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과 서재/문학과 수필평론

성찰과 고백으로 열어가는 변환의 문門- 권명희의 《은밀하게 피어나는 꽃》 -

느림보 이방주 2021. 7. 8. 22:37

<발문>

 

성찰과 고백으로 열어가는 변환의 문門

- 권명희의 《은밀하게 피어나는 꽃》 -

 

 

1. 문門을 열다

 

빗장을 풀어야 문은 열린다. 자아는 빗장[關]을 풀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야 세계에 이어[係]진다. 자아가 세계와 관계를 이루는 첫걸음은 걸린 빗장을 푸는 것이다. 자아가 빗장을 풀어 안에서 열면 개방이고, 닫혀 열리지 않는 문을 밖에서 열면 도전이다.

권명희 수필가의 첫 수필집 《은밀하게 피어나는 꽃》에 수록된 수필 49편을 일람하니 유독 문門이 많이 보인다. <엄마의 문>을 시작으로 우리네 삶에서 열고 나가거나 열고 들어서야 하는 문이 작품집 곳곳에서 발견된다. 권명희의 문은 다양하다. 엄마의 문, 마음의 문, 은밀하게 꽃이 피어나는 문, 옥문玉門, 항문, 유리문, 차가운 문 등이 그것이다. 작가는 이 문을 열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고 들어서면서 삶의 실존적 변환을 꾀한다. 권명희 수필가에게 문은 개방보다 도전의 의미가 크다. 문은 그에게 열고 들어서야 할 장애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고 걸린 빗장을 푸는데 진력한다. 오히려 ‘장애물 극복하는 재미’로 ‘마음의 문’을 열고 나아가기도 하고 활짝 열어 세상을 맞이하기도 한다.

권명희 수필가는 아호를 ‘일우一又’라 한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에서 ‘다시 한 번 더, 한 걸음 더’라는 뜻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날로 새롭게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새롭게 열린 세계로 나아간다.’라고 하는 의미처럼 그의 삶은 날마다 새롭게 변환과 승화의 문을 열어간다. 그는 경북 영주 동부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독학으로 검정고시를 거쳐 방송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여 학사모를 썼다. 문학을 꿈꾸던 산골 소녀는 드디어 2016년 월간 《수필과비평》 신인상에 당선되었다. 문마다 걸려 있는 ‘비밀번호’라는 단단한 빗장을 풀고 문단이라는 세계에 진입한 것이다. 그는 흔들리지 않는 걸음으로 삶의 장애라는 문을 열고 앎의 세계에 도전하여 실존적 존재의 변환을 이루었다. 결코 순탄한 삶을 살아온 것도 아니다. 태백시 탄광촌을 떠나 낯선 도시 청주에 와서 삶을 개척한다. 그런 가운데 가정 경제의 문을 열었고, 학문의 문을 열었으며, 산골 문학소녀의 꿈의 문을 열었다. 그는 문을 열고 세계로 나아가며 힘겨움에 ‘흔들리는 걸음’을 걷기도 하지만 결코 ‘이탈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 문단에 등단하고 수필집 《은밀하게 피어나는 꽃》을 내면서 산골 소녀가 가졌던 문학의 꿈을 이룬다. 그의 삶은 그 자체가 하나의 드라마이고 철학적 수행이며 변증법적 변환을 가져오는 명수필이다.

권명희 수필가는 등단하기 전에 이미 청주시 1인1책 만들기에 참여하여 수필집 두 권을 상재했다. 《분홍빛 보따리와 장바구니》, 《슬쩍 비켜서는 마음》은 그의 문학적 소양의 바탕을 보여준 작품집이다.

권명희는 서문에 해당하는 <은밀하게 전하는 말>에서 수필은 부끄럽지만 ‘솔직한 제 삶을 보여주는’ 것이라 정의한다. 수필의 생명은 솔직한 고백이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고백은 어디까지일까. 과연 수필가들이 털어놓는 고백은 어디까지일까. 권명희 수필가와 수필로 만나서 수필로 소통한 것도 십 년에 가깝다. ‘나르시스처럼 자신을 성찰하라. 그리고 봉숭아 씨오쟁이가 터지듯 자신을 터트려라. 그러면 모든 부끄러움이 객관화된다.’ 이 말이 그와 함께하는 문우들에게 전한 고백의 정의이다.

