경주의 등 어떤 사회적 정치적 문제든 종합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고 본다. 하층민이나 가난한 사람들 또는 국가는 아직도 짐승처럼 취급되고 있고, 여성이 세계에서 60% 이상의 일을 하면서 그에 못 미치는 임금을 받고 있다. 학대 받는 아동들, 성적으로 상품화되는 여성들의 문제가 이 시대의 시급한 문제이다. 사람의 장기를 위해 사육되는 돼지, 달걀과 고기만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닭도 지구 생태계의 불평등한 모습이다. 최근 전쟁의 위협이 거세어지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핵무기에 의한 위협, 산업과 기술에 의한 약소국에 대한 위협 등 지구생태계는 경합의 장소이고 전쟁의 도구가 되고 있다. 에코페미니즘의 추종자들은 이러한 현실을 지구에 대한 인류의 강간이라 표현하고 있다. 종과 종의 경합, 사람과 사람의 경쟁, 국가와 국가의 경쟁 등 끊임없는 경합과 싸움이 우리 세대에 도전해오고 있다.
에코페미니즘이 지향하는 세계는 환경론자들의 생각과는 많이 다르다. 환경론자들은 자연환경을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는 터전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보호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개선하고자 하는 데에 목적을 두는 것 같다.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어 삶의 세계를 열어가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비교적 피상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에코페미니즘이 조금 더 심층적인 사고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이에 따라 21세기 수필이 새롭게 열어가야 할 화두 가운데 하나로 에코페미니즘을 들어도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수필이 치유의 문학이라면 이러한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이것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수필가들의 과제이다.
◇ 섹슈얼리티와 에로티시즘
- 섹슈얼리티
섹슈얼리티sexuality 또는 성性은 생물의 성별과 성적 행위 따위를 통틀어 일컫는 말로, 인간의 경우 성에 대해 가지고 있는 태도, 감정, 욕망, 실천, 정체성, 사고, 가치관 등을 포괄하여 이르는 말이다. 성적인 것 전체를 통틀어 일컫는 말로 성별, 성행위, 성적 욕망,성적 환상, 성역할, 성정체성, 성적 지향, 성 표현, 재생산뿐 아니라 성과 관련된 이데올로기, 사회 제도와 규범이나 관습 등을 전부 포함한다. 따라서 섹슈얼리티는 성에 대한 성애적, 감정적, 생물학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윤리적, 법적, 종교적, 영적 측면을 총체적으로 다루는 것이다. 그 뜻이 꽤 광의적인 만큼 여전히 논쟁적인 단어라 할 수 있다.
섹슈얼리티라는 단어는 성이 전 생애에 걸쳐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사실을 강조할 뿐 아니라 성이 사회적인 의미까지 내포한다는 점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 성이 단지 생물학적 기능하고만 관련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 · 정치 · 문화적으로도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섹슈얼리티란 단순히 섹스sex, 성별뿐 아니라 계급, 인종, 국적 등 현실의 여러 요소와 상호적으로 밀접하게 기능한다.
섹슈얼리티라는 용어는 19세기에 만들어진 이후 맥락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쓰였으며, 각 사회나 시대마다 뜻하는 바도 변화해 왔다. 형식적으로는 성적인 것을 전부 지칭함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상황에서는 좁은 의미로 성적 지향만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 다른 상황에서는 성행위만을 의미하는 등 쓰임에 제약이 덜한 편이다.
- 에로티시즘
선정주의, 애욕주의를 일컫는 말. 그리스 신화의 사랑의 신 에로스Eros에서 유래된 말. 성애를 관능적으로 그린 문학 및 영화 등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쓰이나 넓은 의미에서는 사랑을 주제로 한 것이 모두 이에 포함된다. 오늘날 에로티시즘은 문학, 회화 같은 전통예술 분야보다 대중문화, 즉 영화, 사진, 패션, 광고 분야의 핵심적인 제재로 등장했는데 이는 대중문화 산업의 상업적 이윤추구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저변에서 꿈틀대고 있는 성관념의 반영이기도 하다. 광고를 성적 자극의 연장으로 표현하는 에로티시즘 광고가 빈번하게 등장하는 분야는 의류, 향수, 주류 등으로 이들 분야 광고에는 직간접적으로 성性과 밀접하게 연결된 표현이 다수 등장한다.
