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원초적 행복(맛)

정선의 여름 2

느림보 이방주 2004. 8. 11. 07:14
 2. - 황기 족발 -


점심 겸 저녁으로 안내 전단에서 본 황기족발을 먹기로 했다. 아내가 한 번 가봤다는 유명한 동광 식당을 간신히 찾았다. 점심때도 저녁때도 아닌데 사람들이 방안에 가득하다. 그것만 봐도 그 맛은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족발의 터벅터벅한 맛과 노리끼리한 냄새 때문에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내가 황기 족발은 다르다고 권하므로 먹기로 하였다. 족발은 대개 접시 위에 살을 발라낸 뼈를 놓고, 살을 보기 좋고 얇게 저며 가지런히 뼈다귀를 덮어서 나오게 마련이다. 기름기가 빠진 족발 살은 입안에서 기름지게 씹히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노리끼리한 냄새와 함께 텁텁한데다가 그 질긴 껍질의 살이 이에 낄 뿐 아니라, 입술 주변에 돼지 냄새가 배고 기름이 묻어 미끈덕거리기 때문에 더 그랬다. 족발을 먹을 때는 항상 돼지 발목이 반쯤 빠지던 시골 돼지우리의 질퍽한 오물이 연상되곤 하였다.

 

어떤 모습으로 상이 나올까를 그리고 있을 때 미처 수염을 깍지 못한 얼굴 하얀 총각이 상을 내왔다. 그런데 황기 족발을 칼로 썰지 않고, 손으로 쪽쪽 찢은 것 같아 보인다. 보기에도 연한 고기를 시골 막걸리집에서 배추겉절이 담듯 그렇게 한 접시 수북하게 담아서 내왔다. 빛깔 또한 생기를 잃은 그런 빛깔이 아니다. 마늘, 고추, 새우젓, 야채를 곁들인 것은 여느 집과 다름이 없다. 그런데 된장은 좀 다르다. 시장에서 파는 쌈장이 아니다. 윤기가 나고 색이 짙으며 훨씬 차져 보인다. 젓가락으로 찍어 먹어보니 입안에 침이 돌 정도로 짜고 고소하다. 정선에서 나는 우리 콩으로 만든 집된장인가 보다.

 

족발은 삶을 때 황기를 넣었는지 윤이 나고 꼬들꼬들해 보인다. 총각의 말을 빌리면 계피, 칡뿌리, 생강 등 여러 가지 약초를 넣는다고 한다. 특유의 돼지 냄새도 나지 않는다. 크기도 너무 크지 않아 상추가 아닌 들깻잎에 싸기에도 좋았다. 깨끗한 깻잎에 꼬들꼬들한 족발을 한 점 깔고, 주둥이와 꼬랑지가 붉고 몸뚱이는 하얀 그야말로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앞발을 머리에 대고 먼 고향바다를 그리워하는’듯한 새우젓을 서너 마리 올려놓고, 정선 고추와 정선 마늘을 하나씩 그 옆에 뉘고, 짭짤하고 고소한 정선 집된장으로 마감하여 왼손에 들고, 노란 가시오가피주 한 잔을 들이킨 다음, 입을 크게 벌려 씹어 보니, 연하게 씹히는 맛이 고추 마늘의 매운맛과 된장의 고소하고 짭짤한 맛이 조화를 이루어 어렵고 복잡한 세상사를 다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맨 나중에 묻어나는 집된장 맛이 입안을 개운하게 씻어 준다.

 

우리는 가시오가피주를 연거푸 비우며 정신없이 쌈을 쌌다. 돼지 발목이 드러나 살을 다 발라 먹도록 시골 돼지우리를 잊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돼지 발목뼈를 들고 묻어 있는 살을 발라 먹었지만 나는 참았다. 절제를 위함이다. 후식으로 황기 수정과를 마시니 입 언저리 돼지기름이 싹 가시는 것 같았다. 가시오가피주에 약간의 취기가 돌고 시장기가 가시자 말할 수 없는 행복감에 젖었다. 하루 종일 대지를 불태우던 태양이 좁은 하늘에서 노을도 없이 어둠을 지고 산자락으로 내려온다. 천리 길 운전의 피로가 조양강을 거슬러 가리왕산 꼭대기로 스믈스믈 올라가는 듯했다.

 

황기 족발은 옛날로 돌아가면 정선에서는 서민들이 먹는 고급 음식이었을 것이다. 메밀과 옥수수, 조밥, 보리밥으로, 옥수수, 감자로 연명하던 옛날로 돌아가면, 쌀밥이나 돼지고기는 서민들에게는 구경하기 힘든 음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족발은 그래도 이들에게 가끔씩 목의 기름을 돌게 해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정선에는 여름의 약재인 황기를 가미하여 몸의 허함을 보했을 것이다.

 

알아보니 하루에 이 식당에서만 족발을 두 가마 정도 소비한다고 한다. 두 가마 모두를 정선 사람들이 먹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 같은 외지 사람들의 향유일 것이다. 옛날 한여름의 더위에 농사로 지친 이 고장 사람들에게는 영계백숙을 대신하는 보신재였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하여 오늘의 향유와 취기가 쓸데없이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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