그는 지금도 열심히 산다. 쌍둥이 아들도 성가하여 사회에서 부모의 가르침대로 정직하게 봉사하며 살고 있다. 그래도 ‘마음에 쏙 드는 수선실’이란 옷 수선집을 개업하고 수선보다 바느질을 배우고 싶은 이들에게 무료 강습을 하고 있다.

등단 이후에는 처음 내는 《은밀하게 피어나는 꽃》을 첫 수필집으로 하겠다고 했다. 이 작품집은 49편의 작품을 주제와 서사 내용에 따라 4부로 나누었다. 1부 ‘엄마의 문’에는 어머니의 사랑과 아무나 가질 수 없는 따뜻하고 진한 모정母情을, 2부 ‘뜸 들이는 시간’에는 내리사랑을 통한 존재의 확인과 깨달음을, 3부 ‘열아홉을 품고 사는 사람’에는 여행과 인연을 통한 자기 성찰과 고백을 통한 자아의 객관화를, 4부 ‘고개를 들어요’에는 역사와 생태주의 삶의 자세를 담아냈다.

이제부터 모정의 문을 어떤 철학과 감성으로 드러냈는지, 존재의 변환과 확인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인연과 생태주의 문화가 작품에 담겨있는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글은 수필집 《은밀하게 피어나는 꽃》의 발문이지만, 작품의 해설을 겸하여 작가와 독자를 이어주는 징검다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2. 모정母情의 문門

 

수필은 체험과 사실의 문학이다. 수필의 서술자는 작가 자신이다. 그러므로 이 글에 어머니로 불리는 이는 작가의 어머니이다. 작가는 어머니의 사랑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통한의 삶을 절절히 표현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 체험의 서술로 끝나지 않았다. 개인의 체험을 통한 우리 모두의 모정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냈기에 독자의 공명共鳴을 불러 온다.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수필의 제재로 삼을 때 가족관계의 기억을 소환해야 한다. 소환된 기억은 남김없이 고백해야 독자의 공감을 불러올 수 있다. 남김없이 고백해야 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어머니의 정, 어머니의 사랑, 어머니의 고통, 어머니의 한恨에는 필경 가난, 아버지의 외도, 조부모에 의한 시집살이나 아니면 자식들의 탈선 같은 어머니 이외의 가족들의 원망스런 과거가 원인이 된다. 작가는 부끄러운 가족사를 고백해야 한다. 고백에 앞서 부끄러워 머뭇거리면 눈치 빠른 독자들의 공명을 얻기 어렵다. 그러나 작가는 아버지의 외도를 마치 고발하듯 고백한다. ‘내가 시집가던 해 아버지도 새살림’을 차려서 ‘나보다 더 깨를 볶고’ 살았다며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시작한다. 원망은 자연스럽게 어머니에 대한 연민의 정으로 치환되어 고생하면서 가정을 일으킨 사모의 정이 살아나기 시작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부끄러운 가족사이다. 그러나 부끄러울 건 없다. 그 시대 이 사회에 드물지 않은 가정 내의 사건이기에 모든 독자가 공감하며 이미 작가의 편에 서 있다. 이른바 공감이 싹을 틔우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시앗을 본 어머니가 원망의 끈을 놓아버리자 작가의 모정을 향한 문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열리기 시작한다. 작가는 치매 초기의 어머니를 모시고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시앗집을 찾아간다. ‘빚진 표정’으로 맞는 어머니의 시앗을 집 앞에서 만난다. 가는 동안 기억 저편에서 소환되는 사연들을 하나하나 짚어 본다. ‘동짓달’ 밤처럼 길었다. 젊은 새댁 시절 기억을 떠올리는 어머니는 ‘수줍은 새색시마냥 고운 미소’를 띠기에 더 마음 아프다. 이렇게 치매 어머니는 과거와 현재가 교차된다. 시앗이 차려내온 소주 두어 잔에 ‘목에 걸려 있던 찌꺼기를 넘겨 버리듯’ 씻어버린다.