◇ 에코페미니즘과 섹슈얼리티
에코페미니즘이 수필 창작과정에서 세계에 대한 인식의 한 방법이라고 한다면, 형상의 한 방법으로는 섹슈얼리티sexuality의 수용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성性, sex은 생태계를 구성하는 자연의 가장 기본적인 힘이다. 사실 사회가 구성되기 이전부터 존재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오히려 사회가 구성되면서 성性 또는 성애性愛에 대한 규범이 정해지고 그 제재를 받았다고 보는 것이 맞는다. 생득적인 성이 규제받고 섹슈얼리티의 표현이 사회에 의해 강제되는 것은 매우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근대 사회 이후에 여성의 삶과 섹슈얼리티가 문학에 자유롭게 수용되었다. 물론 우리 고전문학에는 현대문학 못지않게 매우 사실적으로 수용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허구문학에서나 가능했지 사실을 중요한 화소로 삼는 수필문학에서는 금기시된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수필은 장르의 특성상 서술자가 작가 자신이기 때문에 완전한 고백이 쉽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인류를 생태계의 일부라고 생각한다면 에코페미니즘을 담아내는데 섹슈얼리티가 배제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본다. 진정성 있는 고백이 생명인 수필 창작과정에서 온전하게 미의식을 드러내는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예시 작품> 섹슈얼리티 수용 작품/ 우작 / <호박꽃은 아치마다 사랑을 한다>
호박꽃은 아침마다 사랑을 한다.
이른 아침 주중리에 갔다. 자전거로 10분만 달리면 농촌의 공기로 숨 쉴 수 있는 곳이다. 주중리 사람들은 길가 자투리땅에 호박을 심는다. 어느 지점에서 급하게 브레이크를 잡았다. 막 떠오르는 햇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되비치는 호박꽃이 보였기 때문이다. 호박꽃을 보면서 혼자 웃었다. 암꽃은 암컷처럼 골이 지고 수꽃은 수컷처럼 우뚝 섰다.
암꽃으로 피는 수량은 열에 하나 정도밖에 안 된다. 게다가 대개 호박잎 뒤에 숨어서 핀다. 널따란 호박잎을 제치며 찾아야 보인다. 암꽃은 밤새 있었던 일을 들키기나 한 것처럼 부끄럽다. 아니 호박꽃은 밤에 사랑하지 않는다. 일벌의 날개에 이슬이 마르는 아침이 되어야 사랑을 한다.
수꽃에서 꽃가루를 길어 올리는 일벌을 보면서 문득 꽃들의 비밀스런 사랑이 궁금했다. 일벌이 꽃가루를 길어 올릴 때 수꽃은 어떤 기분일까? 내가 백두대간 능선을 내달릴 때 느꼈던 상승과 분사 후의 나른함 같은 쾌감을 경험할까? 아무래도 아닐 것 같다. 여왕벌을 위하여 평생을 기다리다 단 한 번의 사랑으로 일생을 마감하는 수벌만도 못한 것이 수꽃이다. 수컷으로 우뚝 서 있는 수술이 무슨 소용이랴. 골진 암술에 가까이 갈 수조차 없으니 말이다. 일벌 매파의 날개에나 묻어나는 꽃가루로 분사하는 쾌감을 어찌 맛보랴. 오늘 아침 갑자기 수컷들이 측은하다. 나는 내가 수꽃이라도 된 양 시들해진다.
일벌이 수꽃에서 길어온 사랑을 전해줄 때 암꽃은 어떤 느낌일까? 아픔일까, 쾌감일까, 오르가슴orgasm일까? 쾌감을 몸으로 받을까, 마음으로 느낄까? 아무래도 수술이 직접 다녀감만은 못할 것 같다. 그래도 암꽃은 일벌이 다녀가면 꽃 아래 없는 듯 숨어 있던 어린 열매의 성장 속도가 빨라진다고 한다. 온몸에 동력을 넣은 듯 활력이 인다고 들었다. 일벌이 수꽃의 사랑을 전하는 순간에 성장이 가장 활성화된다고 한다. 그렇구나. 암꽃은 오르가슴을 얻어내는 것이구나. 호박꽃이란 아름다운 별명을 가진 문우가 있다. 외롭게 살다가 늦은 나이에 새출발하여 사랑에 푹 빠졌다. 이른 아침 사랑을 하는 호박꽃을 보면서 호박꽃 친구의 사랑도 몸이든 마음이든 절정에 오르기를 빌어본다.
