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 우금산성과 백강전투
우금산성은 전라북도 부안읍에서 남쪽으로 약 10km 떨어진 개암사(開巖寺) 뒷산에 있는 둘레 3,960m의 테뫼식 산성이다. 석축산성의 일부가 잘 보존되어 있다. 군데군데 수구도 온전하게 보존 된 것이 보인다. 우금산성은 663년 8월 부흥백제가 최후를 맞은 아픔을 지니고 있는 산성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반드시 답사하려고 했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우금산성을 미처 답사하지도 못하고 2017년에 백제 부흥운동의 발길을 따라 산성산사를 답사하고 쓴 수필집 《가림성 사랑나무》를 발간하여 아쉽기만 했다. 그런데 이듬해 2월 우연한 기회에 이 산성을 답사하게 되었다.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에서 발간한 《백제 부흥운동사 연구》에 보면 부흥백제의 수도라고 할 수 있는 주류성의 위치에 대해 설이 분분하다. 주류성이란 이름이 일본서기에만 전해지기 때문에 그 위치에 대한 추정이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북쪽으로부터 세종시 전의면 운주산성, 홍성의 장곡산성 또는 학성산성, 청양의 두릉윤성, 예산의 임존성, 서천의 건지산성, 그리고 부안의 우금산성이다. 7개의 산성 중에서 모두 답사하고 부안의 우금산성만은 가지 못했었다.
개암사 주차장에 주차하고 입산하여 한 날망을 올라갔을 때 산성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것이 산성이라는 감이 오기 시작했다. 함께 간 사람들에게 산성이라고 말했다. 석성에 흙이 덮이고 그 위에 잡목과 잡초가 우거졌다. 풀숲에서도 성벽의 형태는 뚜렷하다. 여기도 다른 산성처럼 등산로가 성벽 위로 나 있는 것이다.
다시 한 날망을 올라서니 발굴 조사하는 부분이 보였다. 아마도 문지門址인가 보다. 성 전체의 동쪽이니 동문지가 아닌가 한다. 흙 속에 묻혀 있던 성벽이 옷을 벗고 알몸을 드러냈다. 건물지로 추정되는 바닥은 비닐로 덮어 훼손되는 것을 방지했다. 한옆에 기와편을 쌓아놓았다. 발굴하는 사람들이 소나무 한 그루도 함부로 베어 내지 않았다. 발굴 작업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다. 나중에 알아보니 지난 1월경에 우금산성 동문지 발굴 결과가 이미 보도되었다고 한다.
드러난 성벽은 오랫동안 흙 속에 묻혀 있어서 성석이 아주 깨끗하다. 성석은 잘 다듬어 쓴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자연석을 그대로 쌓은 것도 아니었다. 일부 그대로 쓴 것도 있고 일부 생긴 대로 쓴 것도 있다. 아마도 축성 공사를 할 때 자연석으로 쌓으면서 쌓기 좋게 망치질을 하면서 쌓은 것 같다. 기록에 의하면 3차례 이상 고쳐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기와편이 꽤 많이 나왔나 보다. 형태가 비교적 괜찮은 것들만 분류하지 않고 옆에 쌓아 놓았다. 나는 만지지 않고 위해서 사진만 찍었다. 빗살무늬도 있고 물고기 가시 무늬도 있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연꽃무늬가 발견된 것이다. 1천5백여 년 전 무늬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기와편과 함께 토기편도 몇 조각 보였다. 토기는 진흙으로 빚었는지 검은 색이고 두께가 아주 얇았다. 이렇게 얇게 빚어서 불에 구워 일상에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하게 만들 수 있었다면 상당한 수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도에 의하면 기둥을 세웠던 홈이 있는 돌도 나왔다고 한다. 대개 이런 것을 목주홈석이라 하는데 아마도 나무 기둥을 세웠던 흔적이 아닐까 한다. 동문지 발굴 결과 여러 가지 성문의 특이점을 발견했다고 하는데 자세한 발표결과는 아직 없다.
부안 사람들은 이곳을 틀림없는 주류성이라고 한다. 그 근거로 백강전투가 이곳 변산 앞바다에서 이루어졌다고 학자들이 고증하고 있다. 그러나 서천에 가면 건지산성이 주류성이라고 하면서 금강하구인 기벌포를 백강전투의 현장이라고 소개한다. 기벌포 전투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하다. 676년 신라가 당나라 군사를 격파하여 당나라 세력을 삼한에서 완전히 몰아낸 전투라 하기고 하고, 663년 부흥백제와 왜의 연합군과 나당연합군의 전투로 왜군이 완패함으로써 부흥백제의 최후를 맞이하게 된 백강 전투로 보기도 한다. 그런데 사실은 이 두 전투가 별개의 전투인데 663년의 백강전투에 관한 이야기는 부흥백제 멸망 이후 역사 속에서 묻혀버린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백강이 어디인가는 의문이지만 금강을 백강이라고 한다면 기벌포 전투가 바로 백강전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백강전투는 부흥백제군과 왜의 연합군과 나당연합군의 전투로 보고 있는 여러 문헌에서 조사한 내용을 토대로 그 개요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부흥백제군 세력은 주류성으로 추정되는 부안 우금산성에 진을 치고 있으면서 661년 9월 부흥백제군의 도침대사와 복신이 왜에 건너가 있던 왕자 부여풍에게 요청하여 왜의 지원을 받아 함선 170척에 군사 만여 명 거느리고 귀국하였고, 662년 3월 왜의 부흥백제 지원군 2만7천명이 가미쓰케노 기미와카코, 아베노 히라우의 지휘로 백강에 들어왔으며, 663년 8월 왜군 1만여 명이 보충되었고 함선이 1천여 척이나 되었다.
