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시 월평동산성(내사지성內斯只城, 유성산성) 답사
▣ 소재지 : 대전광역시 서구 월평동 산 12번지 월평타운아파트 뒷산 (해발 138m)
▣ 시대 : 백제시대
▣ 문화재 지정 : 대전시 기념물 제 7호(1989년 3월18일지정)
▣ 규모 : 둘레 680m 또는 745m
▣ 시설 : 문지 3개(동문 500cm, 서문360cm, 북문300cm) 장대(將臺) 2개(서남쪽의 주장대와 북동쪽의 작은 장대), 집수시설, 건물지 다수
▣ 형식 : 테뫼식 토석혼축산성
▣ 답사일 : 2020년 2월16일(일요일)
▣ 함께 간 사람 : 없음
▣ 개요
갑천 동안의 해발 138m 구릉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대전에서 유성으로 진입하는 길목으로 공주로 가는 옛길이 지나가는 곳이다. 산성에서는 서쪽으로는 유성 일대가 동쪽으로는 대전 시내 일대가 조망된다. 성벽은 대부분 붕괴되었으나 문지와 석축의 흔적은 지표상에 뚜렷하게 남아 있다. 문지는 모두 3개소로 추정된다. 동문터의 너비는 500㎝이고, 서문터는 너비 360㎝이며, 북문터는 너비 300㎝이다. 북문터 부근에는 성에서 가장 낮고 평탄한 곳이 있는데 이곳에 저수나 집수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산성을 정밀측량한 도면이 없어 정확한 규모는 파악하기 어렵다. 대략적으로 전체 둘레는 약 745m(또는 710m, 680m) 정도로 파악된다. 성내부에서는 백제토기편이 수습되어 백제가 축조하였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2001년에 남벽 일부 구간과 고대지 일대가 발굴되었다.
▣ 답사기
월평동산성을 언제 가나하고 벼르기만 한 것이 벌써 언제부터인가. 지금 떠나야 한다. 취재 노트를 찾아서 배낭에 넣고 카메라를 챙겨 바로 출발한다. 신탄진으로 가려면 동부우회도로로 문의까지 가서 그냥 바로 신탄진으로 달려들면 된다. 신탄진에서 대덕연구단지를 지나 갑천을 건너니 바로 월평동 월평타운 아파트이다. 아파트 앞 길가 간이 주차장이 자리 한곳을 비워놓고 날 기다린다. 어렵지 않게 주차하였다. 싸락눈이 쏟아진다. 월평타운 아파트로 쓱 들어섰다. 102동과 103동 사이에 산성으로 올라가는 좁은 시멘트 포장도로가 보인다. 포장도로가 끝날 때 쯤 습지에는 겨울 미나리가 파랗다. 서남쪽에 산성인 듯한 언덕배기가 보였다. 모롱이를 돌아가니 수렛길 양쪽으로 경작지가 무질서하다. 한 사람의 밭이 아니라 인근 시내 사람들이 조금씩 나누어서 취미로 채소를 가꾸는 것 같았다. 비닐이나 버리는 광고 현수막으로 성城처럼 경계를 지은 성터에는 옛 사람들의 불신의 혼이 남아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동쪽으로 대나무 숲이 파랗게 둘러친 곳이 있고 수렛길을 한 50m쯤 돌아가니 월평동산성 올라가는 이정표가 보였다. 0.3km라고 한 것으로 보아 앞을 가로 막고 있는 언덕배기가 바로 산성이라는 내 짐작이 맞았다. 정말 한 300m쯤 올라가니까 월평동산성의 안내 표지판이 보인다. 지금까지 선답자들이 월평동산성이라고 했고 일부 문헌에서도 그렇게 나왔는데 여기는 이정표에는 월평산성이라고 되어 있다. 월평동산성이라고 부르는 게 맞을 것 같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대로 내사지성이라고 하는 것도 맞을 것 같지만 아직 고증되지 않았기에 조심스럽다. 안내 표지판 양쪽으로 오솔길이 갈라졌다. 한쪽 길은 올라가는 길이고 다른 한쪽은 돌아가는 길이다. 두 길이 다 산성 가는 길이라 오르막길을 택했다. 가파른 오르막길 앞을 막아서는 높은 언덕은 분명 인위적으로 쌓은 장대지임이 틀림없다. 큼지막한 돌과 흙을 섞어 두두룩하게 쌓았다. 올라가면서 동북쪽을 살펴보니 분명 성벽이다. 흙이 덮인 위에 낙엽이 쌓여 있고 잡목이 마구 자라났지만 뚝눈으로 대충 보아도 성벽이다. 낙엽은 다시 썩어 흙이 되어 흙은 점점 두텁게 덮인 것이다. 흙을 조금만 허물어 내면 저 안에 고스란히 남은 성벽이 알몸을 드러낼 것이다. 