요양원에 계신 어머니를 ‘이팝꽃 떨어지면 만나려나’ 그리워하다가 어머니를 아예 집으로 모셔온다. 아버지의 외도로 여자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에 대한 연민이 ‘빚을 잔뜩 지고 갚지 않은 마음’이었다. 그리고 엄마의 방을 꾸민다. 벽을 허물어 ‘엄마의 문’을 만들어 드린다. ‘바깥세상의 자유를 그리워하는’ 창살 너머의 죄수 같은 엄마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다. 허물어진 벽에 새로 난 문은 ‘엄마의 문’이다. ‘아버지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이다. 테라스를 만들어 놓으니 엄마에게 자유의 세계가 생겼다.

 

오늘도 깊은 밤 센서 소리가 몇 번이나 감지되었다. 모두 잠든 밤에도 깨어나 움직일 수 있는 자유를 찾은 것이다. 자유로운 모습으로 생활하는 엄마를 보며 조금은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엄마만의 언어를 알아듣고 대화하며 엄마 기억 속의 추억을 나누며 살고 있다. 불안해하며 표정 없던 모습에서 웃음을 되찾았다. 남편 떠난 황량한 집안에서 여섯 남매를 지켜 주었듯이 나도 세상의 무심함에서 말벗이 되어주며 채무 변제에 힘쓰며 살아야지. 최소한 두발로 화장실 다닐 수 있고 자식과 함께 지내는 것이 즐거움이라고 느낄 수 있는 그 날까지 만이라도….
<엄마의 문>에서

 

문이란 소통의 통로이다. 문을 걸어 잠근 빗장을 풀면 바로 관계가 이루어진다. 작가는 어머니에게도 관계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한다. 나와 엄마와의 관계, 세계와의 관계, 아버지와의 관계를 꿈꾼다. 그것으로 조금은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으로 향하는 문은 활짝 열렸으나 어머니는 다시 닫힌 문 안으로 모셔야 했다. 어머니가 다시 들어가신 요양원은 문이 닫혔다. 코로나 19로 면회마저 마음 놓고 할 수 없는 곳으로 어머니를 보내놓고 딸은 ‘차가운 유리를 사이에 두고’ 눈물로 만난다. 어머니의 기억에 남아 있는 ‘배차적’(배추전)과 ‘막걸리’이야기로 ‘하회탈처럼’ 웃는 어머니를 그대로 두고 자동차에 시동을 건다. 그때 열아홉 살에 객지로 떠나는 딸을 이별하던 엄마의 마음이 가슴으로 들어온다. 코로나 19로 닫힌 유리문은 열릴 줄 모른다.

열리지 않던 엄마의 문은 기이하게도 차가운 아버지를 향하여 열린다. 부부간에는 질투보다 그리움이 크다는 사실을 작가는 깨닫는다. <언제 겨울이었던가>에서 아버지를 향한 엄마의 마음이 풀리는 것을 보면서 어머니로부터 빙의되었던 딸의 분노도 풀린다.

 

며칠이 지나서 아버지한테 또 가자고 한다. 그렇게 가까이 있는데 한번 다녀오자고 한다. 그러자고 말하며 가슴에 돌덩이 하나 내려앉는 것 같았다. 무엇이 엄마를 위하는 것이란 말인가. 그간 엄마를 대변한답시고 맹렬하게 투쟁한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주제넘은 행동이 부부 사이를 갈라놓은 결과만 낳은 것이 아닌가.
이런 삶도 있고, 저런 인생도 있는 것을! 내 잣대로 아버지의 삶을 송두리째 부정하며, 엄마만을 가엽게 보아온 행동이 오히려 엄마를 더욱 외롭게 한 것이 아닌가. 한자리에 앉기만 하면 되는 것을, 긴 세월 동안 엄마의 수호신이 되겠다며 철옹성 같은 벽을 쌓아 온 세월을 무엇으로 보상해야 하나!
여자의 질투보다 그리움이 더 강하게 남은 마음에 그까짓 시앗이 있으면 어떤가! 그저 그리울 때 한 번씩 만나서 어리광을 부리면 되는 것을!
<언제 겨울이었던가>에서

