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포토에세이

7월의 일기

느림보 이방주 2006. 7. 8. 09:50

  2006년 7월 7일

 

 

  비는 내리지 않지만 하늘은 밝지 못하다. 공연히 기분이 침울한 출근길이다. 청주국제공항 쪽으로 차를 돌렸다. 오근장 육교에서 내려다보는 팔결 들판의 초록이 싱그럽다. 너른 들판의 논이 이제 ‘벼’로 불러줘야 할 만큼 포기를 벌었다. 지나는 계절의 변화가 초록처럼 선명하다. 오근장을 지나 외평리를 돌아 내수로 빠지는 외곽도로가 한산하다. 이미 숨을 거두어 깨끗하지는 못하지만 미호천이 흐름은 한가하다.

 

길가에 개망초가 하얗게 피어서 꽃길처럼 느긋하다. 길가 잡초들이 어느새 꽃을 피우고, 이미 그 싱그럽던 제 빛을 잃어 퇴색된 초록으로 가을을 준비하고 있는 모습이다. 무성하고, 억세어지고, 윤기를 잃었다. 개망초꽃도 6월의 윤기를 잃고 이미 퇴색되기 시작한다. 그런 개망초는 도로가에도 밭둑에도 마을로 들어가는 오솔길에도 하얗게 피어 농촌의 한적함을 더해 준다. 7월은 산야가 싱그러움을 빼앗겨 논밭보다 먼저 가을을 준비하는 계절인가 본다.

사진 : 들꽃 누리집(http://delta001.com.ne.kr/)

  모래재를 오르는 양쪽 산기슭 절개지에도 개망초가 무더기로 피어 있다. 고개를 넘으면서 쓸데없는 일로 흥분하여 내리막길에 설치한 속도 감시 카메라를 거의 100 가까이로 통과했다. 딱지가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논밭의 덕분으로 일어나던 기분이 또다시 꿀꿀하다.

 

터널 입구에 차들이 몰려 있다. 오르막길에서 피해 주었던 119구급차가 길을 가로막아 섰다. 거기 시드는 죽음이 있었다. 구급대원들이 피투성이 남자를 들것에 옮겨 차에 싣고 있었다. 지나며 바라보니 의지인지 반사인지 발을 약간 드놓는 것 같았다. 터널 입구는 아주 엉망이었다. 입구의 타일이 부서지고 콘크리트 조각이 널려 있다. 도로가에 설치된 보호대가 망가졌다. 자동차 부스러기가 입구에 너절하다. 백색 승용차가 쓰다 버린 연애편지처럼 구겨져 내동댕이쳐져 있다. 그 안에서 사람을 꺼냈을 것이다.

 

무섭다. 죽음이 무섭다. 죽음 이후의 모든 일이 내게는 너무나 무섭다. 죽는 이는 자신의 죽음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겠지만 우리에겐 죽음이 두렵다. 죽음은 결국 주변 사람에게 고통만 남기는 일이기 때문인가 보다.

괴산 읍내에서 몇 번인가 휘청거렸다. 부서진 자동차 잔해가 안경알에 묻어 지워지지 않고 거기까지 따라와 있었다.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눈감고도 달릴 수 있을 것 같던 34번 2차선 도로가 무섭다. 다른 차를 만나면 풀숲을 지나는 살모사 소리를 들었을 때처럼 움찔한다.  

 

커피를 마신다. 물이 식었는지 밍밍하다. 출근하면 늘 마실 수 있었던 따끈한 커피가 그립다. 버리고 다시 타서 마시고 싶다. 창가에 서서 희양산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이렇게 마시는 나를  ‘황제의 커피’라 했던 것을 까맣게 잊었다. 희양산 뿐 아니라 보이는 산마다 언젠가는 내가 돌아갈 곳으로 보여서 가슴 아프다.

 

일상으로의 탈출구를 찾는다. 컴퓨터를 켜고 학교 홈페이지를 띄운다. 유로가 모방시를 올렸다. 만해 선생의 나룻배와 행인을 배우면서 과제를 주었는데 시험 기간 중인데도 참지 못하는 유로의 성급함이 미소를 짓게 한다. “당신은 연필 나는 종이”, “당신이 내 몸에 상처를 내자 나는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상처 받음으로써 ‘의미 있는 삶’이 된다는 중학교 2학년인 그의 사고가 기특하다. 세상 모든 것이 상처 받음으로써 다시 태어난다는 원리를 그 녀석은 이미 알고 있을까?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했던 종이가, 연필이 내는 상처를 받음으로 하나의 ‘의미를 지닌 생명’이 된다는 말이 단순한 이야기 같지 않아 가슴 아프다. 올봄에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시작도 끝도 없는 개구쟁이였던 제 모습을 버리고, 갑자기 어른 같이 의젓해 보이는 녀석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어린 나이로 감당할 수 없는 상처가 아닌가?

 

일상으로 탈출하고자 하는 시도는 결국 더 공포의 현실로 떨어지는 결과를 가져오고야 말았다. 죽음은 그렇게 바로 발 아래에 와서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죽는 순간 우리는 죽음을 감각할 수 없다.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우리는 죽음의 그 엄청난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주변 사람들에게 너무나 큰 충격과 아픔을 남기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은 더 두려운 것이다.

 

나는 몇 마디 댓글로 또다시 평정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내던져진 백색 승용차 위에 자꾸만 속눈썹 긴 커다란 눈이 겹쳐진다.

 

도서실에 갔다. 아무렇게나 쌓인 책을 서가에 정리하고 버릴 것들을 마대에 담아 놓았다. 거기도 죽음이 있었다. 죽어가는 인쇄물이 안쓰럽다.

교장 선생님이 자나다가 정리되는 도서실의 모습에 흐뭇해 했다. 열 여섯 소녀처럼 사탕을 한 알 준다. 그런 여교장선생님의 사탕 한 알이 갑자기 귀엽다. 입에 넣으니 달콤한 맛이 혀에 감긴다. 나는 잠시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났다.

그렇구나. 사탕 한 알로 세상이 바뀔 수 있구나.

(2006.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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