성벽으로 치면 꽤 높아 보였다. 눈짐작으로 대중해 보아도 5~8m는 되어 보였다. 비교적 가파른 산 정상 부근에 이렇게 높은 성벽이 있었다면 요새 중의 요새이다. 언덕으로 올라보니 널따란 대지가 나온다. 평평한 정상 부분은 푸릇푸릇한 풀이 무성하다. 너비가 15~20m쯤 되어 보이는 대지가 길이 한 250m는 되게 펀펀하다. 100m달리기 코스를 만들어도 될 것 같다. 아마도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섰을 것 같다. 남쪽 끄트머리 두두룩한 언덕배기는 분명 장대지이다. 장대지 먼저 올라가 보리라. 다른 사람들도 이곳을 올라가 봤는지 길이 분명하다. 그렇다. 누구나 여길 오르려 한다. 산성에 함께 가보면 남자들은 대개 장대지에 먼저 오른다. 그런데 아내랑 같이 왔으면 분명 말렸을 것이다. "숨차고 힘들게 거길 뭣 하려고 올라가세요." 이렇게 말이다. 그러나 그도 아내의 입장이 아니라면 거길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남자이고 말리는 여자는 아내인 것이다. 올라가는 길은 사람들 발길에 흙이 묻어나고 씻겨서 돌이 드러나 있다. 이곳은 흙과 돌을 섞어 다지고 쌓아서 높게 만들었다. 드러난 돌은 화강암으로 매우 단단해 보였다. 다듬어 각이 진 것도 있고 자연 그대로인 것도 있다. 아마도 성을 쌓을 때 나온 돌조각이나 남은 돌을 흙과 섞어 다지면서 시루떡처럼 편축하였을 것이다. 장대지에 올랐다. 키 낮은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한 열 평쯤 펀펀한 대지가 있다. 이곳에 장수가 머무는 건물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장대이다. 지금으로 치면 연대장쯤 되는 장수가 된 것처럼 성 안의 대지를 내려다보았다. 거기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선 것처럼 보인다. 군사들이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고 성가퀴에 보초를 서는 병사도 있고, 오색 깃발이 나부낀다. 여기서 갑천이 다 내려다보인다. 유성 주변의 산봉우리들이 다 눈 안에 들어온다. 이 앞의 대전에서 공주로 가는 길이 바로 눈 아래에 있다. 선답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월평동산성에서 동북쪽으로 구성리 산성이 있고, 서쪽으로는 성북리산성, 남으로 사정성과 연결된다고 한다. 동쪽으로 내가 이미 답사한 질현성이나 계족산성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백제시대에 노사지현奴斯只縣으로 불렸던 유성현의 다른 산성들이 월평동산성을 중심으로 성곽의 띠를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 신라에서 웅진이나 사비로 가는 길목이 바로 여기였을 것이다. 그러니 이 성은 매우 중요한 요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삼년산성이 신라의 전방 사령부라면 신라군이 백제를 치려면 회인을 거쳐 이곳을 지나는 것이 지름길이다. 더구나 계족산성이 신라의 손으로 넘어가는 날엔 월평동산성이 계족산성이 맡았던 사령부노릇을 대신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660년 의자왕이 공산성에서 나당연합군에게 항복하고 소정방에게 술잔을 올리는 수모를 견디지 못한 흑치상지를 비롯한 백제 일부 장수들이 임존성에서 불같이 일어났다. 백제 군사와 유민 3만이 구름처럼 그 뒤를 따랐다고 한다. 이른바 부흥백제군이다. 662년 7월로 추정되는 시기에 현재 대전시 동구 질현성에서 부흥백제군과 나당연합군이 격전을 벌였다. 당군은 세작細作을 통해 백제의 방비가 허술한 것을 간파하고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제대로 대적하지 못한 부흥백제군은 크게 패하였다. 