 

‘영감이 밉다’는 어머니의 말에 아버지를 미워하며 ‘아버지를 향한 사랑 거두어들이겠다’며 ‘격렬한 투쟁’을 선언했지만, 치매가 깊어갈수록 ‘아버지를 찾는 횟수’가 늘어가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맥없이 풀어지고’ 만다. 부부의 정은 두 사람만이 안다. 작가는 그것을 이해한다. 강함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움이 이긴다는 원리를 터득한다. 이것을 사랑의 변증법이라 할 수 있겠다. 작가는 사랑의 변증법으로 갈등과 미움의 빗장을 풀고 사랑의 문을 활짝 열고 화합의 봄을 맞아들인다.

어머니와 나 사이의 문을 가장 가슴 아프고 절절하게 담아낸 작품은 <문 밖>이다. 어머니를 위해서 내드린 ‘엄마의 문’이 엄마와 나 사이를 갈라놓는 문이 되었다. 갈수록 치매 증세가 심해진 어머니는 수시로 문밖으로 나가신다. 문밖에 나가면 돌아올 줄 모른다. 엄마와 나 사이에 가로놓인 ‘비밀번호’가 ‘야멸차게 밀어내는 문처럼’ 엄마를 가로 막는다. 열린 문도 엄마에게는 ‘잠긴 문’이다. 이제는 엄마와 나 사이에 ‘빗장을 건다.’

 

한적한 곳에 생경하게 생겨나는 거창한 건물이 현대판 고려장이다. 그곳에 수십 명의 어머니들이 있지만 밖에서는 그림자도 찾을 수 없다. 밖으로 나오는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에 자유롭게 나올 수 없다. 자식과의 고리 끊어버리고 함께 계시는 분들과 남은 삶을 의지하며 사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부모님께 효를 행하는 마지막 세대들의 마음일 것이다.
<문밖>에서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시기로 한다. 현대를 사는 모든 자식들이 부모 모시는 법으로 일반화된 문화이다. ‘세상 어디보다 엄마 있는 곳이 천국’이었던 자식들이 ‘세상 어떤 좋은 곳보다 자식 있는 곳이 천국’인 부모를 ‘냉정하게 잘라버리고’ 뼈를 깎는 아픔으로 키워낸 자식이 떼어내려 한다. 작가의 고백은 어쩌면 매우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누구도 흉볼 자신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고 독자는 자신의 일로 이해한다. 현대의 삶의 문화의 단면을 성찰하여 고백한 것이다.

권명희 수필가가 어머니를 모시고 변증법적 사랑의 문을 열고 나간 세계에는 ‘나’의 어머니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 모두의 어머니가 거기에 있다. 그것은 ‘바람 같은 아버지’에게 속울음을 울며 젊은 아내와 사는 아버지의 보따리에 ‘된장 고추장 담아 보내는 마음’으로 아버지를 받아들이고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을 어머니로 받아들인다. 권명희는 <은밀하게 피어나는 꽃>에서 요양원 요양보호사로 일하면서 ‘마음의 문’을 연다.

 

며칠째 변을 보지 못하시는 분 앞에서는 선배가 장갑을 끼었다. 마치 요리사가 맛있는 요리를 하려고 준비하듯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은밀한 곳에 손가락을 쓱 집어넣었다. 그 순간 차마 보지 못하고 또 고개를 돌렸다. “내 속이 다 시원하네!” 하며 땀을 훔치며 일어서는 그녀의 모습에서 그저 고개가 숙어질 뿐이었다. 그때부터 역한 냄새에 서서히 적응되어 갔고 제때 꽃을 피우는 일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알게 되었다.
기저귀를 가는 도중에도 은밀한 꽃은 피어났다. 누워서 살아가는 분이 온 힘을 다하여 꽃잎을 밀어내는 그 힘에 감탄하며 나는 요즘 그 은밀한 꽃향기에 취해 살고 있다. 백세가 다 되신 분이 매일 아침 고운 꽃을 피워내신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은밀하게 피어나는 꽃>에서

