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원초적 행복(맛)

정선의 여름 4

느림보 이방주 2004. 8. 13. 08:16
 4. 수수부꾸미와 감자떡, 술빵


돌아오는 길에 동강의 절경을 보기로 한 우리는 간식거리를 몇 가지 더 사기로 했다. 아직도 푸른색을 벗지 못한 사과 몇 알과 강원도 옥수수를 사고 시장을 기웃거렸다. 시장에는 할머니들이 정선의 토산품임을 증명하는 명찰을 목에 걸고 고사리, 더덕, 황기, 산나물을 팔고 있다. 고사리를 비롯한 산나물을 좀 사고 돌아오려는데 수수부꾸미를 만들어 파는 사십대 중반의 여인이 있었다. 인상이 참 좋았다. 순박한 미소가 넘치는 밉지 않은 얼굴이다.

 

엷은 보랏빛 수수가루 반죽을 그릇에 담아 놓고 땀을 흘리며 부꾸미를 만들고 있었다. 수수부꾸미는 어렸을 때 밭에 드문드문 심어놓은 수숫대에서 찰수수 몇 가지를 수확하여 그걸 맷돌에 갈아 어머니께서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얼마나 맛있는 것인지 기억에도 새롭다.

 

부꾸미는 찰수수가루를 반죽하여 뜨겁게 달군 번철에 기름을 두른 다음 올려놓고 지진 후에 팥이나 동부 같은 것으로 만든 속을 넣고 반쯤 접어서 커다란 반달 모양 지져낸다. 수수가루 반죽이 되직할수록 부꾸미는 차지게 익는다. 부꾸미가 익어갈수록 더 붉은 보랏빛을 띠었다. 아주 익숙한 손놀림으로 부꾸미를 만드는 여인의 얼굴에는 미소가 담기어 있다. 삶의 고달픔이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우리는 따끈따끈한 수수부꾸미를 몇 점 샀다. 그 자리에서 하나씩 맛보니 좀 달기는 했지만 옛날로 돌아가기에 충분했다.

 

이 순박한 미소의 여인의 장사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한 옆에는 감자녹말을 내려서 빚은 감자떡도 시루에서 뜨겁게 익고, 또 비슷하게 생긴 시루에서 노란 옛날 찐빵이 찐빵만이 가지고 있는 냄새와 김을 풍기며 익어가고 있다. 우리는 좀 기다리다가 거뭇하면서도 속이 말갛게 비치는 감자떡과 새콤한 술 냄새가 나는 찐빵을 샀다. 그런데 그 여인은 약속한 것보다 자꾸 몇 개씩 더 담아 준다. 손해날 리는 없지만, 우리가 되레 손해를 걱정하니, 마수기 때문에 정선에 좋은 인상을 가지고 내년 이맘 때 한 번 더 오시라는 뜻이라고 한다. 정선 먹자거리의 인심을 대변하는 듯하다. 넉넉하지는 않지만 예로부터 지녀온 먹거리에 대한 정선의 인심을 담은 정선의 미소를 지닌 여인이라고 명명하고 싶었다.

 

동강으로 돌아오는 길은 황폐화 되어 있다. 사진에서 본 아름다운 산하는 그대로 확인할 수 있었으나, 길은 있다가 끊어지고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고, 다듬어지지 않은 도로와 마을이 헝클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래프팅을 하는 청소년들만이 강에 울긋불긋하다.

 

가장 절경이라고 할 만한 곳에 차를 세우고 그늘에 앉아 우선 옥수수를 꺼냈다. 딱딱하고 푸석해서 괴산 장연 대학찰옥수수 먹던 입에는 맞지 않았다. 나는 수수 부꾸미 생각이 났다. 하나씩 꺼내 먹으니 찰수수의 짠득짠득하게 씹히는 고소하고 그윽한 맛이 어디 견줄 수 없을 정도이다. 수수부꾸미는 뜨거운 번철에 다시 구워서 약간 누른 자국이 있어야 제 맛이 나는데 식은 다음에 먹어도 어릴 때 먹던 기억을 충분히 되살릴 만하다. 햇살은 뜨겁게 세상을 달구지만 아름다운 정선의 산하를 바라보며 정선의 토속음식을 맛보는 기분은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감자떡은 감자녹말을 빚어서 속을 넣고 송편을 만들듯이 꾹 주물러 놓은 것인데, 다른 어느 전분보다도 찰지기 때문에 만들어 놓은 떡도 역시 차지다. 우선 엷은 검은 빛이지만 투명하여 속이 다 보여서 입맛에 맞는 것으로 골라 먹기 좋다. 떡을 봉지에 담을 때 참기름을 충분히 묻혔기 때문에 참기름 냄새가 고소하다.

 

빵은 하나도 먹어보지 않고 그냥 몇 개만 샀는데, 정말 진미이고 추억의 맛이었다. 옛날 밀농사를 지어 타작을 하면 밀을 물에 깨끗하게 헹구어 말린 다음, 마을 방앗간에서 제분을 하면, 그 하얀색이 그렇게 곱고 신기할 수가 없었다. 이 밀가루로 칼국수, 수제비 같은 걸 해먹기도 했는데, 우리가 가장 기다린 것은 빵을 해먹는 것이었다. 밀가루에 막걸리를 약간 넣고 반죽을 하여, 커다란 다라에 담아 장독대에 놓으면 뜨거운 볕에 부풀어 오르는 것이 너무나 신기하였다. 여기에 팥소를 넣고 동글동글하게 빚어 솥에 찔 때, 새콤하며 고소한 냄새를 맡으며 노랗게 익어가는 빵을 상상하던 추억이 생각난다. 그런데 바로 그 맛이었다. 맛만 보아도 아무런 화학 약품이 들어가지 않은 게 틀림없다. 막걸리 향이 솔솔 풍기면서 입안에서 씹히는 그 부드러움이 요즘 흔히 추억의 빵이라고 대량생산하는 그런 제품과는 비교할 수 없다. 우리는 빵을 더 사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제품이겠거니 했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나를 깨닫게 되었다.

 

수수나 감자, 술빵이 몸에 어디 좋은지는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몸을 보양하는 먹거리가 아니라 마음을 보양하는 음식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선의 먹자 거리는 하나하나가 여인네의 손맛이고, 그들의 사고와 정서의 맛이고, 그들의 좌절하지 않는 미소의 맛이기 때문이다. 정선의 먹자거리는 우리의 영혼을 맑게 해주는 영혼의 장터이다. 큰 손으로 듬뿍듬뿍 담아 주던 정선의 인심을 담은 여인의 미소가 아직도 생생하다.


'느림보 창작 수필 > 원초적 행복(맛)'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선의 여름 6  (0) 2004.08.31
정선의 여름 5  (0) 2004.08.15
정선의 여름 3  (0) 2004.08.12
정선의 여름 2  (0) 2004.08.11
정선의 여름 1  (0) 2004.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