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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누름에

보리누름에 이제 막 익어가는 보리밭길을 거닐었다. 연두색 보리대궁이 초여름 따끈따끈한 햇살을 받아 누렇게 물들기 시작했다. 성난 까락 사이로 보리 알갱이들이 툭툭 불거져 나온다. 보리밭 둑길을 걸으며 익어가는 보리밭을 바라보노라니 까칠까칠한 까락이 목덜미로 잔등으로 파고드는 기분이다. 뜨거운 태양이 어깻죽지에 내리쬐어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처럼 근질근질하다. 그러나 어느새 구수한 보리숭늉 냄새가 난다. 보리밭에서 누군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보리밭은 고통과 낭만의 기억을 담고 있다. 보리누름에는 일부러 옥천 배바우 마을까지 찾아왔다. 둔주봉에 갔다가 봐두었던 안남면 사무소 앞들이다. 면사무소 광장에 차를 세우고 바로 보리밭 둑길로 접어들면 된다. 갈대 사이로 물이 흐르는 뚝방길에는 ..

성 그리고 나무

성 그리고 나무 감염, 방역, 격리, 확진 불신의 어휘들이 벽이 되어 세상을 가로막고 있다. 미디어를 열면 생경한 어휘들이 마구 달려든다. 반가운 사람도 손잡을 수 없고, 사랑하는 사람도 포옹할 수 없다. 혼자 걷고 혼자 먹고 춤도 혼자 추어야 한다. 격리가 최선이고 혼자가 마음 편하다. 우울하다. 이런 상황에서 뛰쳐나가고 싶다. 가림성에 가자. 거기엔 사랑나무가 있지 않은가. 불신을 허물고 사랑의 약속을 지켜준다는 느티나무가 있다. 모든 사슬을 벗어버리고 카메라를 메고 차안 가득 사랑의 신을 모시고 출발했다. 머릿속엔 이미 느티나무를 그리고 있다. 가림성은 몇 해 전 산성 답사라는 이름으로 처음 다녀왔다. 그 후 봄이든 겨울이든 가리지 않고 다녔다. 가림성에는 백제 동성왕과 위사좌평 백가苩加의 비화가 ..

여섯번째 수필집 [들꽃 들풀에 길을 묻다] 여는 글

여는 글 들꽃 들풀에 길을 묻다 나비가 있으므로 꽃이 사랑을 이룰 수 있다. 꽃이 사랑을 이루어야 나비도 살아갈 수 있다. 나비는 꽃에게 존재 의미이고 꽃은 나비에게 존재 의미이다. 꽃과 나비가 있으므로 나도 살아갈 수 있다. 꽃이나 나비는 내 생명의 에너지원이다. 상생이 삶의 지..

장은영의 <둔주봉 하산길에서> <영원한 동행>

&lt;신인상 심사평&gt; 장은영의 &lt;둔주봉 하산길에서&gt; &lt;영원한 동행&gt; 이방주 장은영의 &lt;둔주봉 하산길에서&gt;와 &lt;영원한 동행&gt;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이 두 작품은 인생의 여정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일상을 소재로 철학적 의미를 찾아낸 수작이다. 수필은 체험과 사실의 문..

무심수필 2호 발간 격려사 -수필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수필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무심수필 2호 발간을 축하합니다. 오늘 저희 행사에 추운 날씨에도 참석해 주신 문단의 여러 어른들께 감사드립니다. 수필은 8세기 세계 유일의 인도와 중앙아시아 여행기인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에서 발원하여 고려의 이규보 이곡, 조선의 김수온, 박지원,..

심성心性을 영성靈性으로 다듬어 쓰는 수필 (김열규 수필론에 대해)

심성心性을 영성靈性으로 다듬어 쓰는 수필 -김열규의 수필론 - 이방주 Ⅰ. 들어가기 수필 창작은 수필의 문학적 독자성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수필가들은 수필이 시나 소설 같은 다른 문학 양식에 비해 대접받지 못한다고 섭섭해 한다. 사실은 그런 불평을 하기 전에 먼저 수필문학의 본질을 알고 또 어떤 수필관을 가지고 창작에 임했는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수필가들은 먼저 수필의 장르적 독자성을 뚜렷하게 인지하고 창작에 임해야 수필다운 글을 쓸 수 있고 문학성을 확보할 수 있다. 시, 소설, 희곡이 허구인데 반해 수필은 수필가 자신의 체험의 기록이다. 시, 소설, 희곡이 상상을 바탕으로 체험을 재구성하는데 비해 사실의 기록인 수필은 체험을 바탕으로 상상을 재구성한다. 시는 시적 자아 또는 서정..

강현자의 <관계> <나를 보내며> 한국수필 2019년 11월호(통권297호)

&lt;신인상 심사평&gt; 강현자의 &lt;관계&gt; &lt;나를 보내며&gt; 이방주 강현자의 &lt;관계&gt; &lt;나를 보내며&gt;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두 작품의 화두는 존재의 의미이다. 작가는 관심에서 사랑이 싹트고, 인식 이후의 존재가 가치를 가진다고 한다. 그런데 두 작품의 인식의 과정은 다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