 

처음에는 노인들의 변을 역겹게 여겼으나 문을 열고 나오는 꽃으로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에 대한 사랑으로 확장된 것이다. 결국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그는 오히려 봄을 ‘은밀하게 피어나는 꽃향기’에 취해 보내고 싶다고 소망한다. 세상의 아버지들은 대개 바람이다. 어머니들은 대개 ‘바람 같은 아버지를 잡고’ ‘시멘트 사이에서 꽃을 피우는 강인한 민들레’처럼 살아왔다. 그런 어머니들이 지금은 요양원에서 하루의 가장 큰 일과가 항문으로 꽃을 밀어내는 일이라는 작가의 평이다. 이렇게 ‘은밀하게 피어나는 꽃향기’에 취해 살고 싶은 권명희의 작품 자체가 은밀하게 피어나는 꽃이라 생각된다. 수필은 붓을 따라 쓰는 글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누구나 다 붓을 따라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을 깨끗이 헹구어 내고 몸으로 실천하여 수행한 작가만이 붓이 하는 말씀을 받아 적을 수 있다. 권명희는 수필가이기에 앞서 수행자의 자세로 수필을 공부한 작가다운 작가이다.

 

3. 존재의 확인과 변환의 문門

 

성찰과 고백의 과정을 통한 실존적 존재의 변환은 통과 의례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20세기 초 프랑스의 인류학자이며 민속학자인 아놀드 방 즈네프Arnold van Gennep는 통과의례를 뜻하는 'rite de passage'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통과의례라는 용어는 인류학은 물론 문학이나 대중문화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문학 연구나 민속학 연구에서 많이 사용한다. 수필집 《은밀하게 피어나는 꽃》에서 작가는 실존적 존재의 변환 과정을 통과의례 단계를 밟아 이행하는 것처럼 작품의 창작과정에 담아내었다. 즉 체험의 해석을 통하여 자아를 성찰하고, 진솔하고 남김없이 고백한 다음, 의식과 행동의 변증법적 변환을 통하여 실존적 존재 가치를 이루어 낸다.

수필은 체험과 사실의 문학이다. 그러나 체험과 사실만 있으면 문학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체험과 사실에 대한 철학적 해석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체험의 기억을 소환하여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과정을 자아성찰이라고 할 수 있다. 성찰은 자신의 체험을 객관화하여 해석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우리에게 ‘너 자신을 알라’고 주문한다. 자신에 대해 깨닫고 정신을 차리는 것이 자기 변환의 첫걸음이라는 것을 일깨운 말이다. 자아를 성찰하고 변환에 이르려면 통찰이 필요하다. 통찰은 꿰뚫어보는 것이다. 꿰뚫어보려면 안을 보고[insight], 미래를 보고[foresight], 뒤를 보아야[hindsight] 한다. 만리 밖의 일을 환하게 살펴서 알고 있는 명견만리明見萬里가 그것이다. 과거에 대한 이해로 통찰력을 갖추면 미래가 보인다는 말이다. 권명희 수필가는 현재를 해석하고 자아를 성찰하여 미래를 위한 변환을 꾀한다. 결국 실존적 존재가치를 이루어내는 것이다.

수필집 《은밀하게 피어나는 꽃》에 수록한 작품에서 그의 동선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단양군 대강면 장현리에서 태어나서 노동국민학교에 입학한다. 4학년 때 영주동부초등학교에 전학하여 졸업한다.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고모에게 양재 기술을 배우기 위해 감포로 간다. 감포에는 첫사랑의 추억도 있다. 그러다가 1985년 결혼하여 태백시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한다. 태백은 탄광으로 호황을 이루는 산협 도시였다. 신혼시절 만해도 경기가 좋았던 태백시는 정부의 연료 정책의 변경으로 관산이 폐광되자 침체기를 맞는다. 시집살이하던 작가는 자유를 꿈꾸며 청주로 탈출한다. 청주에 와서 무조건 세탁소를 시작하고 고생 끝에 아파트를 구입하여 새로운 보금자리를 꾸리고 청주 사람이 된다. 그동안 수많은 빗장을 풀고 문을 열어 더 넓은 세계로 도전하는 삶을 살았다.

