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5일 한가위 이튿날이다.
친구 연선생과 백화산 정상에 올랐다. 1060m 정상에서 바라보는 세계는 이제 막 구름이 걷히기 시작한다. 억새가 여기저기 바람에 날리며 어느덧 가을도 지나가는 듯했다. 그러나 땀은 지독하게 흐른다. 멀리 문경 쪽을 바라보면서 한 20분을 보냈다. 아예 가방을 내려 놓았다.
가져온 컵라면에 물을 붓고 기다렸다. 그 때 전화가 운다. 받으니 어떤 사십대 여인이 "선생님---어쩌구" 두어 마디 하더니 끊어진다. 또 운다. 또 끊어진다. 세 번째 울더니 이내 그만이다. 정상에서는 대개 터지는데 오늘은 이상하다.
그런데 조금 후에 문자메시지가 왔다.
"선생님 저는 의풍학교 다닌 김영옥인데요. 아버지는 김종갑이고요. 연락 주세요. 꼭요."
의풍에 근무할 때 마을 사람 중에서 가장 절친하게 지내던 김종갑씨 딸 영옥이다. 그 애가 초등학교 3학년 땐가 이별을 했다. 무슨 일인가 안부 전화겠지. 그러나 이렇게 급히 애타게 찾는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산행은 좀 길다. 적어도 여섯 시간은 걸어야 할 것이다. 연풍면 분지리 안말에서 흰두메를 올라 황학산을 거쳐 백두대간 마룻금을 밟아 백화산에 이른 것이다. 여기서 다시 사다리재를 넘어 곰틀봉 이만봉을 지나 도막으로 내려와야 한다. 그러나 분지에 내려서도 전화는 터지지 않을 것이다. 연풍 소재지에 나가야 전화가 터진다. 목숨이 달린 일은 아니겠지. 우리는 비단처럼 포근한 백두대간 산 마루 길을 운치있게 걸었다.
도막으로 내려오는 길이 가파르다. 돌길이다. 군데군데 나무가 가로질렀다. 무릎이 그냥 나갈 것만 같다. 쉬지 않고 내려왔다. 영옥이가 찾는 이유가 궁금했다. 네시도 안됐는데 어둑하다. 서둘렀다. 무릎이 부서지는 기분이다.
안말에 도착해서 이장님에게 다녀 감을 신고했다. 캔 커피 두개를 준다. 고맙다. 시골 인심이다. 연풍면 분지리 인심이다. 시원하다. 속이 온통 차갑게 냉각되는 기분이다. 냇물에서 세수하고 발을 씻고 서둘러 연풍으로 나왔다.
주진리쯤 와서 전화를 했다. 터졌다. 영옥이가 제 얘기를 한참 한다. 저도 사십이 넘었다고 한다. 그래도 나는 초등학교 2,3학년 애기로 생각된다. 전화를 한 이유는 제 고모인 김순덕이 독일에서 추석을 쇠러 왔다는 것이다. 그 애가 나를 찾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빨리 전화를 바꿀 것이지.
전화를 끊고 기다렸다. 금방 순덕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독일에 건너갔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나는 그애가 그렇게 엄청난 노력을 해서 그렇게 제 뜻을 이루고 사는지는 상상도 못했다. 독일에 건너가 의과 대학을 나와서 의학 박사 학위를 받고 어느 병원(SPITAL WALDSHUT)의 심장 내과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네가 고입 검정에 합격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내가 단양여고에 근무할 때 그 오빠 김종갑씨가 찾아왔었다. 그 때 그 얘기를 들었다. 독일에 건너가서 공부 중인데 종종 학비를 보내주느라 형편이 말이 아니다라며 걱정 겸 자랑겸 했었다.
독일에서 찾아온 제자 김순주 박사와 내 자리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그렇게 똘똘한 아이들 몇이 중학교에 가지 못하는 것이 자칫하면 중학교 진학을 못할 뻔 했던 내게는 예삿일이 아니었다. 나는 야학을 열었다. 약 40명 정도의 시골 청소년들이 모였다. 내가 스물세 살 때였는데 제일 나이 많은 사람은 스물두 살쯤 되었을 것이다. 야간에 하루 네 시간을 수업하면 젊은 나이에도 이튿날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그게 꼭 해야할 하는 일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당시는 군화 소리 요란한 차가운 시대라 그 일로 경찰의 조사도 받고, 군 교육청에 불려가 질책도 받았다. 그러나 굽히지 않았다. 나는 그 일이 지금도 후회되지 않는다. 당시 지방 신문에서는 내 일을 아주 작게 기사화하면서 자신의 본분을 벗어나 엉뚱한 일을 하는 것으로 평했다. 그러나 부끄럽지 않았다.
