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원초적 행복(맛)

꽃피는 날에 생각나는 떡

느림보 이방주 2004. 7. 14. 22:32
  이른 봄 밭두렁 산기슭에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조팝나무 하얀 무더기를 보면, 아이들 백일에 정성으로 올리는 흰무리가 눈에 선하다. 조팝나무 꽃만큼 눈부시게 하얀 꽃도 없고 또 그만큼 청순한 향을 내품는 꽃도 없다. 조팝나무꽃이 그렇게 소박하면서도 풍요롭지만, 새순이 돋고 하얗게 꽃을 피울 때만큼 배고플 때도 없다. 그렇게 쌀이 귀하던 계절에도 어린 아이 백일을 맞으면 백설기를 한 시루 쪄서 마을 어른들을 불러 아기를 선보인다. 백설기는 흰무리라고도 하는데 주로 치성을 드리기 위한 것이었다. 대개 백일이나 첫돌에 벽사(辟邪)의 의미가 있는 수수팥떡과 함께 해서 액막이가 되었다. 또 칠월 칠석에도 고명을 넣지 않고 흰쌀로만 가루를 내어 시루에 백설기를 했다. 이른 봄이나 한여름 배를 주린 어린아이들에 대한 어른들의 자상한 배려였을 것이다.

 

산목련이 하얗게 무리지어 피어나는 날이나, 감꽃이 처녀 아이들 젖꼭지처럼 연한 갈색으로 피었다 질 때면 기주떡이 생각난다. 여인네 살결처럼 뽀들뽀들한 겉살에 석이, 흑임자, 대추, 밤, 빨강이나 노란 맨드라미꽃으로 고명을 올리고, 막걸리의 새콤한 향이 솔솔 풍기는 기주떡은 생각만 해도 코끝이 간질간질하다. 기주떡을 증편이라고도 하는데 이유는 쌀가루에 막걸리를 넣어 발효시켜 부풀어 오르게 해서 찌기 때문이다. 증편은 그 부풀어 오르는 정도가 떡의 성패를 좌우한다. 그래서 떡 중에 가장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기주떡 만드는데 옛날 나의 할머니께서 마을에서 가장 권위자이셨다. 그래서 회갑 잔치나 혼례식이 있을 때마다 할머니를 모셔 갔다. 덕분에 이 고급스런 떡을 자주 맛볼 수 있었다. 기주떡은 보통 봄부터 유월 유두에 이르기까지 먹는 것이 보통이다.

 

진달래가 온산에 붉게 불타오를 때나, 된서리가 내려도 뜨락에 국화꽃이 샛노란 빛으로 도도하면, 기름에 지짐질한 두견화전이나 국화전을 생각나게 한다. 찹쌀가루 반죽에다 봄에는 진달래, 가을에는 국화꽃잎을 얹어서 번철에 지진다. 불의 세기를 잘 맞추면 꽃 색깔도 예쁘거니와 고급스러운 향도 그만이다. 화전은 꿀이나 조청을 찍어 먹으면 일품이다. 대개 철에 맞추어 두견화전은 삼짇날에, 국화전은 중양절에 먹는 풍습이 있다.

 

찔레꽃을 보면 이른 봄에 먹던 쑥떡, 쑥단자 느티떡이 생각난다. 봄이 기울어 갈 무렵, 청보리바심도 아직 멀었는데 보리알이 통통하게 비어져 나오는 보리밭둑에는 찔레꽃이 하얗게 퍼드러졌다. 하얗고 소담한 찔레꽃 노란 꽃술에는 벌이 윙윙 거렸다. 대궁이 아직도 시퍼런 보리 이삭을 만져 보면 아직도 하얀 물만 터져 나와서 더욱 안타깝게 하였다. 이 때 쑥떡이나 쑥 단자를 먹었다. 쑥떡은 쑥을 넣어 절편을 만들거나 쌀가루보다 쑥을 더 많이 넣어 시루에 쪄낸다. 쑥단자는 쑥을 넣어 찐 찰떡에 삶은 팥으로 소를 넣어 단자를 빚어 만든 것으로 봄에 먹는 떡 치고는 고급이었다. 한식 때는 쑥떡을 먹고, 초파일에는 느티떡을 먹었다. 느티떡은 느티나무 새순을 따서 쌀가루와 섞어서 시루에 쪄낸다. 사십대 후반이나 오십대 이후인 사람들은 느티떡으로 주림을 에운 경험 대개 있을 것이다.

