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포토에세이

하늘 그림자

느림보 이방주 2006. 4. 19. 03:17

하늘 그림자   (어느 사진 예술가 제공)

 

 

  만해 선생의 시집 <님의 침묵>을 읽었다. 서시에 해당되는 군말에 머리를 치는 듯 시구(詩句)가 새롭다. 과연 선인의 해타(咳唾)는 시공을 초월해 오늘을 깨우친다.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 한용운 <님의 침묵> 군말에서 -


문득 핑크빛 넥타이를 매고 거울을 본다. 남달리 아직도 검은 더벅머리가 자연 그대로다. 잿빛 윗옷의 단정함에 핑크빛 넥타이가 그 원숙함을 얹는다. 주름살도 없는 얼굴에 넥타이가 핑크빛 그림자를 던진다. 얼굴에 윤기가 자르르 흐른다. 금테 안경에 핑크빛이 반사한다. 거기에 요즘 유행하는 뿔테 안경이라도 걸치면 한결 더 젊어 보이겠다는 생각을 한다. 젊다. 누가 이 얼굴을 지명(知命)이라 하겠는가? 멋있다. 정말 멋있다. 노신사가 아니라 젊고 활기에 넘치는 사나이다. 나는 거울공주가 아니다. 거울공주가 아니라도 내가 보는 나는 정말 싱싱하고 멋지다.  

 

내안에서 겨울을 난 버마재비가 사색의 거울 위에 날아든다. 버마재비는 특유의 세모대가리를 갸우뚱거리며 튀어나온 두 눈깔을 빙글빙글 돌린다. 아직도 멀쩡한 도끼다리를 번쩍 들어 당랑권법으로 사위를 제압한다. 나의 핑크빛 넥타이를 바라본다. ‘히, 주책이구만. 당신 처지를 알아야지. 어울리지도 않는 것을……. 당신이 도대체 몇 살이냐?’ 버마재비의 비아냥거림이 들리는 듯하다. 거울에 붙어선 녀석은 180도까지 돌아가는 유연한 모가지를 이리저리 돌리기도 하고, 세모대가리 모서리에 튀어나온 눈깔을 굴리기도 하면서 제 모습을 본다. 아마 제 모가지에도 핑크빛 넥타이를 매보는 모양이다. 갑자기 날개를 쫙 펴더니 배때기를 들고 일어선다. 꼬리를 거울에 붙이고 몸을 한번 좌우로 휘둘러 보인다. 제 모습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저도 제가 보는 제 모습이 멋지게 보이는 모양이다. 정말 웃기는 녀석이다. 제 꼴에 무슨 폼을 잡고…….  

 

아, 이렇게 내가 보면 내가 멋있고, 버마재비가 보면 버마재비가 멋있다. 내가 보는 나는 버마재비가 보는 나가 아니다. 버마재비가 보는 버마재비는 내가 보는 버마재비와는 다르다.  

 

벚꽃이 진다. 지는 벚꽃을 바라본다. 벚꽃에게 화사했던 계절은 가고 잔바람에도 부르르 떨리며 스산한 꽃잎을 거리에 날리는 낙화의 계절이 돌아온 것이다. 만해 선생이 말했듯이 ‘꽃은 지는 꽃이 아름답다.’ 그야말로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 속에서 우리는 꽃의 죽음을 바라보며 새로운 결실을 기다린다. 그래서 꽃은 지는 꽃이 아름답다.  

 

내 안에 살아 있는 버마재비에게도 지는 벚꽃이 아름답게 보일까? 버마재비의 세모대가리에 튀어나온 눈깔로도 아름다움을 보고, 배통만 있는 그의 빈약한 가슴으로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까? 버마재비가 보는 아름다움의 기준은 무엇일까? 그의 눈에는 화사하게 만발한 벚꽃만이 아름다운 것은 아닌가? 아니면 지고 난 뒤의 보랏빛 잎사귀가 오히려 아름다울까?

 

내가 바라보는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내가 아름다움이라고 이름 지은 것은 무엇일까? 내가 보는 아름다움은 버마재비가 보는 아름다움과 다르다. 버마재비가 보는 아름다움은 내가 보는 아름다움과 다르다.  

 

어느 사진작가의 작품 <하늘 그림자>에서 연밥에 비친 하늘을 본다. 눈알을 수없이 늘어놓은 것 같은 연밥의 수정체마다 하늘 그림자가 박혀 있다. 하늘은 하얗게 빛나고, 구름이 있고, 구름 속에는 여린 태양도 있다. 또 거기에는 번쩍 손을 든 사람의 검은 그림자가 있다. 그림자의 주인이 누구이든 상관은 없다. 다만 그것은 누군가 자신을 비쳐 본 것일 뿐이다. 진흙을 뚫고 물 위에 떠올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초탈한 모습에 자신을 비춘 것이다. 우주의 바탕인 하늘의 그림자도 비쳐지는 각도에 따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다양하다. 역시 보이는 것은 바라보는 사람의 인식의 그림자이다. 

 

사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나의 그림자일 뿐이다. 내가 인식하는 세상은 내안에 이미 자리한 세계일 뿐이다. 내 안에 이미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결정지운 것을 그리고 있을 뿐이다. 나는 결국 나의 그림자밖에 보지 못한다. 나의 인식의 그림자를 보고 그것을 대상의 참 모습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대상을 대상으로 보지 못한다. 다만 내가 그리워하던 것들, 곧 나의 그림자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이미 쌓여 있는 인식의 유리창을 통해서 대상을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게 보이는 세계는 나의 인식의 그림자이다.  

 

나의 그림자는 때로 진실로 나의 인식의 창일 수도 있고, 때로 내 안에 기생하고 살아 있는 버마재비가 가로막은 허상의 창일 수도 있다. 나는 내 안의 버마재비를 막지 못한다. 버마재비가 나의 창에 싸놓은 오줌을 닦지 못한다. 버마재비의 당랑권법의 위용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 그래서 때로 나의 인식은 진정한 나의 그림자가 아니라 악마 같은 버마재비의 그림자일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그림자를 세상의 모습으로 착각한다. 그러므로 때로 세상을 보고 있는 자신이 버마재비일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습도 남에게 수없이 다른 모습으로 비쳐질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나도 언제부터인가 나의 가슴에 버마재비가 들어 앉아 나의 그림자를, 나의 창을  흐리고 있다. 그래서 내 가슴에 비친 하늘 그림자도 하나가 아니다. 아, 나에게는 하늘 그림자만이라도 하나뿐이었으면 좋겠다.

(2006. 4. 18)

* 사진 설명

연꽃이 지고 맺힌 열매이다. 연밥, 연자, 연실이라고도 한다. 마치 세상을 향하여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작은 눈알마다 하늘의 그림자가 가득하다. 가만히 들여다 보면 손을 번쩍 든 사람도 있다. 각기 다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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