아침이 되면 호박꽃은 사랑을 한다. 호박꽃은 사랑을 하고 사랑을 알고 사랑을 열매로 맺으니 단순한 호박꽃만은 아니다. 호박꽃은 당당한 생명임을 깨닫는다. 사람이나 호박꽃이나 사랑이라는 섭리로 산다. 호박꽃은 인류들이 누리는 쾌감도 없이 남의 영양을 만들어 낸다.
들꽃은 이렇게 우리네 생명줄이다. 나는 오늘 아침 허공에 가득하게 내리는 보배로운 섭리의 비를 작은 내 그릇에 담아온다.
<예시작품> 비유에 의한 섹슈얼리티의 수용/ 목성균<장마전선을 넘어> 일부
뭍의 발기가 결연한 의지로 바다 깊이 삽입되어 있는 곳이 곶〔串〕이다. 바다는 궁합이 안 맞는 여편네처럼 곶 끝에서 응얼거린다. 곶은 개의치 않고 정정당당하게 바다의 한 녘을 굳건히 장악하고 있다. 아! 수컷다운 기상. 나는 비 오는 곶 끝에 서서 사내의 사기를 진작시켜 본다.
<예시 작품> 에로티시즘 수용 작품/ 배필/ 목성균
강화도 최북단 철산리 뒷산에 있는 180오피는 임진강과 예성강, 한강 하구의 질펀한 해협이 굽어보이는 돈대 위에 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위해서 흑색 쾌자를 입고 돼지털 벙거지를 쓴 병졸들이 창을 들고 불란서 함대와 맞서 있었음직한 곳이다. 나는 43년 전, 이곳에서 해병 제1여단 예하의 어느 중대에서 위생병으로 파견 근무를 했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서해 낙조만치 아름다운 노을을 나는 그때 이후 보지 못했다.
어느 날 집에서 하서下書가 당도했는데, 강원도 귀래라는 곳에 전주 이씨 성을 가진 참한 규수가 있어서 네 배필配匹로 생각하고 있으니 그리 알라는 내용이었다. 배필이라는 아버님의 굵직한 필적이 젊은 내 가슴을 설레게 했다. 평생 같이 뛰게 내 옆에 붙여줄 암말 한 필, 나는 저녁식사 후면 돈대에 앉아서 서해 낙조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참하단 말씀이시지. 꽃처럼 예쁠까, 암말처럼 튼튼할까.’
그러다 노을이 지고 대안의 북괴군 서치라이트가 불을 켜면 놀라서 천막으로 들어갔다. 어느 날은 북괴군의 서치라이트가 켜졌는데도 생각이 깊어서 미처 천막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중대장에게 들켰다.
“뭐해 임마! 형편없이 기압 빠진 위생병아.”
대체로 야전지휘관들은 보병에 비해서 위생병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중대장의 그런 눈치에 자존심이 상했다.
“무슨 생각이 깊어서 서치라이트 불빛도 의식하지 못하고 앉았어. 빨리 천막으로 돌아 갓!”
그리고 며칠 후 중대장이 불렀다. 그의 천막으로 갔더니 자기 아내가 어린애를 낳았는데 영 기운을 못 차리고 미역국도 못 먹는다며, 의무중대에 가서 링거를 구해 다 놓아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지휘관 처지로서 졸병에게 할 수 없는 기압 빠진 부탁이지만, 그때 그의 태도는 중대장이 아니라 딱한 처지의 남편에 불과해 보였다. 나는 중대장이 지휘관의 고압적인 태도를 버리고 기압 빠진 위생병에게 솔직한 부탁을 해준 게 고마워서 선뜻 그런다고 약속했다.
나는 자대自隊인 의무중대로 내려갔다. 보급계 선임하사관에게 시집살이 사정하러 친정에 온 딸처럼 파견부대 중대장님 아내의 딱한 사정을 이야기하고, 5프로(링거)를 한 병 달라고 부탁을 했다.
“임마, 5프로는 사경死境의 전우戰友에게나 주사하는 군인의 생명 같은 약이야. 어린애 난 중대장 마누라한테 놓는 게 아니야.”
일언지하에 거절을 당했다. 늙은 군인의 완강한 군인정신에 당황해서 나는 하루 종일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초조하게 의무중대를 빙빙 돌았다. 그러다 선임하사관 앞에 가서 말없이 서 있곤 했다.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빈손으로 돌아가서 중대장에게 당할지 모르는 보복이 두려워서도, 또 링거를 들고 가서 얻어질 군대생활의 편의를 바라서도 아니었다. 다만 약속 그 자체가 소중했기 때문이었다.
선임하사는 할 수 없는지 친정어머니처럼 생리식염수sodium chloride를 두 병 주었다.