 

수국이 늦은 봄비를 힘겨워할 무렵, 떡판 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인절미 생각이 난다. 인절미는 설날 같은 겨울철이나 칠석 같은 여름철이나 언제나 먹었던 것이지만, 수국이 소담스러워질 때 더 생각난다. 인절미는 만드는 과정부터 소담하기 때문이다. 찹쌀을 쪄서 떡판 위에 올려놓고 떡메로 치는 모습만큼 흥겨운 것은 또 없을 것이다. 인절미는 찹쌀로만 만드는 게 아니라, 차조, 기장, 찰수수 등으로도 만든다. 인절미는 차지지만 소화가 잘되어서 여름철 일에 지친 농민들이‘골이 멘다.’고 한다.

 

초가지붕에 달이 떠오르면 하얗게 박꽃이 핀다. 이때는 오려 송편이 생각난다. 하늘은 한없이 높아가고, 별은 더없이 맑고 초롱초롱하며, 밤이슬이 점점 차가워지면 오려논에 벼이삭이 누릇누릇해진다. 그 벼를 베어 빚은 것이 오려 송편이다. 깨끗한 솔잎을 뽑아 켜켜이 쌓고 가마솥에 송편을 찌면, 솔잎이 익어가는 냄새와 함께 밤은 깊어 갔다. 송편은 참기름소금을 발라서 먹어야 제격이다. 또 솔잎을 떼지 않고 그냥 보관하면 오래 두어도 상하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나라 떡의 원형은 시루떡이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고사지내기를 손곱아 기다린 것은 바로 이 시루떡 때문일 것이다. 시루떡은 찰떡, 메떡, 수수떡이 있다. 여기에 호박오가리, 곶감, 대추를 넣기도 한다. 나는 호박떡을 제일 좋아했다. 찰떡을 먹으며 목이 멜 즈음 꿀맛 같은 호박고지가 달콤하게 씹히는 재미도 그만이었다. 시루떡은 구수한 무콩나물국과 곁들여 먹으면 정말 궁합이 맞았다. 또 그보다 더 시원하게 먹으려면 동치미 무를 얇고 기다랗게 썰어서 한 손에는 떡을 또 한 손에는 무를 들고 한입씩 번갈아 먹으면 초겨울 밤이 온통 행복해졌던 추억은 누구나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최근에 들어서 떡은 참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변모해 가고 있다. 맛도 좋고 보기도 좋은 떡이 새로운 모습으로 나오고 있다. 집에서 만드느라 법석을 떨지 않아도 얼마든지 맛있는 떡을 먹을 수 있다.

떡은 우리의 별식이며 간식이다. 또 먹거리라는 의미 이외에 의식에 빠져서는 안 되는 소중한 문화의 일부이다. 관혼상제의 의식, 명절, 백일, 돌, 생일, 회갑 등의 의식적인 행사에 빼놓을 수가 없었다. 또 이사를 한다든지, 아이들이 책을 떼었을 때 책거리 등 좋을 일이 있을 때마다 떡을 해 먹었다. 또 세시풍속으로 설, 대보름, 이월 초하루(奴婢日), 삼짇날, 한식, 초파일, 단오 유두일, 칠석날, 한가위, 중양절에는 때에 맞는 떡을 해서 나누어 먹었다.

 

이러한 풍습은 아직도 버리지 않고 있다. 그것은 누구나 떡을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나누기 좋아하는 후한 민족성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살림이 아무리 어려워도 삶의 진미와 가치를 아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들은 삶의 욕구는 강하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지나친 욕망만은 갖지 않았던 삶의 지혜였을 것이다.

(2004.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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