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껍질벗기(깨달음)

성 그리고 나무

느림보 이방주 2020. 3. 7. 15:52

성 그리고 나무

     

  

 

감염, 방역, 격리, 확진

불신의 어휘들이 벽이 되어 세상을 가로막고 있다. 미디어를 열면 생경한 어휘들이 마구 달려든다. 반가운 사람도 손잡을 수 없고, 사랑하는 사람도 포옹할 수 없다. 혼자 걷고 혼자 먹고 춤도 혼자 추어야 한다. 격리가 최선이고 혼자가 마음 편하다. 우울하다. 이런 상황에서 뛰쳐나가고 싶다.

 

가림성에 가자. 거기엔 사랑나무가 있지 않은가. 불신을 허물고 사랑의 약속을 지켜준다는 느티나무가 있다. 모든 사슬을 벗어버리고 카메라를 메고 차안 가득 사랑의 신을 모시고 출발했다. 머릿속엔 이미 느티나무를 그리고 있다.

가림성은 몇 해 전 산성 답사라는 이름으로 처음 다녀왔다. 그 후 봄이든 겨울이든 가리지 않고 다녔다. 가림성에는 백제 동성왕과 위사좌평 백가苩加의 비화가 전한다. 동성왕은 높은 관직에 있던 백가를 임천 성흥산으로 보내 축성을 맡겼다. 왕은 백가를 정적이라 여겼고 백가는 왕을 의리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불신이다. 백가는 축성이 끝나면 조정으로 불러줄 것으로 믿었으나 왕은 백가를 가림성 성주로 임명해 버렸다. 제가 쌓은 성에 격리된 것이다. 화가 난 백가는 자객을 보내 부근으로 사냥 나온 동성왕을 죽여 버렸다. 불신이 불신을 낳고 서로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

가림성은 당의 장수 유인궤가 난공불락이라며 피해서 임존성을 먼저 쳤던 천오백년 옛 성이다. 불신으로 쌓은 성 위에 사랑나무가 서 있는 것이나 내가 가림성을 답사하다 이 나무에 빠진 것이나 참 아이러니하다. 산성 답사기를 책으로 엮으면서 생각 없이 가림성 사랑나무라고 표제를 달았다. 답사한 불신이 사랑으로 승화한 것이다.

임천면 소재지는 썰렁했다. 초등학교도 문이 굳게 닫혔다. 면사무소 마당에 방역차량 몇 대가 서 있을 뿐이다. 전에는 면사무소 마당에 차를 두고 오리쯤 걸어 올라가면서 금강 유역의 기름진 백제의 들판을 내려다보았다. 가림성이 지켜내려 했던 보물이 다 보였다.

주차장 앞을 떡하니 가로막은 것은 거대한 바위벽이다. 바위 사이로 만든 계단을 가쁜 숨은 달래며 오르면 남문지가 나온다. 남문을 지키는 장수는 백가도 아니고 흑치상지도 아니다. 아름다운 느티나무이다. 느티나무가 성벽 위에 굵은 뿌리를 내리고 백제의 들을 내려다본다. 성벽은 불신으로 자신을 지키려 하지만 느티나무는 사랑을 베풀어 세상을 지키고자 한다. 성을 답사하던 내게도 어느새 사랑이 옮았다. 성 안 너른 건물지를 100m쯤 걸어가다 뒤돌아보면 느티나무가 하늘에 사랑을 그리고 있다. 백제의 너른 들녘을 향하여, 서해로 천천히 흘러들어가는 비단 같은 금강을 향하여 사랑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사람들은 이 느티나무를 사랑나무라고 한다. 그야말로 가림성 사랑나무이다.

성은 불신을 쌓아올린 벽이다. 가림성도 일정하게 돌을 깎아 불신의 벽을 세웠다. 동성왕은 백가를 격리시키려 했고, 백가는 그런 동성왕을 불신했다. 신라와 당은 다시 일어나는 부흥백제의 감염이 두려웠고, 백제는 신라와 당을 방역하려 했다. 정치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불신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다.

불신으로 세운 성벽에 느티나무는 뿌리를 박고 버티면서 하늘이 내리는 사랑을 받아 대지에 전한다. 성벽은 무너졌지만 사랑의 느티나무는 꿋꿋하다. 불신은 언젠가 무너지지만 사랑은 쉼 없이 커가는 모습이다. 성벽에 뿌리내린 사랑나무는 불신을 길어 올려 그 영양으로 가지를 벋고 잎을 피운다.

오늘은 사랑의 느티나무를 보러 따뜻한 사랑의 신을 모시고 왔다. 나는 버릇처럼 성벽 사진을 찍었다. 신은 사랑을 찍으라 계시하는데 내 버릇은 불신을 찍고 있는 것이다. 흙 속에서 천오백년 만에 드러난 성벽의 알몸을 보면서도 예전에 느꼈던 쾌감은 느끼지 못했다. 마음은 이미 느티나무가 하늘에 그려놓은 사랑 그림에 빠져버렸다. 오리발 같은 뿌리로 백제 땅을 움켜쥐고 사랑을 그려내는 나무가 부럽다. 사랑나무 아래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거대한 사랑나무 그늘이 나를 감싸 안는다. 나의 불신은 햇살이 내리는 사랑에 사위어 버린다. 우리는 결국 사랑의 그늘 안에서 산다. 나무를 안아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포옹하지 않아도 사랑나무가 가르치는 말씀이 함박눈처럼 쏟아졌다. 머리에도 어깨에도 하얀 사랑이 소복하게 쌓였다. 머리가 맑아진다. 우울감이 스르르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가림성 사랑나무 아래에서 사랑을 약속하면 더 깊은 사랑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참 좋은 믿음이다. 그런 믿음으로 더 깊은 사랑을 할 수 있다면 그것도 사랑나무에게 받은 은덕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상을 휩쓸고 있다. 사랑을 잃어버린 인류에 대한 징벌이다. 제 잘못도 깨닫지 못하는 인간들은 서로를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는 꽃으로만 여긴다. 불신 바이러스다. 사회적 격리라는 말을 우리는 이미 가슴 깊이 숨겨놓고 있었는지 모른다. ‘저만치이만큼으로 불러올 수 있는 사랑이 큰사랑이다. 오늘은 큰 사랑에 목마르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사랑나무에게 큰사랑의 말씀을 듣는다.

성에서 내려오면서 검은 마스크를 벗었다. 불신을 벗었다. 햇살이 고와서 사랑나무 그늘이 격리라는 마음을 불살라 주었는지 모른다. 차안에는 관음보살님이 봄 햇살로 현신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우울을 밀어내준 사랑의 신이 고맙다. 돌아오는 길, 대조사에 들러 미래에 큰사랑을 실현할 미륵부처님께 삼배를 올렸다.

   (2020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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