“선임하사관님! 이건 소금물 아닙니까?”
“임마, 같은 용도야…….”
5프로나 생리식염수나 다 같이 총상銃傷 환자의 탈수증세에 놓는 약품이긴 하다. 5프로는 생리식염수에 포도당 5프로가 희석되어 있다는 말로, 약간의 당분이 첨가된 소금물과 그냥 소금물의 차이다.
더 이상 떼를 쓰는 것은 화를 자초하는 일이다. ‘싫으면 그만둬, 임마’ 그러면 그나마도 얻어가지고 올 수 없이 되고 마는 것이다.
막차를 타고 부대로 돌아왔다. 중대장이 노을에 벌겋게 물든 채 돈대에 서 있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링거라고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내 실정이 마음을 무겁게 했으나 중대장님이 링거 병과 똑같은 소금물 병을 보고 반색을 하는 바람에 마음을 놓았다.
다음 날 아침을 먹고 나자 중대장님은 떠밀듯 나를 철산리 동네로 내려 보냈다.
중대장은 어느 농가의 문간방을 얻어서 살림을 하고 있었다. 산모가 핼쑥한 얼굴로 누워 있다가 부스스 일어나서 나를 맞이했다. 방 안 가득한 비릿한 냄새, 아기 냄새인지 아기 엄마 냄새인지 모르지만 내 정신을 몽롱하게 했다. 생전 처음 맡아보는 냄새였다. 처음이 아닐지 모른다. 어머니가 막내 동생을 낳았을 때 내가 새벽에 읍내에 가서 미역을 사왔으니까, 그때도 맡은 냄새일 것이다. 그러나 기억조차 없다. 그때 내 나이 열다섯에 불과했으니까 그 냄새를 의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나는 중대장 사모님을 눕혀놓고 주사를 놓았다. 왜 그리 떨렸을까. 핏기 없는 하얀 산모의 팔뚝에서 떨리는 손으로 혈관을 찾아 주사바늘을 꼽는 일이, 숙달된 위생병의 평소 솜씨와 달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병사의 팔뚝에 주사바늘을 꽂는 것과는 다른 일이었다. 팔이 너무 투명하고 맑아서 그랬을까, 혈관이 파랗게 비치는데도 불구하고 주사바늘을 혈관에 바르게 꽂느라고 진땀을 흘렸다. 떨리는 손으로 주사바늘을 뺐다 꽂았다 몇 번을 거듭했다.
못미더운 수병의 주사 솜씨를 상 한 번 찡그리지 않고 정온靜穩하게 견뎌준 중대장 사모님. 나는 지금도 그녀의 교양을 존경해 마지않는다.
만약 그때 그녀가 불안하거나 불쾌한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였다면 나는 주사 놓기가 오히려 더 수월했을지는 모르지만, 그러면 그녀의 모습이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을 리도 없고, 내가 지킨 약속 또한 그리 소중하게 기억될 리도 없다.
오전에 한 병, 오후에 한 병 소금물 주사를 맞은 중대장 사모님은 딴사람처럼 생기가 돌았다. 굳이 저녁밥까지 해줘서 먹고 왔다. 나는 밥을 먹고, 중대장 사모님은 미역국을 먹고, 우리는 오누이처럼 겸상을 해서 먹었다. 비릿한 냄새 가득한 산모의 방에서 산모가 해준 밥을 마주 앉아 먹는 황홀한 영광 때문인지 밥맛도 몰랐다.
“위생병님, 애인 보고 싶으시지요. 집에 한 번 다녀오세요.”
“애인 없습니다.”
그러면서 아버님이 의중에 두신 내 배필, 전주 이씨 성을 가진 참한 규수를 생각했다. 밥을 먹고 서둘러 오피로 돌아오며 중대장님은 좋은 배필을 두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막 해가 진 바다를 향해서 돈대에 주저앉았다. 흑장미 빛 같은 노을이 해협을 물들이고 있었다. 비로소 손에 든 책표지를 보았다. 『청록집靑鹿集』이었다. 책표지가 손때에 곱게 절어 있었다.
“위생병님, 고마워요. 뭐 드릴 게 없어요.”
중대장 댁을 나오는데 사모님이 따라 나와서 내 손에 쥐어준 책이었다. 손을 잡힌 채 바라본 중대장 사모님의 맑고 투명한 얼굴이 처연하리만치 고왔다. 나는 지금도 산모의 얼굴이 배필의 얼굴이라고 생각한다.
