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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렁이가 품은 우주

지렁이가 품은 우주 새벽 산책길에서 딱한 중생을 만났다. 젓가락으로 입에 올리다 흘린 자장면사리 같다. 꿈틀꿈틀 힘겹게 기어간다. 지난 밤 폭우에 땅속 지렁이 은신처에 빗물이 괸 모양이다. 물구덩이에서 살만한 곳을 찾아 지상으로 나오셨을 것이다. 블록 위에 물이 없으니 숨쉬기는 괜찮겠다. 그런데 여기는 처참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파트 산책로는 입주민들이 새벽부터 산책을 한다. 폭우가 내리고 하늘이 말끔하게 갠 날 아침에는 걷는 사람이 더 많다. 시간이 좀 지나면 아이들이 자전거를 탄다. 쓰레기 수거 차량의 바퀴는 지렁이 눈으로는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무지막지하다. 새벽 총알 배송을 생명으로 아는 택배 차량을 지렁이가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운동화에 밟혀 으깨지고 자전거 바퀴에 치어 끊어..

성찰과 고백으로 열어가는 변환의 문門- 권명희의 《은밀하게 피어나는 꽃》 -

성찰과 고백으로 열어가는 변환의 문門 - 권명희의 《은밀하게 피어나는 꽃》 - 1. 문門을 열다 빗장을 풀어야 문은 열린다. 자아는 빗장[關]을 풀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야 세계에 이어[係]진다. 자아가 세계와 관계를 이루는 첫걸음은 걸린 빗장을 푸는 것이다. 자아가 빗장을 풀어 안에서 열면 개방이고, 닫혀 열리지 않는 문을 밖에서 열면 도전이다. 권명희 수필가의 첫 수필집 《은밀하게 피어나는 꽃》에 수록된 수필 49편을 일람하니 유독 문門이 많이 보인다. 을 시작으로 우리네 삶에서 열고 나가거나 열고 들어서야 하는 문이 작품집 곳곳에서 발견된다. 권명희의 문은 다양하다. 엄마의 문, 마음의 문, 은밀하게 꽃이 피어나는 문, 옥문玉門, 항문, 유리문, 차가운 문 등이 그것이다. 작가는 이 문을 열고 새..

(월평) 죽음, 아름다운 공명(共鳴)- 『한국수필』 7월호를 읽고-

죽음, 아름다운 공명(共鳴) - 『한국수필』 7월호를 읽고- 이방주 포스트코로나시대 대중에게 가장 큰 위안을 준 TV 프로그램은 아마도 ‘M트롯’이었을 것이다. 대면 공연도 없는데 안방까지 스며들어 감염병에 찌든 사람들을 열광하게 했다. 수필도 이만큼 대중을 열광하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부러웠다. 그러나 수필이 트롯만큼 독자들의 가슴에 미적 울림을 전했는지 돌아보면 기가 죽는다. 우리 수필가들은 트롯 가수들만큼 수필 때문에 아파본 적이 있는지, 그들만큼 피나는 노력을 한 적이 있는지 반성해볼 일이다. 미스터트롯 가수 탑 세븐의 공연을 안방에서 보면서 수필의 예술성을 생각해 보았다. 가수들은 모두 개성이 뚜렷했다. 예를 들면 가수 P는 음악 이론 공부를 많이 했는지 이지적으로 흐름과 구성을 생각하..

15. 김은희의 <그녀의 고백> <산과 그에 대한 기억>(한국수필 2021년 7월호)

신인상 심사평 김은희의 이방주 김은희님의 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두 작품은 모두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의 삶을 제재로 삼았다. 수필은 치유의 문학이라고 한다. 수필 창작과정에서는 세계와 자아를 이해하는 통찰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긍정적 사고를 갖게 된다. 아울러 이러한 작품을 감상하면서 독자는 영혼의 치유 효과를 보게 되는 것이다. 은 여행지에서 만난 여행가이드의 특별한 성격에 대해 처음은 반감을 가졌으나 애정으로 이해하면서 통찰하여 긍정적 시선이 된다. 결국 처음의 반감은 ‘열망이 있어 빛나는 그녀’로 결론을 내린다. 그녀의 삶의 고백을 들으면서 자신을 치유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었다. 은 산행에서 만난 구조대원인 ‘그’의 산처럼 큰마음에서 삶의 기쁨을 얻는다. 병렬로 구성한 몇 개의 등산 일화를 통해 아무..

연초공장 누나들

연초공장 누나들 커피 맛이 특별한 문화다방에 갔다. 오늘도 오천 원짜리 한 장으로 두 잔을 샀다. 현관문 바로 앞에 앉아 체온을 체크하는 여성에게 따뜻한 커피를 건넨다. 문화의 씨앗 하나를 심는 것이다. 문화다방은 연초제조창이었던 청주문화산업진흥재단 건물 로비에 있다. 커피 맛이 특별하고 따뜻하다. 손녀를 유치원에 데려다 주고 바로 달려가면 8시 55분에 도착할 수 있다. 현관에서 체온을 체크하는 중년 여성을 만난다. 참 친절하다. 따끈한 커피 한잔이 하루를 행복하게 한다. 그분에게 커피를 건넨 날은 더 행복하다. 더구나 9시 이전에 결제를 하면 3000원에서 자그마치 500원이나 할인해 준다. 오천 원짜리 한 장이면 두 잔을 살 수 있다. 그분에게 한 잔을 슬쩍 건넨다. 돌아오는 미소가 따듯하다. 그분..

