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포토에세이

보이지 않는 색

느림보 이방주 2006. 3. 5. 09:29

목련에 숨어 있는 색(2005. 4. 5.)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나를 두렵게 한다. 왜냐하면 나는 아는 것 밖의 영역은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 해 찍은 사진을 뒤적거리다가 깜짝 놀랐다. 막 벙그는 목련의 사진에서 비색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사진은 작년 한식날 시골집 마당에 막 피어나려는 목련을 찍은 것이다. 목련은 그냥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순백으로만 생각해 온 내가 얼마나 무지한가를 깨닫는 순간이다. 목련의 봉오리에서 흰색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노랑도 아니고 연두 빛도 아닌 그 사이의 색깔이다. 게다가 꽃받침에만 솜털이 나 있는 것으로 나의 관찰을 끝냈었는데 꽃잎에도 자잘한 솜털이 봄 햇살을 받은 성에꽃처럼 반짝이고 있다.

 

너 자신을 알라.

이 말은 나의 무지함을 알라는 말이었다. 너의 무지함을 알라. 정말 두려운 말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아는 것만큼만 보이기 때문이다. 무지로써는 보이지 않는 세상 너머를 심안(心眼)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무지로써는 육안(肉眼)으로 보이는 것도 다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지로써는 도저히 영적(靈的)인 앎의 세계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자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정으로 아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아는 것을 안다고 하기보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기가 더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이미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무지는 목련은 백색일 것이라는 막연한 앎을 가지고 그저 순백의 아름다움의 정지에만 몰두한 것이다. 비색이 있는 줄을 모르고 순백에만 집착하면서 어떻게 ‘모른다.’라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깨달음으로 아는 것이 진정 아는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이다. 이것은 앎에 대한 궁극적인 정의라 생각한다. 이렇게 보면 내가 배움에 목말라 했다는 것이 얼마나 거짓이었나를 반성한다. 앎은 배움으로 아는 것도 있지만 관찰해서 아는 것도 있고 깨달음으로 아는 것도 있다는 말씀이다. 이것은 앎의 여러 갈래를 말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궁극적 앎에 도달하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곧 완전한 앎은 깨달음의 앎이라는 말이다. 나는 배운 것을 얼마나 다시 관찰하고 사색하여 새로운 진리의 깨달음에 이르는가를 반성해 본다. 목련꽃 봉오리의 비색을 보면서 말로만 배움을 추구한다던 나 자신을 아프게 되돌아본다.

 

연속적인 색깔인 무지개 색을 빨강부터 보라까지 일곱 가지 색으로 불연속적으로 정의하고, 그런 언어를 비판 없이 배우고, 생각 없이 가르쳐온 과거가 부끄럽다.  부처님의 말씀대로 그것은 관찰도 사색도 없는 앎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깨달음의 앎이 아니기 때문이다.

환경 보호 운동가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수많은 동식물에는 인간이 발견하지 못한 수많은 물질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생태계에서 사라지는 생물들의 몸속에도 인간이 아직 발견 못한 물질이 숨어 있기 때문에 안타까운 것이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색깔들이 숨어 있는가? 작은 목련꽃 봉오리에도 이런 비색이 숨어 있는데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진리가 숨어 있는 것인가? 내가 아직 보지 못한 채 숨어 있는 색은 어떤 것일까? 숨어 있는 진리는 또 무엇인가? 무지를 모르고 앎을 과시하고 떠들어 댄 자신이 부끄럽다.

 

너 자신을 알라. 너 자신의 무지를 알라.

목련꽃 봉오리 사진에서 숨어 있는 비색을 발견하면서 나는 나의 무지가 소름끼치게 두렵다.

(2006.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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