나당연합군은 당나라는 유인궤의 군사 1만7천명과 문무왕과 김유신의 신라군이 합세하였다. 당시 왜 수군과 당 수군 및 신라군의 동태를 보면, 663년 8월 13일 풍왕이 왜군을 백촌에서 맞이하였고, 같은 달 17일 나당군은 주류성을 포위하며 공격하였다. 당 수군은 7월 17일부터 부안진성에서 진을 치고 지형과 조류를 조사하고 전략을 짰다. 8월 13일에 도착한 왜 수군이 백촌강으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급속히 빠지는 썰물을 모르고 있다가 배를 돌릴 겨를도 없이 배들이 펄 속에 처박혀 움직일 수 없었다. 이때 당군은 화공을 퍼부어 왜함선 4백여 척을 불태웠다, 간석지의 넓은 습지는 물이 빠지면 갯벌이 되기 때문에 배를 돌릴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왜군들은 배에서 뛰어 내려 걸어 가려했지만 질퍽한 갯벌을 빠져 나가지 못하고 죽임을 당한 것이다. 살아남은 병사들도 주변의 방책지로 이동을 하였으나, 나당군의 공격으로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왜병 선단은 전군을 셋으로 나누어 4번 선제공격하였으나 4번 모두 실패하였고, 1천여척의 함선 중 4백여 척이 불에 타고, 병사 만여 명 전사하고, 1천여 필의 병마가 죽었다.
이로써 백강전투는 부흥백제가 최후를 맞는 정점이 된 것이다.
백강전투가 이렇게 나당연합군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기 때문에 부흥백제의 운명은 663년 8월로 볼 수 있다. 일본서기에는 백제의 멸망을 660년으로 보지 않고 663년으로 보는 것도 풍왕이 백제의 마지막 왕이고 백강전투가 백제의 최후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발굴지를 돌아서 가다가 길을 잃었다. 발굴터를 가로 질러 등마루로 올라섰어야 하는데 옆으로 돌아가다가 길을 잃은 것이다. 절벽을 타고 곧바로 오르니 산성이 다시 나왔다. 이곳에서 울금바위까지 평탄한 성벽 위를 걸었다. 울금바위 가까이 가니 성의 윤곽이 뚜렷하게 보였다. 성은 전체적으로 남쪽보다 북쪽이 넓은 사다리꼴 모양을 하고 있고 내외 석축의 방법으로 쌓은 견고한 석성이었다. 1천5백여 년 전 삼국시대, 아니면 가야시대에 쌓은 산성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이 참으로 신비로운 일이다.
울금바위에는 굴이 몇 개 있는데 원효굴이라 이름한 곳도 있고, 복신굴이라 이름한 곳도 있다. 원효굴은 원효의 수도터일 테고 복신굴은 복신이 숨어 백제를 부흥시키려 했던 곳일 수 있다. 원효굴은 입구가 좁고 굴이 깊지 않았다. 복신굴은 입구가 넓고 굴 안이 매우 넓었다. 복신굴로 알려진 매우 큰 굴에서 가파른 길을 내려오니 개암사이다.
개암사 마당에서 대웅전을 바라보니 절집 지붕 위에 울금바위가 마치 바위 문이 열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개암사라 했는지 모른다. 바위 문이 열리고 부처님의 자비가 넘쳐흐를지도 모르는 일이다. 대개 백제부흥운동에 관련된 산사의 금당은 극락보전에서 아미타부처님을 모시고 백제 유민과 부흥군의 명복을 비는데 이곳 개암사는 대웅보전으로 되어있다.
부안 사람들이 이곳을 부흥백제국의 왕성인 주류성이라고 한다. 그러면 왕성이라고 할 만한 건물이 있어야 한다. 일본에 가 있던 왕자 부여풍을 모셔 와서 부흥백제국의 왕으로 옹립하였으니 건물은 당연히 왕궁의 규모를 지녀야 한다. 또한 최후의 격전지로서 토굴에서 삼천의 군사와 유민이 몰살당한 전설에 근거하여 그 증거인 토굴도 있어야 한다. 또 복신과 도침의 전설에 맞는 사찰도 있어야 한다. 이런 여러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는 성은 아직 찾지 못한 것 같다.
주류성이라고 가정하는 7개의 산성을 지금까지 답사한 결과를 돌이켜 보면 성의 규모나 주변 환경 등을 고려하여 예산의 임존성이 부흥백제의 왕성인 주류성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고 운주산성이 최후의 격전지였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본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임존성의 규모가 크고 건물지가 많으며 남문지 바로 아래 백제부흥운동의 중심인물인 도침대사가 세운 대련사라는 절이 있다. 그리고 부여 도성에서 멀지 않아 백제 유민이나 군사들이 흑치상지 장군을 따라 운집했을 가능성도 높다. 또한 운주산성 부근의 비암사에는 백제의 명문거족이었던 천안 전씨와 관련된 불비상이 발견되었고, 연기지역의 다른 산사에서 불비상이 발견되었던 점을 들 수 있다. 불비상은 백제 역대 제왕과 유민의 왕생극락을 기원하는 소망이 담겨 있다고 인정되기 때문이다.
우금산성
▣ 소재지 :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 문화재 지정 : 전라북도 시도 기념물 제20호
▣ 건립시기 : 삼국시대
▣ 둘레 : 3,960m
▣ 답사일 : 2018년 2월 23일
▣ 함께 간 사람 : 부부등산모임 ‘백만사’ 회원 12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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