그의 작품 <청주인 조르바>에는 도전과 성찰을 통하여 실존적 존재로서의 변환을 가져오는 과정을 잘 담아냈다.

 

낯선 청주를 찾아들며 개척자가 되어야 했다. 어디에서 살아야 할지, 무엇을 하며 아이들을 키워야 할지, 그 생각만으로 도시 구석구석을 헤맸다. 종갓집 맏며느리 삶에 회의를 느끼고 도망치다시피 나 홀로 떠나온 이곳이 나의 크레타 섬이었다.
세탁소라는 갱을 만나 석탄 캐는 광부가 되었다. 막장에 가로막고 있는 벽에서 흑진주를 캐는 마음으로 삶에 덤벼들었다. 산더미처럼 밀려드는 일을 보람으로 여기며 삽질을 해댔다. 처음 하는 일에는 시행착오가 따르게 마련, 사고도 잦았다. 분실된 세탁물 찾아 몇 날을 뒤져야 했고, 잘못된 세탁으로 며칠의 수고를 고스란히 변상하는 비용으로 지불해야 했다.
하루 종일 다림질하는 몸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온몸이 쑤셔와 밤이면 신음을 내며 쓰러졌다. 빡빡하게 살아온 오 년의 생활이 노다지를 안겨 주었다. 아파트에 입주하며 그간의 노동에 보상을 받았다.
<청주인 조르바>에서

 

이 작품은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장편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조르바가 성찰을 통하여 자기 존재의 의미를 알고 진정한 자유를 찾아 도전하는 모습에 자신의 삶을 빗대어 쓴 글이다. 작가는 진정으로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찾아 태백에서 청주까지 왔다. 그가 생각하는 진정한 자유는 과거나 현재보다 미래의 자유이다. 그러기 위해 현재에 충실한 것이다. 작가가 현실에 충실하게 행동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누군가 붙여준 이름이 ‘청주인 조르바’이다. 그렇다. 행동이 결여된 지식인은 진정한 지식인이 아니다. 철저하게 자기를 돌아보고 미래를 설계한다. 자신이 택한 도전은 세탁소라는 갱이다. 청주라는 도시는 크레타섬이었다고 술회한다. 그렇게 지독하게 일하면서 드디어 아파트를 사고 학사모까지 쓴다. 넓은 강물도 ‘징검다리가 있으면 건널 수 있듯이’ 졸업증서는 인생의 ‘징검다리’가 되었다. 인생의 징검다리를 획득하고부터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할 용기’가 생겼다는 말이 읽는 사람을 가슴 아프게 한다.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크레타섬을 찾아 성찰과 도전의 문을 열고 나아가 결국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실존적 자아로의 변환을 이루어 꿈꾸던 자유를 누리게 된다. 자유의 모습은 <옥탑 예찬>에서 엿볼 수 있다. 오늘의 자유를 이렇게 토로한다. 그 옛날 내 고향 노루고개에서 듣던 ‘뻐꾸기 소리가 서러워 함께 울었’으나 오늘의 뻐꾸기 소리는 ‘풋사랑을 데려오고’ 온몸으로 스며드는 뜨거움이 되었다. 존재의 변환이다. 이러한 변환은 <손녀와 함께 봄을>에서 자신의 삶의 모습을 확인하면서 확실해진다.

