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서리와 햇살(교단)

사과 향기 속에서 책 읽는 엄마들

느림보 이방주 2007. 12. 8. 08:02
 하늘이 종일 울상이더니 오후 들어 눈이 흩날리기 시작한다. 눈에 보일 듯 말 듯한 눈송이가 온 하늘을 부옇게 흐려 놓는다. 그런가 싶더니 금방 산아 하얗다. 교정의 정원수에도 하얗게 눈꽃을 피웠다. 커피 한잔을 들고 유리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본다. 눈은 아직 그칠 생각이 없다. 이제 산인지 하늘인지 분간할 수 없다. 천지가 한빛으로 하얗다.

 

교문 앞 느티나무 아래 미끄러지듯 승용차 한 대가 들어온다. 아이들을 데리러 오겠지 했는데, 바로 현아 엄마가 연구실에 들어선다. 손에 보온병을 들었다. 다른 손에는 한참 전에 도서관에서 대출해간 공지영의 <착한 여자1, 2>를 들었다. 무슨 책을 읽는 게 좋겠느냐고 해서 내가 골라 주었던 책이다. 학부모들은 한 번에 두 권씩 대출할 수 있도록 대출 환경을 입력시켜 두었다.

 

우리는 현아 엄마가 가져온 따끈한 생강차를 마시며 가끔씩 눈 내리는 밖을 바라보았다. 생강차는 커피보다 향이 진하다. 그녀는 자신이 읽은 <착한 여자>의 이야기를 한다. 그런 것이 바로 책을 읽는 보람이다. 나는 가끔 거드는 듯하면서 문학의 원론적인 이야기를 섞었다. 그러면 사십대 초반인 그의 눈이 반짝 빛난다. 천재의 일갈에서 잃었던 자아를 발견함까지는 아니라도 내 말에서 얻는 것이 있다는 신호다. 그녀는 영락없는 열여덟 문학소녀로 돌아간다. 나는 그런 그의 눈빛을 놓치지 않는다. 너무 깊은 이론은 금방 그녀의 자존심이 상하게 한다. 그냥 살아가는 이야기하듯, 이웃집 아저씨가 거친 손으로 소나무 등걸을 톱질하듯, 손가락 굵은 시골 아줌마가 끓는 물에 수제비 뜨듯, 그렇게 슬쩍슬쩍 비친다. 재미있어 호호 웃는다. 그렇게 하면 생강차 수업료는 그렇게 비싸지 않은 게 된다.

 

얘기가 재밌어도 현아 엄마는 집이 궁금하다. 나도 하던 일로 돌아가고 싶다. 슬쩍 책을 또 빌리셔야지 하고 권해 본다. 미안하지만 반가워하는 눈치다. 도서관 열쇠를 들고 도서관으로 간다. 이번에는 박완서의 <저문 날의 삽화>와 공지영의 <고등어>를 골라 주었다. ‘읽고 싶은 책을 쏙쏙 빼 주시니 안 올 수가 없어.’ 하면서 무엇이든 자꾸 묻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도 미안해한다. 나는 한없이 그들에게 일러 주고 싶지만 또 내 할 일이 있다. 그게 안타깝다. 현관에 와서 머뭇거리는 그녀에게 얼른 먼저 허리 굽혀 인사를 했다. 눈이 마구 쏟아지는 교정을 지나 교문을 나선다.

