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META

수필 쓰는 사람은 -무심수필 6호 권두 수필-

느림보 이방주 2023. 8. 11. 23:07

권두 수필

 

수필 쓰는 사람은

 

정원에 낙락장송들이 고요하다. 가지가 비바람에 얼마나 시달렸는지 흐느적거린다. 그제부터 엊저녁까지 태풍 카눈이 커다란 손으로 세상을 어루만지고 지나갔다. 카눈은 느림보 태풍이라는 이름으로 느릿느릿 왔지만 바람은 거세게 불었다. 우리 아파트 정원 큰 나무들은 크게 상처를 입지 않아 다행이다.

그제는 밤새 비바람이 몰아쳤다. 유리창에 물방울이 흥건하다. 밤새 비바람에 시달린 정원이 궁금해서 새벽에 나가보려니 바람에 막힌 공동 현관문이 쉽게 열리지 않는다. 간신히 문은 열었으나 나갈 수는 없다. 굵은 빗줄기가 전후좌우로 미친 듯이 쏟아 붓는다. 우산도 소용없다. 비를 맞히려고 정원 콘크리트 구조물 위에 올려놓았던 난분 하나가 바람에 날려 떨어졌다. 다행히 잔디밭으로 떨어져서 깨지지는 않았다. 그런데 촉이 미약한 난분 세 개는 바람을 맞지 않았다. 큰놈이 더 센 바람을 맞는구나.

오늘 아침에 산책을 하고 들어오면서 땅에 떨어졌던 난을 들여다보았다. 잎이 누렇다. 뿌리가 화분 위로 올라온다. 나의 무정을 참회했다. 좋은 일이 있을 때 문중(門中)에서 보내준 화분이다. 말하자면 조상님들의 축하 화분이다. 빈 화분을 들고 나왔다. 분갈이를 해야겠다. 무성한 난을 겨우 쏟아보니 난석(蘭石)은 단 한 톨도 없다. 꽃집에서 임시로 이끼만 넣어 보내온 것을 그냥 둔 것이다. 이렇게 2년을 버티고 꽃을 피웠다. 반면 다른 세 분은 부실하지만 넉넉한 난석에 지탱하여 넘어지지 않았다.

무성한 난을 둘로 갈라 죽은 뿌리를 수술하고 나누어 모셨다. 있던 자리에 나란히 올려놓았다. 보기 좋다. 가벼운 마음으로 정원을 한 바퀴 돌았다. 키 큰 활엽수 잎이 떨어져 여기저기 흩어졌다. 그래도 꿋꿋하다. 입주한 지 10년이니 진정 큰나무가 된 것이다. 큰 나무 밑에 벌개미취가 연보랏빛 꽃을 피웠다. 가느다란 꽃대인데도 변함이 없다. 연약해 보이지만 연약하지 않다. 겸손한 벌개미취는 태풍도 견디어 꽃을 피운다. 작지만 기초가 튼튼한 난분 세 개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크고 소담해 보여도 뿌리가 없으면 쓰러지고 떨어지고 부러진다.

2000년 5월 16일 처음으로 다음 블로그에 <느림보의 세상사는 이야기>를 개설했다. 지금은 티스토리로 변경되어 <느림보 이방주의 수필 마루>가 되었지만 당시에 대문에 올린 내 수필관은 그대로 두었다.

수필은 일상에 대한 철학적 해석이다. 
수필은 사람이 사람에게 들려주는 치유의 속삭임이다.
시가 문학의 시작이라면 수필은 문학의 완성이다.
문학은 언젠가 수필에 수렴될 것이다.

20여년 수필을 쓰면서 이런 꿈으로 살아왔다. 수필문학이 치유의 속삭임이 되고, 문학의 완성이 되고, 모든 문학이 수필문학에 수렴될 수 있는 기반을 이루는 것이 꿈이었다. 내가 큰나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수필문학이 큰나무가 되는 것이 내 소망이다. 큰 나무가 태풍에도 쓰러지지 않으려면 기본이 튼실해야 한다. 난분이라면 난석을 가려서 잘 넣어야 하고, 소나무라면 뿌리가 잘 벋어나가도록 밑이 깊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수필문학이 큰나무가 되려면 기초가 튼튼해야 한다. 문학의 개념에서부터 수필창작 이론, 상상의 전략, 바른 문장으로 쓰기까지 쉴 틈 없이 정진해야 한다. 읽고, 사유하고, 쓰는 일이 일상이 되어야 철학이 담긴 해석으로 치유의 작품을 순산할 수 있다.

오늘의 수필 문단은 수필가는 많아도 수필 독자는 없는 상황이다. 수필가가 쓴 작품보다 브런치 스토리가 독자에게 매력 있다. 수필가들은 전통 수필보다 브런치 스토리를 곁눈질하고, 철학적 해석을 위한 배경지식보다 공모전에 관심이 크다. 난석은 한 톨도 없이 썩은 이끼만 넣어 상품성만 바라본 난분과 다를 바가 없다. 수필가들은 자기 글에 취해서 남의 글을 읽지 않는다. 수필 평론을 읽지 않고 어떻게 독자에게 공명을 일으키는 수사력을 습득할 수 있을까. 열심히 쓰지 않는 초보 수필가들은 자신은 다작하지 않고 과작의 작가라며 학의 고고한 자태를 흉내 내고 있다. 읽고 사유하고 쓰는 일에 충실해야 21세기가 바라는 치유의 명작을 남길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변할 수 없는 구양수의 삼다법(三多法)이다. 이것이 큰 수필가의 수신이고 ‘붓을 닦는 법’이다.

수필은 ‘사람이 사람에게 들려주는 치유의 속삭임이다.’라고 했다. 치유의 속삭임은 자기 수양을 밑천으로 한다. 수필은 붓을 닦아 쓰는 수필(修筆)이라고 《무심수필》 창간호에서 언급한 바 있다. 마음을 닦아야 진정 큰나무가 될 수 있다. 수신은 혼자하기 어려우므로 도반(道伴)과 함께하는 것이 지혜이다. 자잘한 난석들이 모여서 난초를 지탱하듯이 문우들이 함께 모여 토론하고 합평하는 가운데 암향부동의 꽃이 피어난다. 문우는 경쟁하고 다투어 따돌릴 상대가 아니라 함께 손을 잡고 꽃을 피워야 할 난석이다. 훌륭한 도반을 만나면 그와 함께하는 자신도 훌륭하게 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수필 쓰는 사람은 여느 작가와 다르다. 수필 쓰는 사람은 경거망동하지 않고 겸손하다. 수필 쓰는 사람은 웅변가가 아니라 속삭임의 천사이다. 잿밥에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읽고 사유하고 쓰기’라는 삼다법 염불에 충실하다. 진정성 있는 기도가 신의 감응을 내리듯이 삼다법에 충실하면 어느날 모든 문학이 수필에게로 수렴될 것이다. 태풍에도 쓰러지지 않는 큰나무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할 날이 문득 도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