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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꿈을 꾸는 비밀 정원-현정원의 《새꿈》을 읽고-

새 꿈을 꾸는 비밀 정원-현정원의 《새꿈》을 읽고-이방주사람은 하늘에 날아오르지 못한다. 그런데 하늘을 나는 생물이 없다면 하늘에 날아오르는 꿈은 꾸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늘에 날아오르는 새가 있고 그 새를 쉽게 볼 수 있기에 우리는 새꿈을 꾸는지도 모른다. 새꿈은 새처럼 날아다니는 꿈일 수도 있고, 새처럼 땅에서 먹이를 구하고 하늘에 인간의 소망을 전해주는 꿈일 수도 있다.현정원은 새꿈을 꾼다. 그의 삶의 공간은 새꿈을 꾸는 비밀 정원이다. 새꿈을 꾸는 진정한 비밀 정원을 찾아 제주로 날아갔는지도 모른다. 현정원이 꾸는 새꿈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녀만의 삶이다. 남들이 따라할 수 없는 그녀만의 삶이겠지만, 누구도 거부하거나 찌푸리는 일은 없다. 그냥 그녀의 꿈의 실현이고 누구나 지향하는 보편적인 가치로..

평론가가 뽑은 좋은 수필-8] 이방주 ‘빗장을 풀고 존재로 나아가기’

평론가가 뽑은 좋은 수필-8] 이방주 ‘빗장을 풀고 존재로 나아가기’강현자 수필 ---『한국수필』 4월호 게재빗장을 풀고 존재로 나아가기이방주인간이 철학적인 존재라는 것을 전제로 하면 식욕, 성욕 외에 고독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본능을 하나 더 들 수 있다. ‘관계’를 지어 존재로 나아가고자 하는 본능이다. 모든 존재자는 관계망으로 因과 緣을 맺으면서 존재로서 가치를 지닌다. 관계는 인식의 열쇠이고 애정의 젖줄이고 상생의 생명원이다. 강현자의 (한국수필 4월호 게재)는 개별적 존재자로서 관계와 소통에 대한 절실한 소망을 드러낸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대문을 경계로 두 개의 세계가 존재한다. 서로 다른 문화를 지닌 대문 안의 세계와 대문 밖의 세계가 그것이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이 처한..

[평론가가 뽑은 좋은 수필-6] 이방주 ‘상상으로 듣는 변환의 소리’

[평론가가 뽑은 좋은 수필-6] 이방주 ‘상상으로 듣는 변환의 소리’ 허정진 수필 ---『수필과비평』 3월호 게재 상상으로 듣는 변환의 소리 겨울나무와/ 바람/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나무도 바람도/혼자가 아닌 게 된다.(김남조의 시 에서) 이 시는 겨울나무와 바람을 거울삼아 관계와 존재의 의미를 비추어본 작품이다. ‘투명한 빨래’처럼 시각으로 감각할 수 없는 바람은 나무의 흔들림으로 존재를 상상한다. 혼자서는 존재를 드러낼 수 없다는 깨우침으로 독자에게 의식의 변환을 가져다준다. 이처럼 시적 사유에서 때로 수필적 상상을 배우기도 한다. 작가의 단계적이고 전략적인 상상으로 삶의 변환과 성장을 가져온다는 문학의 효용성을 보여준 것이다. 수필적 상상으로 대상을 인식할 때는..

적소(謫所)에서

적소(謫所)에서 적소에서 봄을 본다. 호수 가까이 버드나무 가지가 노릇노릇 연두로 물들었다. 소나무 숲엔 진달래가 흐드러졌다. 산은 마을을 가로막고 강은 산을 비집고 세상으로 나가는 길을 내어준다. 등잔봉 줄기가 호수에 잠기는 산자락 끄트머리에 노수신 적소인 수월정(水月亭)이 있다. 봄이 오듯 나도 적소에 왔다.노수신(1515~1590)은 상주 사람이다. 중종 때 벼슬에 나아가 명종 때 유배되었다가 선조 때 풀려난 정치가이자 유학자이다. 열일곱 살부터 장인 이연경에게 십년공부를 하여 스물일곱에 급제했다. 이조좌랑까지 올랐으나 소윤이 대윤을 몰아낸 을사사화 때 순천으로 유배되었다가 진도로 옮겨져 19년간이나 귀양살이를 했다. 다시 이곳 산막이 마을 달래강 가운데 작은 섬으로 옮겨졌다. 여기에 초막을 짓고 ..

[평론가가 뽑은 좋은 수필-4] 240325 ‘고백 없는 길에 대한 그리움’(임미옥의 수필 이방주 단평)

평론가가 뽑은 좋은 수필-4] 이방주 ‘고백 없는 길에 대한 그리움’ 임미옥 수필 ---『좋은수필』 1월호 게재https://daily.hankooki.com/news/articleView.html?idxno=1065759 고백 없는 길에 대한 그리움 사랑은 고백하는 순간부터 의무가 된다. 고백의 말은 윤리적 책임을 동반하기 때문에 용기가 필요하다. 과거의 과오를 고백하거나 미래의 다짐을 고백하는 말도 용기로부터 비롯된다. 수필은 고백의 심정을 받아 쓴 글이기에 윤리적 책임감이나 부끄러움을 넘어설 용기가 필요하다.월간 『좋은수필』 1월호에 발표된 임미옥 수필가의 작품 을 읽는 동안고백 없는 줄다리기가 가슴을 졸이게 했다. 두 청춘의 ‘말 걸어오기’ 줄다리기의 배경은 눈 쌓인 밤길이다. ‘눈..