 

우리 학교는 작년에 도서관을 리모델링했다. 아이들이 80명밖에 안되는 작은 학교에 4천만 원이나 투자한 도서관이 아깝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책 읽는 학부모 모임이다. 책 읽는 학부모 모임을 조직하려고 희망을 받아 보니 65명 학부모 중에 20명이다. 모두 회원이 되었다. 회원들을 따로 모아 독서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으나 나나 그 분들이나 시간이 없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어머니회 여는 날 따로 모여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에 쫓기는 농촌의 엄마들은 그 짧은 시간도 불안하다. 어떤 분은 그렇게 바쁜 중에도 학교 책을 빌릴 수 없느냐고 한다. 반갑다. 정말 반가웠다. 책을 읽고자 하는 시골의 엄마들이 있다는 게 정말 반가웠다. 그래서 자녀 이름으로 대출을 했다. 그리고는 곧 책 읽는 학부모회 회원 20명을 DLS(digital library system)에 등록했다. 처음에는 대출이 몇 사람으로 한정되더니 조금씩 늘어난다. 자녀의 이름으로 대출하기도 하고, 자신의 이름으로 대출하기도 한다. 한번이라도 자녀의 이름으로 대출하는 이들은 즉시 DLS에 등록하고, 대출 카드를 만들어 도서관에 비치했다. 학부모회의에 참석한 엄마들이 도서관에서 자신의 대출 카드를 발견하고 신기하게 생각했다. 대출도 조금씩 늘어났다. 그러나 시설이나 장서량에 비해 매우 미미하다.

 

생각 끝에 나는 인터넷에 책 읽는 학부모 모임 카페를 개설했다. 인터넷을 할 수 있는 엄마들 몇 분이 회원으로 가입했다. 그리고 거기서 조금씩 독서의 감상을 서로 공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여의치 않다. 우선 인터넷을 할 줄 모르니 자녀들을 통해서 카페에 들어와야 하고, 저녁 늦게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피곤으로 곧 쓰러진다. 어떤 엄마는 사과밭에서 일하다가도 쉴 때마다 조금씩 읽는다고 해서 나를 감동시켰다. 그렇게 한 해가 갔다. 금년에는 독서 교육도 몇 번 했다. 물론 학부모회의 하는 날을 시간을 조금 얻어서 할 수 밖에 없었다.

 

가을에는 자녀와 엄마가 함께 하는 독후감 발표회를 기획했다.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시도해 보는 마음에서다. 한 달여를 기다려도 카페에 독후감이 올라오지 않는다. 독후감을 쓸만한 몇 분에게 전화를 걸었다. 모두가 숙제처럼 마음속에 걸고 다닌다고 한다. 한두 분이 독후감을 이메일로 보내 왔다. 나는 카페에 올렸다. 그래서 5명을 선발하여 아이들 5명과 함께 독후감 발표회를 가졌다. 매우 훌륭한 작품을 보내 온 분도 있었다. 생각보다 성황이었다.

 

그 후 대출이 눈에 띠게 늘어났다. 독서의 중요성보다도 그냥 재미로라도 엄마들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완전한 인간은 세상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독서만큼 짧은 시간에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제공해 주는 매체도 없다. 독서만큼 이성적인 사고를 찾아가는 지름길도 없다. 독서만큼 상상의 나래를 활짝 펴게 하는 것도 없다. 지식정보화시대인 오늘날 독서의 질과 양은 곧 자기 발전의 정도를 가늠해 주는 척도라고 생각할 수 있다.

 

삶의 질 향상에 따라 평생에 걸친 교육기회가 확대되고, 일반 교양교육과 전문교육의 조화와 균형이 요구되는 오늘날에는 평생학습을 일환으로라도 독서는 매우 중요하다.

 

올바른 가치관의 형성을 위해서든, 건전한 여가 선용을 위해서든, 연풍의 엄마들이 사과나무 그늘 아래에서 책 읽는 모습을 그려본다. 그런 평생 학습의 아름다운 모습이 사과향기처럼 이화령 아래 은은하게 퍼질 날을 기대해 본다. 거기에 학교 도서관이 큰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소규모 학교도 폐교되지 않고 지역문화 형성의 중심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새해에는 사과나무 아래에서 책 읽는 엄마들이 더 늘어났으면 좋겠다. 사과향기가 그들이 읽은 책에 배어 우리학교 도서관까지 은은하게 묻어오기를 기대한다.

(2007. 12. 7)

 

청주문화의 집 발행 <돌다리> 2007년 12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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