대안의 북괴군 서치라이트 섬광이 환도還刀를 휘두르듯 흑장미 빛 노을을 가르며 지나가고 땅거미가 졌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천막으로 들어갔다.
며칠 후 중대장님이 특별 휴가를 보내 주어서 전주 이씨 성을 쓰는 참한 규수와 맞선을 보고 왔다. 중대장 사모님의 부탁에 의한 배려였을 것 같아서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배필을 선본 이야기를 했다. 사모님이 반갑게 손을 잡고 웃어주었다.
<예시 작품> 에코페미니즘 수용 작품 / 함무성/ <실뜨기>
밤이 되니 제법 서늘하다. 창가의 풀벌레 소리가 마치 연주를 준비하는 오케스트라 현악기의 스트링 같다.
칫 찌르르르. 쯔리이이~. 또르르르릉. 찌르르륵 찌르륵.
수컷들이 짝을 부른다. 여치, 땅강아지, 귀뚜라미, 방울벌레, 베짱이들이 한껏 청아한 소리를 낸다. ‘나를 받아 주오.’ 하는 사랑의 세레나데인가. 얼핏 불협화음 같지만 가만히 들어보면 소리의 길이와 음높이에서 나름대로 규칙이 있다. 눈을 감고 들어도 오색의 찬란한 빛이 느껴지며 저절로 명상에 들게 된다. 어느새 가을이 문턱에 와 있다.
새벽에 일어나 마당가의 텃밭을 살폈다. 이슬에 흠뻑 젖은 배추밭엔 어린 달팽이들도 붙어있고, 녹색의 배설물이 있는 곳에는 영락없이 연둣빛 배추벌레가 터 잡고 있다. 그중에서도 폴짝거리며 뛰는 섬서구메뚜기들이 배춧잎마다 구멍을 낸다. 땅 심 돋워서 농약 없이 키운 먹거리인지라 녀석들이 단체로 몰려들었다.
풀벌레를 잡으려고 쪼그려 앉아서 배춧잎을 들여다보았다. 섬서구메뚜기의 어미가 새끼를 등에 업고 있는 것 같다. 짝을 지은 암컷과 수컷이다. 오호라, 등에 올라탄 작은 녀석이 서방이로구나. 녀석들은 겨울이 오기 전에 제 종족을 번식시키려고 연한 배추포기에 터 잡고 앉아 밭주인이 보는 줄도 모르고 태연히 서로 꽁지를 붙이고 ‘실뜨기’를 하는 중이다.
‘실뜨기’는 어렸을 적 우리 자매들의 놀이였다. 젖 물려 아기를 재워 놓은 어머니는 우리에게 조용히 놀아야 한다며 실뜨기를 가르쳐 주었다. 동생과 나는 무릎을 맞대고 앉아 굵고 긴 실을 둥글게 매듭지어 실뜨기 놀이를 즐겨 했다. 순서대로 날틀, 쟁반, 젓가락, 베틀, 소눈깔, 절굿공이를 번갈아 만들며 실이 엉킬 때까지 소근 대며 놀았었다. 잠든 아기가 깨지 않도록 숨죽이고 집중해야 하는 놀이이다.
실뜨기를 좋아한 건 삼촌도 마찬가지였다. 삼촌은 군대에서 제대하자마자 얼굴이 뽀얗고 눈이 가느스름한 아가씨와 맞선을 보더니 서둘러 장가를 갔다. 새살림을 나기 전에는 우리 집 건넌방에서 함께 살았는데 문 닫고 조용히 지내는 때가 많았다. 그때 어머니는 “삼촌네가 방에서 조용히 실뜨기를 할 때는 함부로 문 열고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 유년의 시절에는 삼촌 내외가 우리들처럼 정말 실뜨기 놀이를 하고 있는 줄 알았다. 사춘기를 거치며 어머니가 말한 또 다른 ‘실뜨기’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곤충들의 ‘실뜨기’는 보기에 관능적이다. 등에 업혀 붙은 놈, 긴 꼬리를 말아 둥글게 모양을 만들고 둘이 붙은 채 하늘을 나는 놈, 뒤집어진 채로 데굴데굴 구르면서도 단단히 붙어 있는 놈, 나름 형이상학적인 오르가슴을 즐기는 것 같다. 그럼에도 음탕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들의 한살이 과정에서 후손을 남겨야 하는 사명使命이 인간이 추구하는 쾌락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일까.