내가 생각하는 좋은 수필(수필미학 세미나 자유발표 원고 20240328)

수필미학 세미나 자유발표 원고/ 2024. 3. 28./ 이방주 내가 생각하는 좋은 수필 - 읽히는 수필을 위하여- 수필문단의 가장 큰 문제는 읽히지 않는 것이다. 일반 독자들은 물론이고 수필가도 다른 작가의 수필을 읽지 않는다. 대부분의 수필가들은 자신의 글에만 도취되어 있는 것이다. 밥은 육신의 에너지원이 되기도 하지만 맛의 여운도 소중하다. 밥은 먹고 난 뒤 몇 시간이면 공복이 되고 남은 향기도 사라지지만 좋은 수필은 읽고 나면 시간이 지날수록 더 배가 고프고 여운도 더 진하게 남는다. 그러한 공복에서 오는 쾌감과 여운이 우리네 아픔을 치유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작가는 창작 과정에서 변환과 성장을 가져오고 독자는 읽는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고 갈등을 해결한다. 이와 같이 수필을 치유의 문학이라고 하지..

[평론가가 뽑은 좋은수필-3] 240319 <이토록 유쾌한 자기 긍정>(이명지 작품 한혜경 단평)

이명지 '성당 가는 길'...'문장' 2024 봄호 게재 한혜경 교수 섬네일. 사진=데일리한국DB "우리 인생의 여기저기 흩어진 조각들을 가지고 서사를 만들거나 발견하는 작업을 하면 우리 삶은 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이 된다" 미국의 저명한 법철학자이자 윤리학자인 마사 누스바움의 말이다. 이 말처럼 삶을 되돌아보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기억을 재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때 놓쳤거나 인식하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한다. 수필은 이 과정에서 길어 올린 삶의 지혜, 사유의 정수를 언어로 형상화한 글이다. 이명지의 은 착한 아이로 알려졌으나 기실 나쁜 아이였던 자신을 돌아보는 글이다.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착한 아이라는 '족쇄'를 스스로 깨부숨으로써 반전의 묘미를 선사한다. 글은 어린 시..

[좋은수필-2 ] 240312 날것에서 숙성으로(정옥순 작품 이방주 단평)

[평론가가 뽑은 좋은 수필-2] 이방주 ‘날것에서 숙성으로’ 정옥순 수필 ---『한국수필』 1월호 게재 이방주 문학평론가 섬네일. 사진=데일리한국DB 날것에서 숙성으로 ‘우리는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 노사연의 히트곡 의 노랫말이다. 맞다. 우리는 갖가지 고통을 이겨내면서 날것에서부터 조금씩 익어가는 것이다. 수필은 일상에 대한 인식을 철학적으로 해석하여 아름다운 언어로 형상화하는 문학이다. 형상화 과정에 문학적 구성이 필요하다. 수필을 철학과 문학 사이에 있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수필은 짧은 산문이기에 구성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히려 작가의 사유를 밀도 있게 짧은 산문에 담아내려면 치밀한 구성이 절실하다. 구성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깊은 사유만..

[좋은수필-1] 240305 길 잃은 자(박엘리아 작품 한혜경 단평)

글/박엘리야/ 계간수필 2024 봄호 육중한 나무문을 열었다. 저 멀리 서 있던 어느 노승이 나에게 무어라 중국어로 외쳤다. 중국어를 모르는 나는 그것이 다시 나가라는 뜻인지 아니면 무엇을 하라는 것인지 몰라 멀뚱멀뚱 서 있기만 했다. 노승은 아랑곳하지 않고 중국어로 계속해서 나에게 외쳤다. 지나가던 사람 하나가 친절하게도 손을 소독하라는 뜻이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허둥지둥 손을 소독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노란 조끼를 입은 봉사자 두어 명은 기념품 판매대에 서서 무언가를 포장하느라 바빠 보였다. 절의 내벽은 작은 불상으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고 층층이 쌓인 불상들은 몇천 개는 되는 것 같았다. 안쪽으로 들어서자 금박을 입고 손가락과 이마를 오색진주로 치장을 한 커다란 불상들이 세워져 있었다. 제 몸에 그..

완보緩步 그리고 노두老蠹

완보緩步 그리고 노두老蠹 오랜만에 간재사고(艮齋私稿)를 펴보았다. 이 책은 1927경 간행된 조선 말 성리학자인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년~1922년)의 문집이다. 팽개치듯 서가에 묻어두었는데 갑자기 궁금하다. 간재사고가 내 손에 들어오게 된 사연은 중요하지 않다. 소중한 고서로 알고 있기는 했으나 관심은 크게 없었다. 내용은 뚝눈으로 봐도 방대하다. 당시 학자들과 주고받은 서신은 물론 성리학에 대한 학문적 소신이 담긴 듯하다. 몇 장 넘기니 책장 일부가 지렁이 기어 간 자리처럼 훼손되었다. 종이가루가 하얗게 묻어난다. 하필이면 글자를 따라 먹었다. 좀이 쏠은 자리이다. 아파트에 좀벌레가 있을 리가 없으니 40여 년 전 내게 오기 전에 이미 먹은 것이다. 그것 참 희한하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