 

단단하고 어두운 고치 속에서 여린 살을 부비며 세상 밖으로 애벌레가 나오듯이 우리도 그렇게 세상으로 나와 자신의 길을 걷는다. 어떤 순간에는 자갈길을 걷고 어떤 때는 숲길도 걷고 또 어떤 순간은 낭떠러지를 만나며 삶의 근육을 단련해가며 살아냈다.
삶의 어느 길목에서 따가운 햇살에 갈증을 견디며 오랫동안 걸어야 했던 세월도 있다. 목마름에 주저앉고 싶은 순간에도 멈추지 않고 걷다 보니 지금은 시원한 그늘에서 쉬고 있는 것처럼 살고 있다. 손녀의 재롱을 보며 살고 있는 지금 소나무 숲의 향기를 맡으며 시원하게 쉬고 있는 순간들이다. 맑은 하늘같이 해맑은 음성으로 까르르 웃는 손녀의 웃음소리가 있고, 성실한 아들네가 가까이서 깨를 볶으며 살고, 바위처럼 든든한 남편이 곁에서 묵묵히 지켜주고 있는 이 순간이 그런 길을 걷고 있는 느낌이다.
<손녀와 함께 봄을>에서

 

손녀와 함께 봄을 즐길 수 있는 오늘의 진정한 자유를 위해 ‘갈증을 견디며’ ‘목마름에 주저앉고 싶은 순간’도 멈추지 않고 걸어온 과거가 있다. 그래서 지금은 ‘시원한 그늘’에서 ‘깨를 볶으며 사는’ 아들네를 보고 ‘바위처럼 든든한 남편’이 있고 ‘까르르 웃는 손녀의 웃음소리’가 함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의 권명희 수필가에게 ‘봄은 축복이다.

 

4. 인연과 만남의 문門

 

권명희는 여행의 묘미는 만남에 있다고 한다. 우리는 흔히 우연한 만남을 말하지만 우리네 삶에 우연한 만남은 없다는 것이 불가에서 말하는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진리이다. 만남의 씨앗을 부지불식중에 심어 놓은 것이다. 만남에 의해서 사랑이 싹트고 미움이 싹트고 사랑과 미움에 적응하고 해결하는 과정을 곧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삶의 자유가 생기자 작가는 여행을 즐기기도 한다. 그는 여행 중에 많은 만남을 경험한다. 첫사랑을 만나고, 외딴섬의 어린이를 만난다. 그리고 낯선 문화를 만나고, 낯선 생태를 만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만남 중에서 가장 소중한 만남은 자기 자신과의 만남이다.

<우연한 만남>에서 우연히 외연도 분교 어린이들과 만나 일일교사로 초대되어 글쓰기에 대하여 수업하고 아이들과 인연을 맺는다.

 

한 시간도 안 되는 시간을 함께했는데 그 아이들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다. 문득 어린 시절 시골로 온 대학생 선생님 생각이 떠오른다. 노래와 글쓰기를 가르쳐준 순간들이 영원히 내 마음 안에 들어 있었다. 여행 중에 경험하게 된 뜻하지 않은 사건은 나에게도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 작은 섬이 세상의 다가 아니고 넓은 세상을 향해 나갈 것을 꿈꾸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하나의 아이들이 마음 안에 들어앉았다.
<우연한 만남>에서

 

낯선 아이들을 우연히 만났지만, 아이들은 작가의 가슴에 들어앉게 되고 작가는 아이들의 ‘마음 안에도 내가 자리하게 될 소중한 시간’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작가는 여행에서 첫사랑 인연을 만나기도 한다. ‘술의 힘’을 빌었는지 ‘벚꽃 향기 때문’이었는지 첫사랑의 고백을 들으면서 열아홉 소녀로 돌아가 ‘발그레 볼이 붉어지기’도 하였다. 열아홉에 심은 인연의 씨앗을 삼십년 넘어서 ‘내 열아홉을 고스란히 안고 살아가는 그가 그리워’지기도 한다.

