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으리의 사려, 꼰대의 생각
“사려 깊지 못했습니다.”
대답은 약속한 듯 똑같다. 장관 후보자들이 자신의 삶을 주의 깊게 살피지 못했다는 말이다. 외교관이었던 한 분은 주재국에서 사들인 도자기를 관세 없이 들여와 판매까지 했다고 한다. 한 분은 공무원 특혜로 분양 받은 아파트를 살아보지도 않고 팔아 떼돈을 벌었다. 다른 한 분은 공무로 해외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남편과 자녀들을 대동하고 관광까지 했다고 한다. 사려 깊지 못한 나으리들의 행위를 꼽아볼수록 약오르고 누려온 특혜에 분노한다.
이 분들이 사려가 깊었더라면 언론은 재미가 없었을 테고 야당도 지금만큼 기세등등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은 분노하지 않아도 되고 정부가 말하는 ‘공정’이란 말도 헛갈리지 않았을 것이다. 대통령이 국회가 흠결만 잡는다며 화낼 일도 없었을 것이다. 대통령이 화를 내는 바람에 국민은 더 분노한다. 화가 난 대통령은 국민을 약올리듯 사려 깊지 못했다는 분들을 대부분 장관으로 임명해버렸다. 사려 깊지 못한 행정을 해도 국민은 분노를 가슴이 묻어둘 수밖에 없다.
모두 가슴이 활화산처럼 부글부글 끓었다. 분노공화국이 되어버렸다. 의회는 정부를 향해 분노하고 국민은 의회를 향해 분노한다. 균등, 공정, 정의란 단어의 의미가 왜곡되고 굴절되었다. 그래서 분노한다. 큰일에도 분노하고 작은 일에도 분노한다. 어른은 젊은이에게 ‘감히’라며 분노하고 젊은이는 어른에게 ‘꼰대 노릇’한다며 분노한다. 온 나라가 갈기갈기 찢어져 서로에게 이를 간다. 젊은이들은 희망도 꿈도 꿀 수 없어 더 분노한다. 분노한 가슴은 눈에 불을 켠다. 그래서 젊은이들에게 어른도 없고 선생도 없고 부모도 없다.
나는 활화산처럼 끓어오르는 그들의 분노가 무서워 분노한다. 분노 바이러스는 코로나 바이러스와 어깨를 겯고 끝 간 데 없이 창궐한다. 어느새 내게도 감염되었다. 나는 사소한 일에 분노하고 별것 아닌 일에 욱한다. 일곱 살짜리 손녀가 대답하지 않는다고 화내고, 아홉 살짜리 손자가 밥을 남긴다고 숟가락을 던진다. 아내가 생선을 손자만 준다고 분노하고 좋아하는 사과를 사다놓지 않는다고 분노한다. 예술인에 대한 지원이 부족하다든지, 동네에 도서관이나 문화센터를 지어주지 않는다든지 하는 일에는 관심조차 없다. 나는 고희라는 나이에 전혀 어울리지 않은 사소한 일에 분노하여 씩씩거린다.
아파트 정문에 막 들어서려는데 탑차 한대가 코너를 가로 막았다. 편의점에 물건을 내리고 있다. ‘코너에 차를 세우다니’ 갑자기 화가 불끈 솟았다. ‘뭐야 이거 왜 남의 아파트 정문을 가로막아!’ 우리를 우습게 보는 거 아냐. 편의점에서 젊은이가 나온다. 싸가지 없이 어디다 차를 세워. 나는 갑자기 클랙슨을 ‘빵- ’ 하고 눌렀다. 아차, 괜히 눌렀다. 배송 청년이 도끼눈을 뜨고 쳐다본다. 겸연쩍은 웃음을 씩 보내고 고개를 까딱해야 하는데 전혀 아니다. 무섭다. 눈에 불을 켠다. 불이 활활 타오른다. 내게 분노의 풍선을 터드리려나. 나를 꼰대로 보는 거 아냐? 당신은 '균등했냐. 공정했냐. 정의로웠냐.’ 고 소리 지르는 것 같다. 그러나 후회는 이미 늦었다. 청년이 이쪽으로 온다.
“아이찌 왜 빵 해요?”
물러설 수 없다. 우리 손자 규연이가 지켜보고 있다.
“이 사람아 코너에다가 차를 세우고 물건을 내리면 어떡해. 저쪽에서 해도 되는데.”
“그렇다고 빵 해요? 물건 떼는 거 안보여요?”
어, 그런데 갑자기 할 말이 없다. 왜 할 말이 없지? 내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는데 왜 법규를 어긴 사람 앞에서 대답을 못하는 거야. 청년은 제 차로 가다가 뭔 생각인지 되돌아온다. 살쾡이 눈이다. 차안을 들여다본다.
“아이찌, 애기도 있는데 그렇게 살지 말아요. 좋은 아파트에 살면서”
내던지고 돌아선다. 휴-, 가긴 가는구나. 청년을 화나게 한 건 “빵-”이 아니라 ‘좋은 아파트’였다. 이런 아파트도 그에겐 불공정으로 보일 만큼 좋은 아파트인가 보다.
지하주차장으로 들어서는데 손자의 한 마디가 청년의 도끼눈보다 더 무섭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생각이 짧았어요. 어른들은 생각이 아예 없었으면서 짧았다고 하더니 이번에는 정말 생각이 짧았어요.”
정말 뭔지 몰라도 생각이 짧았다. 나는 생각이 짧은 나를 성찰하며 사려 깊은 한 마디를 더 했다.
“규연아, 할머니한테는 말하지 마.”
“알았어요. 저도 그 정도는 생각해요.”
나는 사려 깊은 손자 앞에서 생각이 짧은 할아비가 되었다. 정말 오늘은 바보 같은 꼰대가 되어버렸다. 나으리도 아니면서 꼰대처럼 배려를 잊고 생각이 짧았다.
명심하자. 요즘 젊은이들은 분노하고 있다. 분노가 가슴에 가득하다. 그의 눈을 보면 금방이라도 분노가 터져 나올 것만 같다. 아홉 살짜리 규연이도 할아버지의 바보 같은 분노에 어처구니 없어한다. 그래서 어른을 어른이라 하지 앉고 ‘꼰대’라고 한다.
나는 나으리들의 사려 깊지 못한 것을 꾸짖을 수 없다. 나도 생각 짧은 꼰대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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