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포토에세이

노을빛 무늬

느림보 이방주 2006. 1. 27. 06:44

 

대청호의 노을빛 무늬 (무마클 쉼터에서)

 

무마클 쉼터에서 바라보는 노을이 아름답다. 흐릿한 저녁 안개 낀 하늘에서 호수로 내리비치는 노을은 노년의 향기처럼 은은하다. 쉼터에서 바라보면 호수 건너 70년대의 그것처럼 울긋불긋한 지붕들이 조용히 들어앉은 마을이 보인다. 마을을 안고 있는 거뭇한 산줄기를 타고 흐릿한 안개 속으로 노을이 넘어 온다. 노을빛은 바람 한 점 없는 잔잔한 수면에 부딪쳐 반사한다. 수면에 반사되는 노을빛이 수천 마리의 물고기비늘에 내리는 달빛처럼 은빛 몽환적 무늬를 이룬다.

 

저녁 무렵의 노을이 이렇게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줄 몰랐다. 저녁노을은 그저 하늘과 땅의 경계인 검푸른 능선을 타고 꼭두서니빛으로 타오르는 것으로만 생각했었다. 그렇게 화려하게 타오르던 노을도 한 순간, 시간이 지나면 산 너머로 넘어가면서 숨을 거두는 것만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오래된 가구에서나 느낄 수 있는 화려하지 않은 수택의 노을빛 무늬를 여기서 바라본다. 수면에 비친 노을은 저편 먼 호숫가에서는 검푸르다가 호수를 건너 이 쪽 호반으로 가까워질수록 은빛으로 빛난다. 노을에도 무늬가 있고 그 무늬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고한 빛을 지니고 있음을 처음 본다.

 

나는 노을이 비친 호수의 물빛 무늬를 보면서 문득 우리네 삶의 노을을 생각한다. 인생에서 저녁노을은 어디쯤에서 시작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어떤 것일까? 시간이 지날수록 어둠은 짙어가고, 어둠이 짙어갈수록 더욱 은빛으로 찬란하게 반짝이는 저녁노을빛을 보면서 인생의 저녁노을빛을 생각한다. 나에게도 저녁노을은 다가오고 있을까? 나의 삶으로도 이런 빛깔의 노을을 지어낼 수 있을까? 내 삶으로도 이렇게 찬란한 무늬를 지을 수 있을까? 내 인생의 저녁에도 이런 고기비늘에 비치는 달빛처럼 몽환적인 무늬가 있을까? 이런 끊임없는 의문으로 호수를 바라본다.

 

호수 건너 산그늘이 검은색 무대의상 같은 실루엣이 되어 호수를 건너온다. 검은 치맛자락은 반짝이는 수면을 휘휘 저으며 비늘무늬를 덮는다. 검은색 산 그림자가 얼룩진 모습으로 휘휘 물을 저으며 은빛 비늘무늬를 더욱 찬란하게 발산한다. 나에게는 어떤 그림자가 있을까? 내 삶의 그림자는 어떤 무늬를 만들면서 나의 내면의 강을 건너올까? 나는 지금까지 어떤 무늬를 만들면서 오늘에 이르렀을까?

 

저녁노을빛이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면서 밤을 맞이하듯이 노년의 삶도 이렇게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면서 밤을 맞이하는 것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늘과 땅이 하루를 평온하게 지낸 끝에 이렇게 아름다운 노을빛 무늬를 만들었듯이 젊은 날의 삶의 여로가 노년의 노을에 되비쳐 그 모습대로 무늬를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갑자기 인다.

 

나의 삶은 어떤 무늬를 마련해 놓았을까? 그 무늬는 너무 찬란하지도 않고 너무 너절하지도 않은 그런 노을이었으면 좋겠다. 꼭두서니빛으로 화려하게 불타다가 순식간에 숨지는 노을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잔잔한 물빛에 은빛으로 빛나는 조용한 무늬였으면 좋겠다. 아니 노을빛 무늬 속의 세계를 함께 걸을 수 있는 그런 나였으면 좋겠다.

(2006.  1. 25.)


* 무마클 쉼터(무심천마라톤클럽 쉼터)는 문의에서 구룡리, 산덕리, 소전리를 거쳐 후곡리 대각사를 지나면 마을이 사라진지 오래된 비포장도로 가에 있다.

'느림보 창작 수필 > 포토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빛을 건지는 사람  (0) 2007.01.23
7월의 일기  (0) 2006.07.08
하늘 그림자  (0) 2006.04.19
보이지 않는 색  (0) 2006.03.05
원시의 빛  (0) 2006.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