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아지는 은총의 햇살
빛이 거기에 있었다. 내가 찾는 햇살은 꽃지에 있었다. 안면도는 왜 안면(安眠)일까? 편안하게 잠드는 섬이란 말인가? 그렇게 하면 햇살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는 말처럼 생각되었다. 꽃지의 바닷가를 거닐며 그런 생각을 했다.
꽃지 하늘과 물이 만나는 그 너른 모래 마당에 하늘이 열렸다. 햇살이 표백한 옥양목 휘장처럼 바다 위에 내리비친다. 금방이라도 구름 사이에 신이 그 거룩한 얼굴을 내밀듯하다. 하늘이 열렸다. 은총의 빛이 쏟아진다. 일렁이던 물이 잠잠하다. 갈매기들이 머리를 물에 파묻고 신의 처분을 기다린다.
하늘은 온통 검은 구름인데 미켈란젤로가 '천사의 설계'라고 극찬했다는 빤데욘 성당의 하늘로 통하는 돔의 통로처럼 구름이 열렸다. 거기서 한 아름 하늘의 빛이 쏟아진다. 바닷물은 수많은 고기떼가 수면으로 나와 수중 발레를 하는 것처럼 은빛 향연의 무도장이다. 하늘에 갈매기 한 마리가 바람에 날리는 검은 손수건처럼 빛살 사이로 유영한다. 소금물에 절은 모래 마당까지 유리알처럼 빛을 반사한다.
겨울은 계절의 끝이란다. 그 끝자락에 내가 와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그냥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다. 계절의 끝은 봄을 잉태하기 때문이다. 생성과 소생의 봄을 말이다. 바람 불고 손 시린 이 겨울이 가면 내 안에도 새로운 철학이 생성할 것으로 아직은 믿고 있다. 그래서 겨울 바다에 이렇게 햇살을 내려주는 것이다.
바다는 또 뭍이 끝나는 곳이란다. ‘땅끝’이란 마을도 있다. 그 마을에 갔을 때 이름 때문에 절망감을 느낀 적도 있다. 나는 뭍의 끝이라기보다 물의 시작이라고 말하고 싶다. 뭍이 끝나면 물이 시작되는 것이다. 뭍은 우리가 살고 있지만 물에는 또 다른 생명이 살아간다. 서로의 끝이고 서로의 시작이다. 겨울 바다는 묘한 만남의 장소이다. 그래서 신은 이 겨울 바다에 은총을 내리는가 보다.
안면도 꽃지의 바다, 쉰여섯의 나와 내 친구 여기에 와 있다. 여기 와서 서성인다. 소주 한잔에 얼굴이 불콰해져서 이 바닷가에서 우리의 겨울을 바라본다. 우리의 바다를 바라본다. 그리고 우리는 뻥 뚫린 하늘을 향하여 포효하고 싶다. 피토하듯 침묵의 말씀을 토하고 싶다. 우리에게도 저렇게 빛은 쏟아지지 않는가? 봄의 빛, 생명의 빛, 생성의 빛이 말이다. 시작의 길, 출발의 길, 소생의 길이 말이다. 은총의 햇살이 쏟아지지 않는가?
우리는 거울처럼 반짝이는 모래 마당을 걸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닷물에 쓸려 다져진 모래 마당은 엷은 발자국밖에 내지 못한다. 그러나 그 엷은 자취도 지나간 우리의 역사처럼 이내 사라진다. 갈매기 서너 마리가 햇살을 가르고 하늘로 비상한다. 하늘은 계속 햇살을 쏟아 붓고 있었다.
어둠에 반사하는 빛에도
여린 생명은 나래를 편다.
까맣게 나래를 편다.
그래 그렇게
서 있는 거야.
그래 그렇게
바라보는 거야.
그래 그렇게
은총의 햇살을 받는 거야
파도가 밀려와도 우리는 어쩔 수 없어.
바람이 불어도 우리는 어쩔 수 없어.
그래 그렇게
서 있는 거야.
바다는 더할 수 없는 빛의 향연을 끝내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말없이 그냥 서 있었다. 해가 저물어갈수록 햇살은 더욱 붉어지고 바닷물의 홍조는 짙어만 간다.
뭍, 바다, 하늘
(2007. 1.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