야학에 모인 청년들에게 "세상은 여기만이 아니라 베틀재 너머에도 있다."라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내가 그런 말을 했었던가?
"선생님의 가르침이 오늘날 바탕이 되었어요. 길을 열어주신 거지요."
사실 옛 선생을 만나 할 수 있는 의례적인 말이다. 그러나 어떤 선생이든지 제자로부터 그런 말을 들으면 참말로 믿고 싶은 것이다. 정말 그런 것으로 생각하고 싶다. 나도 그렇다. 그러나 그건 항상 의례적인 말일 뿐이다. 그래도 나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에 대한 반가움보다도 어떻게 그렇게 지독하게 살 수가 있을까하는 제자에 대한 경이로움 때문이었다.
순덕이 전화를 받고 그가 무작정 독일로 건너가서 얼마나 고생을 하면서 살았을까 생각하면서 그 날 저녁 가슴이 뛰어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한 3년을 큰집과 작은 집으로 뛰어다니면서 밥을 해먹었다. 농사철이 되면 뒷 심부름으로 더 바빠 보였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자신 만만하고 발랄했던 그 아이 얼굴이 어두워진 이유를 나는 알고 있었다. 그렇게 따르던 나를 피하기만 하고 밝지 않았던 어린 그의 모습이 안쓰럽게 떠올랐다.
9월 16일 그에게서 전화가 다시 왔다. 아무래도 한 번 만나고 독일로 건너가야 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서울 언니 집에 머물고 있는데 청주로 찾아 온다고 한다. 나도 사실은 만나고 싶었지만 바쁜데 뭘 그러느냐면서 만류했다. 그러나 선생님께 폐가 되지 않는다면 온다는 데에는 더 말릴 수가 없었다.
9월 17일 12시 10분, 독일 사람처럼 정확하게 약속 시간을 지켜 교무실로 들어왔다. 꽃을 한아름 안고. 점심 시간이라 교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기 같은 여선생님 한 분이 있다가 차를 타 주었다. 사진도 찍어 주었다. 나는 25년을 독일에서 산 그를 위해 양식 집으로 안내했다.
중학교는 검정으로, 고등학교는 더 어렵게 졸업하고, 국민대학교에 입학해서 1년을 다니다가 유학생 시험에 합격하여 독일로 건너가 의학을 공부하여 오늘을 이루었다고 한다. 나는 그의 눈가의 주름살이나 나보다 잔주름이 많은 목덜미를 보면서 독일에서 공부하는 동안의 어려움을 더 묻지 않았다. 이제 연간 30일의 휴가를 마음대로 쓸 수 있고, 독일의 고속도로인 아우토반을 시속 180km로 달릴 수 있는 자동차를 가지고 있으며, 심장내과 과장이고 의대에 출강하는 심장의학계의 석학이라고 한다. 그런 이야기만을 나누면서 짧은 1시간을 보냈다.
그는 이미 한국인이 아니다. 독일 국적이다. 이름도 김순주로 바꾸었다. 25년을 남의 나라에서 살아서인지 말도 어눌하다. 나와 만나면 걱정을 듣지 ㅇ낳기 위해서 며칠을 두고 우리말 연습을 했다고 한다. 나이도 마흔 여덟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나는 그가 초등학교 때처럼 아이로만 보였다. "김박사"하고 불러야 한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지만 저절로 "순덕아" 이렇게 나왔다. 얼굴 모습이 그대로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내가 그렇게 부르면 그는 고향 마을에 간 것으로 착각한다고 했다.
나는 요즘 이렇게 경이로운 제자들을 만난다.
그래서 지금 만나는 아이들이 또 무섭다.
순덕이는 아니 김순주 박사는 더 무섭다. 그런데도 그는 35년전 의풍초등학교 교사였던 나의 오늘의 모습이 더 무섭다고 한다.
나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 무섭다. 그런 생명력이 두렵다.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꾸준히 정말로 피나는 노력을 하는 그런 이들이 존경스럽다.
김순주 박사가 된 순덕이. 정말 존경스러운 제자이다.
(2008. 9. 17.)
http://blog.naver.com/nrb2005(느림보 이방주의 수필 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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