접사렌즈로 풀벌레들의 모습을 찍었다. 참깨밭에서 사랑을 부르는 노린재는 엉덩이를 훼훼 흔들며 터울거리다가 짝이 정해지면 엉덩이끼리 잇댄다. 머리는 서로 반대편을 향한 채 미동도 없다. 미세한 움직임으로 사랑의 기쁨을 누리는 동안에는 사람의 인기척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왕사마귀의 사랑 방식은 독특하다. 수컷이 암컷의 등 위에 올라타고 사랑을 나눈 후 암컷이 수컷을 대가리부터 바수어 먹는다. 몸을 섞어 붙인 채 암컷에게 순순히 몸을 내주는 수사마귀는 고통스러울까, 아니면 지아비로서의 희생으로 만족할까.
남자들은 암사마귀를, ‘제 서방 잡아먹는 독한 년’이라고 욕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수컷 왕사마귀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며 밤이 늦도록 술잔을 부딪친다.
독한 암사마귀는 짝짓기와 동시에 이미 여자가 아니고 어미이기 때문이리라. 자연의 섭리는 오묘하고 경이롭다. 후손을 위해 넉넉히 양분을 섭취한 암컷은 몇 주 지나 돌 틈과 나무뿌리 사이에 알을 낳은 후 훌쭉해진 배와 기진한 팔과 다리를 숲에 내려놓는다. 먼저 보낸 수컷을 따라가려는 듯 기꺼이 생을 마친다. 숭고한 그들의 사랑 방식을 풀잎과 들꽃들은 알 것이다.
배추 포기마다 짝지은 섬서구메뚜기들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피식 웃음이 난다. 지난해 겨울, 앞산 고라니의 실뜨기를 눈치챈 밤에 남편과 나누었던 그 일이 새삼 떠올랐기 때문이다.
흰 눈이 사르륵거리는 밤에 고라니가 ‘쿠왝 쿠왜액!’ 비명에 가까운 괴성을 질렀다. 수고라니가 암컷을 부르는 소리이다. 그 소리를 듣고 성숙한 암컷이 찾아오면 고라니 부부는 그때부터 은밀한 실뜨기에 들어간다. 새 봄에 태어날 새끼를 위해 수컷이 만든 보금자리에 신방을 차린 것이다. 짐승이나 곤충들의 실뜨기는 몇 시간, 혹은 며칠씩도 이어진다 하니 그들의 그 순간은 절실하고도 진지할 것이다.
짝을 정한 고라니가 실뜨기를 시작한 듯 숲이 조용해졌을 때쯤에 남편이 슬그머니 나를 흔들어 깨운다. 숲속마을에서 자연과 친구 되어 살자고 한 남편은 신방 차린 고라니들이 부러웠나 보다. 우리도 실뜨기를 하잔다.
눈 내리는 겨울밤은 깊고 길다. 듣는 사람이 없는데도 우리는 숨죽이며 실뜨기를 했다. 조용히 날틀부터 시작하여 차례로 쟁반도 만들어 보고, 젓가락과 절굿공이도 만들어 본다. 공격도 하고 방어도 하며 한 쌍의 겨울 고라니가 되었다.
숭숭 구멍난 배춧잎을 본다. 많이 먹어 두어야 할 섬서구메뚜기들의 삶이 절정에 이르렀다. 제 몸집의 열 배는 됨직한 암컷의 등 위에 작은 수컷이 가볍게 올라앉았다. 수컷은 옆으로 살짝 허리를 비틀어 암컷의 날개 밑으로 꽁지를 붙였다. 심지를 암컷에게 깊게 넣은 채 아무리 암컷이 폴짝이며 뛰어도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다. 그런 수컷의 모습은 작지만 당차 보였고, 길쭉한 주둥이를 내밀은 암컷은 풍만하며 수줍어 보였다.
점점 날씨가 추워진다. 고단했던 한 생을 마치게 될 섬서구메뚜기들은 땅속에 알을 묻고 이제 곧 시들어 가는 풀숲에 몸을 누일 것이다.
살아있는 생명들의 실뜨기는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풀벌레 잡는 일은 그만 두어야겠다. 배춧잎이 몇 닢 결딴난들 어떠랴. 풀벌레들의 향연을 축복하며 곧 끝나게 될 그들의 마지막 생生을 기다려 주자.
아침 공기가 싸늘하다. 배추밭 고랑에서 섬서구메뚜기들이 놀라지 않게 조용히 일어선다. 미물들의 삶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는 아침이다.
(월간 『수필과비평』 2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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