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원초적 행복(맛)

정선의 여름 3

느림보 이방주 2004. 8. 12. 07:04
 3. 메밀의 신화


메밀은 메마르고 거친 땅도 마다하지 않는다. 추위에도 꽃을 피우고 까만 열매를 맺는다. 무서리가 내려 그 가늘고 연약한 붉은 대궁이 흐물흐물해져도 다만 한두 알갱이라도 열매를 맺고야마는 것이 메밀이다. 또 여름에 씨앗을 뿌리거나 가을에 파종을 하거나 불평하는 법이 없이 뿌려주는 대로 하얀 꽃을 피우고 때가 늦었거나말거나 기어이 열매를 맺는 것이 메밀이다.

 

어려웠던 시절 척박한 기후와 토질에서 아무렇게나 자라서 거칠고 투박한 메밀을 먹으면서 정선 사람들은 부드럽고 맛좋은 쌀밥을 얼마나 그리워했을까? 그러나 먹거리에서 주림을 치유하는 것보다 미각의 쾌락에 더 비중을 두는 요즈음, 거꾸로 거친 메밀로 빚은 음식을 찾아 나서기 마련이다. 그래서 5일장을 맞은 정선 먹자 골목에는 몰려든 배불뚝이들로 들끓었다.

 

우리는 황기 족발을 쌈으로 싸서 가시오가피주로 가슴이 화끈거리자, 한 번도 먹어본 일이 없는 콧등치기라는 메밀국수를 주문했다. 차림표에 그냥 ‘콧등치기 삼천 원’으로 표시되어 있어서 어떤 음식인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콧등을 친다는 이름이 어떤 뜻일까 제각기 풀이를 해가면서 즐겁게 웃었지만 정답은 전혀 엉뚱한 것이었다. 수염 못 깎은 총각에게 물어 그것이 국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면을 후루룩 들이켤 때 국물 속에서 엉켜있던 굵은 면발이 용수철같이 일어나 콧등을 친다고 콧등치기 국수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한참을 기다리니 콧등치기가 나왔는데, 메밀로 만든 칼국수라고 하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흔히 먹는 막국수에 비해 굵고 우리밀 칼국수보다 색이 짙다. 얇고 납족납족해서 우리밀 칼국수처럼 보였다. 콧등치기 국수는 메밀로 면을 만들고 국물을 따로 끓여 국물에 면을 넣고 다시 끓인다고 한다. 콧등치기 국수의 국물 만드는 데는 비법이 있는 듯했다. 멸치 맛도 나는 듯하고, 된장 냄새도 나는 듯 하고, 우거지의 시원한 맛도 있는 것 같다. 우리가 흔히 해먹는 칼국수처럼 감자도 들어가서 담백하고 진한 맛을 내는데 한 몫 하고 있다. 호박눈썹나물, 오이채, 계란 지단 등으로 고명을 해서 보기도 좋다.

 

면을 젓가락으로 집어 입으로 가져가는 동안 한 가닥도 흘러내리지 않아서 좋다. 입에 넣자마자 입천장으로 한 번 꾹 누르니 씹을 것도 없이 넘어가 버린다. 겉으로 보기에는 거칠고 투박해 보이는데 입에 들어가니 그렇게 부드러울 수가 없다. 구수하고 얼큰한 국물이 시원하다. 황기 족발로 배를 채웠기 때문에 2인분을 네 그릇으로 나누어 먹었는데 배는 부르면서도 후회했다.

 

콧등치기 국수는 옛날 아우라지에서 뗏목을 띄우고 서울로 향할 때 인부들이 정선에서 잠시 멈추면 아낙네들이 급하게 끓여서 대접한 삶의 애환이 담긴 음식이라고 한다. 정선을 가로질러 흐르는 조양강을 바라보니 그 애절한 사연이 가슴을 찌르는 듯하다.

 

이튿날은 정선 장날이었다. 아침으로는 곤드레 밥을 먹고, 메밀 부침개 몇 장을 주문했다. 사실 녹두전을 비롯한 다른 부침개들은 따끈해야 제 맛이지만, 메밀전은 식어도 맛을 잃지 않는다. 또 메밀전은 얇을수록 맛이 난다. 이곳 메밀전은 다른 곳보다 얇고 크면서도 값이 싸서 놀랐다. 여인네들이 전을 부치는 것을 옆에서 가만히 보니까, 메밀을 지룩하게 반죽하여 자그마한 국자로 번철에 얇게 깔아놓고, 물을 완전히 빠지도록 절인 배추를 올려놓아 지져 내고 있었다. 우리네 밀가루 부침개 만드는 것과 별반 다를 것도 없는데, 찢어지지 않으면서도 얇게 구워내는 그들의 손놀림이 신기하다. 메밀전은 양념간장 맛이 좋아야 한다. 나는 원래 메밀전이라면 다 좋아해서 맛의 청탁을 가리지 못한다. 아침밥을 잔뜩 먹었는데도 번철에서 금방 구워 나오는 메밀전 한 접시를 금방 비웠다. 운전 때문에 반주를 걸치지 못하는 게 한이었다.

 

메밀전을 부치는 한 옆에서 메밀전병을 만들고 있었다. 메밀전 만드는 방법으로 조금 더 작게 전을 만들고는 얼큰한 김장 김치와 잡채, 고기를 다져서 만두속을 넣듯이 속을 박고 전을 덮어 또르르 말아서 뒤집으면서 구워내는 것이다.

 

메밀전병은 식어도 맛이 변하지 않으므로 아내들이 간식거리로 몇 점을 샀다.  돌아오는 길에 길가 바위에 앉아 동강의 아름다운 물굽이를 바라보면서 먹었다. 그 얼큰하고 매콤한 맛이 만두의 그 느끼한 맛에 비할 바가 아니다. 쫄깃하게 씹히는 메밀의 구수하고 냉랭한 맛과 속의 얼큰한 열기가 조화를 이루는 듯하다.

 

메밀은 서늘해서 찬 음식에 속한다고 한다. 요즘에는 먹거리에 철을 가리지 않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나 메밀은 속을 차게 하기 때문에 여름에 먹어야 한다. 열기와 습기가 많은 사람이 메밀을 먹으면 몸속에 있는 열기와 습기가 빠져 나가 몸이 가벼워진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열과 습이 많다는 내에게도 꼭 맞는 음식이 아닌가 한다.

 

메밀은 강원도 사람들과 역사를 함께 해온 먹거리이다. 메밀로 만든 음식은 옛날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애환이 담겨 있는 우리 민족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메밀은 그 강인한 생명력으로 척박한 기후 토질에도 열매를 맺고야 마는 두메의 작물이다. 이런 생명력이 메밀묵, 전병, 부침개, 콧등치기국수 등으로 우리 민족의 생명을 면면이 이어 오늘에 이르게 하였다. 그런데 이제 풍요의 시대를 맞아 지나친 영양으로 지친 현대인의 성인병 치료에 도움이 되는 질 높은 먹거리가 되었다니 만감이 교차한다. 메밀의 생명력은 시공 뿐 아니라, 삶의 질의 수준도 초월하여 그 은혜를 인간에게 베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보면 원시의 것, 자연 그대로의 것, 우리 땅에서 난 것이 우리 몸에 가장 잘 맞는 보양식임을 짐작할 수 있다.

                                                        <수필문학 2007년 1월호> 특별기획 "나의 식도락"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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