나으리의 사려, 꼰대의 생각

나으리의 사려, 꼰대의 생각 “사려 깊지 못했습니다.” 대답은 약속한 듯 똑같다. 장관 후보자들이 자신의 삶을 주의 깊게 살피지 못했다는 말이다. 외교관이었던 한 분은 주재국에서 사들인 도자기를 관세 없이 들여와 판매까지 했다고 한다. 한 분은 공무원 특혜로 분양 받은 아파트를 살아보지도 않고 팔아 떼돈을 벌었다. 다른 한 분은 공무로 해외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남편과 자녀들을 대동하고 관광까지 했다고 한다. 사려 깊지 못한 나으리들의 행위를 꼽아볼수록 약오르고 누려온 특혜에 분노한다. 이 분들이 사려가 깊었더라면 언론은 재미가 없었을 테고 야당도 지금만큼 기세등등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은 분노하지 않아도 되고 정부가 말하는 ‘공정’이란 말도 헛갈리지 않았을 것이다. 대통령이 국회가 흠결만 잡..

수필적 상상과 존재의 정립挺立 강현자의 《나비가 머무는 이유》

수필적 상상과 존재의 정립挺立 - 강현자의 《나비가 머무는 이유》 - 이방주 1. 들어가기 수필을 체험의 문학이라고 말하면 고맙고, 사실의 기록이라고 말하면 섭섭하다. 솔직히 말해서 수필가는 ‘문학’이란 말에 감사하고 ‘기록’으로 폄훼될까 두렵다. 그러나 수필이란 문학 양식에 수용되는 기억은 재생되는 순간 있는 그대로의 순수한 사실이라 하기 어렵다. 수필가라는 문인의 상상력이 가미되기 때문이다. 기억을 재생하는 데는 체험에 대한 작가의 주관적 해석이 개입되기 마련이다. 작가는 자신의 기억을 재구성하기도 한다. 체험을 보다 의미 있고 인상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방법이다. 뿐만 아니라 정감과 분위기를 위해서 상상적 환경을 가미하기도 한다. 주제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러한 상상과 재구성은 ..

유동진의 <위로의 시간> 수필과비평 2021년 6월호(236호)

위로의 시간 유동진 살다 보면 피할 수 없는 외길에 들어설 때가 있다. 예고 없이 닥치는 위기가 그런 것이다. 어느 날 일상이 무너지는 사태 앞에서 죽은 듯 웅크려야 할 때 무력감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뒤따라온 통증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아 혼자 일어설 수 없을 때는 일상이 암담했다. 오랜만에 딸네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일어났다. 마루에 나오자 키 큰 건조대에 아기 기저귀며 손바닥만 한 옷가지들이 장날의 만국기처럼 널려있었다. 간밤에 밤새 울어댄 네 살배기 아기를 달래느라 진이 다 빠진 딸 부부는 해가 중천인데도 아직 주무신다. 손이나 덜어줄까 해서 바닥에 앉아 빨래를 갰다. 허리에서 괴상한 느낌이 울려온 것은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였다. 삐끗한 신호가 경광등처럼 몸속에서 깜박거렸다. 허리를 뒤로 ..

제 40회 한국수필문학상 수상 선정

수필집 《들꽃 들풀에 길을 묻다》(2020년 4월 10일 발행, 도서출판 밥북)가 사단법인 한국수필가협회와 월간 한국수필이 시상하는 제 40회 한국수필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는 최원현 이사장의 통보를 받았다. 사람들은 수상통보를 받으면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뜻밖에 수상하게 되어 기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상은 솔직하게 많은 기대를 했었고 사실은 작년에 주어질 것으로 기대했는데 탈락되었다가 금년에 받게 되었다. 지난 2월 27일 받은 신곡문학상 대상은 정말 전혀('감히'라고 말하는게 좋을 것 같다)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뜻밖에 연락을 받고 조금 황당하기까지 했었다. 그것은 신곡문학상을 수여하는 수필과비평사는 나의 母誌도 아니고 수필가에게만 시상하는 것이 아니라 수필 평론에 공이 있는 평론가나 학자들..

김일복의 <사금파리 사랑> 수필과비평 2021년 4월호(234호)

김일복의 ,사금파리 사랑> 수필과비평 2021년 4월호 (234호) 김일복 - 수필은 체험의 철학적 해석이다. 체험은 진실해야 하고 해석은 독창적이면서도 삶을 개념화하여 형상화해야 울림을 준다. 김일복님의 은 지인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중심 화소로 자신의 사랑을 돌아보고 있다. 인간이 갖고 영위해야 하는 사랑의 원형을 ‘빛나는 비색을 가진 물처럼 투명한 아름다운 사금파리 사랑’이라 했다. 작가가 체험을 바라보는 진실한 시선이 있기에 짧은 서사이지만 진한 감동으로 형상화되었다. 수필이 치유의 효과를 가질 수 있는 것은 기억을 소환하여 현재의 자신을 돌아보는 역동적 상상의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감동을 주는 또 하나의 요인은 체험의 해석을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에 굴하지 않는 지인의 사랑을 ‘사금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