인연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지만, 여행지의 만남 중에서 아주 소중한 만남도 있었다. 바로 자신과의 만남이다. <사막에서 흘린 눈물>에서 갑자기 ‘정체 모를 눈물샘’이 터지고 말았다고 술회한다. 당혹스러웠지만 그것은 ‘삶의 반환점’에서 자기 정체성에 대한 회한의 눈물이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고 했던가! 돌아보니 나는 빈 수레에 지나지 않았다. 명랑을 가장한 소란스러움에 주변에서 견디느라 얼마나 고역이었을까. 내 삶의 인연들이 못난 나에게 보내준 칭송이 부끄러웠다. 거친 몸짓과 정제되지 않은 표현조차도 들어주고 감싸주며 함께 걸어온 가족과 친구가 떠올랐다. 그들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몰려와 그리도 눈물바다를 이루었을까. 아니면 그것들을 견디지 못하고 떠나버린 그들이 그리워서 흘린 참회의 눈물이었을까. 정체 모를 눈물을 밤새도록 쏟아내고 나서 다른 나를 느꼈다. 조금 아는 것이 더욱 위험하다는 말을 가슴 깊이 느끼는 시간이다.
<사막에서 흘린 눈물>에서

 

라스베이거스라는 황량하지만 광활한 사막의 도시에 와서 좁은 자기 삶의 터전에서 ‘못난 곳’을 숨기며 살아온 부끄러운 자아를 발견한 것이다. 요란하게 살았지만 사실은 ‘빈 수레’였던 자신을 향한 부끄러움의 눈물이다. 존재의 변환을 가져오는 자아성찰의 눈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성찰의 결과는 <은검초>에서 미래의 삶의 행동변환을 결정하는 씨앗이 된다. 하와이를 여행하는 동안 고산지대에서 아히나히나(은검초)라는 신비의 꽃을 발견한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견디어내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꽃이다. 50년이나 견디어 기어이 꽃을 피우고 ‘재가 되어버리는’ 장엄한 죽음에 감동한다. 결국 ‘거친 삶을 살아낸 분에게 사람 향기’가 나는 것임을 깨닫는다. 생각해 보면 작가 자신도 그런 삶을 살아서 지금 향기 나는 모습이 되지 않았나 싶다.

 

5. 수필과 존재의 성숙

 

권명희 수필가의 첫 수필집 《은밀하게 피어나는 꽃》에 드러난 그의 삶의 서사는 한마디로 단단한 빗장이 걸린 문을 열고 세계에 도전하는 변환의 신화이다. 곧 수필을 통하여 성숙을 이루는 과정이다. 단군 신화에서 곰은 환웅신이라는 강림신이 제시한 쑥과 마늘을 먹으면서 깜깜한 굴속에서 금기를 이행한다. 그 결과 웅녀로 변신한다. 이 신화는 수성獸性을 지닌 한 인간이 금기를 지키고 과제를 이행하여 바른 인성人性을 지닌 인간으로 변환한다는 가르침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아놀드 반 즈네프는 모든 의례는 분리, 추이, 통합의 단계를 거친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통과의례의 출생, 성인, 결혼, 죽음 등의 인간 성장과정에 담기어 거치는 단계이다.

수필은 그 소재를 거의 인간의 삶의 과정에서 들여온다. 권명희의 수필은 대부분 삶의 과정에서 제재를 택했고 그것은 통과의례적인 서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통과제의처럼 통과해야 하는 문은 거의가 고통의 문이었지만 문을 나서면 꽃이 피어나는 세계였다. 그의 삶 자체가 수필쓰기의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치열하게 자신을 성찰하고 부끄러움 없이 고백하는 과정에서 사회와 통합하고 타협하는 삶의 가치의 문을 열었다. 자신을 객관화하여 모순을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로 지향하는 것이 실존적 존재로의 변환이라고 생각한다.

이 수필집은 1부에서 어머니를 대상으로 했다. 그리고 2부 이후에는 자신의 변환 과정과 역사 문화를 제재로 인연생기나 생태주의 사고로 그 본질과 원형을 추구하였다. 수필은 삶의 철학적 원형을 천착하여 작가 자신과 독자의 아픔을 치유하는 문학이다. 소재를 확장하고 시선을 더 넓고 먼 곳에 두어야 세상을 치유하는 작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거친 삶을 살아본 사람이 향기가 난다고 한 것처럼 진정한 향기를 아는 작가로 한 발 더 내딛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