《자치통감》 권200 당기 16 고종 용삭 2년(662) 추칠월조에 '仁願仁軌知其無備 急出擊之' 곧 당나라 장수 유인원과 유인궤가 그 무방비 상태를 알고 급히 나와서 그를 공격했다는 기사이다. 질현성 전투에서 크게 패한 부흥백제군은 그해 8월 내사지성 인근의 진현성眞峴城을 크게 보강하고 경비를 강화했다. 그래서 나당 연합군에 애를 먹였는데 방비가 튼튼해지자 오히려 부흥백제군이 방심하였다. 이를 파악한 당나라 유인궤는 신라군을 시켜서 진현성을 공격하여 부흥백제군 800여명이 전사하였다. 부흥백제군은 질현성과 진현성이 함락되자 내사지성을 근거로 하여 신라를 공격하였다. 신라는 김흠순을 비롯한 장수 19명을 동원하여 대규모의 공격을 감행하였다. 삼국사기에는 부흥백제군의 공격을 "662년 8월에 백제의 잔적殘賊들이 내사지성에 모여 악한 짓을 했으므로 장군 열아홉 명을 보내어 쳐부수었다."고 하였다. 삼국사기는 부흥백제군의 공격을 '작악作惡'으로 표현하여 당이나 신라의 시선으로 해석하였음을 보여 주었다. 부흥백제군은 끝까지 저항하였으나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나당연합군이 장수 11명을 보냈어도 한 달 이상이나 버티었던 청양의 두릉윤성 전투의 패배와 유성의 내사지성 전투의 패배로 부흥백제군은 웅진과 임존성 부근의 모든 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내사지성은 발굴하거나 지표조사를 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근에 정수장 공사를 하면서 1990년 충남대학교와 공주대학교가 합동으로 약 4천여 평을 조사한 결과 백제시대 집자리, 대형 목곽과 목책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또한 석축 성벽과 나무기둥 자리 등이 발견되었다. 성벽 일부에서도 백제식 축성방법 위에 고구려식 축성법이 발견되어 세종시 부강 지역까지 진출한 고구려 세력이 유성까지 영향을 주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장대지에서 내려오면서 보니까 성안 대지 한가운데에 자치구에서 주민들을 위해서 세웠는지 정자가 있는데 마치 동아시아 해변에 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백제 당시를 연상할 수 있는 건물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벽을 따라 성 안을 한 바퀴 돌았다. 동북쪽에 장대지보다 낮고 건물지보다 높은 곳이 보였다. 갑천을 내려다보는 망대이거나 작은 장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아래 내려가서 보니 큰 바위 위에 흙으로 쌓은 것으로 보였다. 북문지는 비교적 낮은 곳에 있는데 옹성의 효과를 볼 수 있도록 성벽을 어긋나게 축성했다. 청주 정북동토성에서 볼 수 있는 축성법이다. 돌아오는 길에 보니까 운동기구를 설치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산책하다가 운동을 하라는 배려인 것 같은데 녹슬고 먼지가 묻어 아무도 사용한 흔적은 없었다. 건물지를 함부로 파고 시설물을 설치할 때 유적지는 망가지게 되어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월평동산성은 규모에 비해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산성이다. 보다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고증을 거쳐 시민에게 공개되었으면 좋겠다. 장대지에 다시 한 번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 함박눈이 내린다.
월평산성 장대지
이정표
안내표지판
남문지
동벽
건물지
드러난 성 석
서벽
잡목이 자욱한 건물지
건물지
동남쪽으로 정수장이 보인다
무질서한 경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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