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청주와 청주 사람들 25

문덕리에는 수선화가 피었네

문덕리에는 수선화가 피었네 문덕리 가는 길에 벚꽃이 지천이다. 구사리를 지나 산덕리 고개를 넘어가는 길은 벚꽃이 산기슭에 피어난 진달래와 어우러져 꽃잔치를 이룬다. 나무들의 요술이 참으로 신비롭다. 메마른 땅에서 색채를 길어 올리는 것도 예사롭지 않지만, 색채의 잔치가 사람들의 삶과는 달리 쫓김 없는 항심(恒心)을 보여 더욱 그렇다. 마을에는 봄꽃이 장마 끝을 알리는 구름처럼 고샅에서부터 산기슭으로 하얗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벚꽃이 꽃비를 날리며 다 떨어지고 나면, 배꽃이 만개하여 온 마을을 하얗게 뒤덮으리라. 남아 있는 이들이나 떠난 이들이나 수몰 이주민의 가슴에 남아 있는 한을 다시 한 번 애잔한 꽃비로 날리리라. 문덕리에는 화려한 복숭아꽃보다 하얀 배꽃이 어울리고, 살구꽃보다 벚꽃이 더 조화롭게 느..

구름 향기 -회남면 은운리에서-

구름 향기 -회남면 은운리에서- 마지막 모롱이를 돈다. 구름재에 박힌 얼음이 한낮의 햇살에 녹았다. 질척거리는 황토길에 세로로 날선 칼돌이 차위를 놓는다. 차창을 여니 귓전에 스치는 바람이 차다. 마지막 응달 웅덩이에는 얼음이 녹아 흙탕을 친다. 구불구불 돌고도는 길이 멀고도 험하다. 호수가 발아래 보인다. 방금 지난 농촌 체험마을인 회남면 분저리가 용틀임 너머로 숨어버렸다. 모롱이를 돌아서자 따사로운 햇살이 솔잎에 부서진다. 묘지에는 할미꽃이 보송보송하겠다. 회색 골짜기에서 금방이라도 구름이 올라올 것 같다. 여기부터 은운리(隱雲里)라는 얘기이다. 골짜기도 봄을 맞아 숨겨놓은 구름을 풀어놓는 것인가. 금방이라도 모락모락 맑은 향기가 피어오를 듯하다. 여기는 회남․안내길-보은군 회남면에서 옥천군 안내면으..

지금 후곡리에 가면

지금 후곡리에 가면 모롱이를 돌아서자 어떤 사람이 길을 막아선다. 차를 세우고 내려섰다. 그의 얼굴은 이미 불콰하다. 사향탑(思鄕塔) 앞에 스무 명도 넘는 사람들이 앉아서 소주를 마시고 있다. 그가 이끄는 대로 자리에 앉았다. 뚜렷한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바쁠 것도 없이 떠나온 길이 아닌가. 문의를 지나 후곡리로 가는 길에 거의 마지막 굽이를 돌아서면 거기가 바로 북대골이다. 이 북대골 에움길 모서리에 사향탑이 있다. 대물려온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이들이 물에 잠긴 고향 마을을 그리며 세운 비이다. 비문은 기교도 없고 문리도 없다. 예쁘게 화장한 흔적도 없다. 그렇다고 군더더기도 없다. 그래서 더 투박한 이 글이 가슴을 후빈다. 낯선 사람들과 함께 자리에 앉아 있자니 의문이 꼬리를 문다. 여기는 문..

문의면 노현리의 달집 태우기

문의면 노현리는 청주에서 청남대 가는 쪽으로 가다가 흥수아이로 유명한 두루봉 선사시대 유적지 입구 바로 직전에 왼쪽 구릉에 자리잡고 있다. 이 마을은 피반령에서 내려오는 산 줄기가 동서로 갈라져 동으로는 구룡산을 이루고, 서로는 대청호로 스며든다. 그 가운데 작은 냇물이 호수로 흘러간다. 산 줄기 양 언덕으로 마을이 발달되어 있다. 시냇물에서 산 언덕까지 논 밭이 있어 사람들은 논 밭을 갈아 씨뿌리고, 샘을 파서 물마시면서 순박하게 살아 왔다. 마을 앞에 청남대로 들어가는 2차선 포장 도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끔씩 까맣게 높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지금은 북쪽으로 청원 상주간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고가도로가 흉물처럼 마을을 가로지른다. 노현리마을의 전경 그래도 문의면 노현리는 해가 지면 달이 떠오른다...

달빛과 불

불 속의 달(문의면 노현리 달집태우기 2006. 2. 12) 불은 이미 올랐다. 아직은 푸른빛이 가시지 않은 초저녁 하늘에 불이 타오른다. 붉은 너울의 끄트머리에 검은 연기가 치솟는 것으로 보아 방금 달집에 불을 붙였나 보다. 상원(上元)의 둥근 달은 이미 동산에서 한발 높이로 둥실 떠올랐다. 서산에는 엷은 분홍빛 노을이 아직 남았다. 사람들은 불빛만큼 신이 나서 풍악을 따라 너울거린다. 불꽃도 시나위를 아는 듯 춤을 춘다. 불은 점점 무섭게 타오른다. 한 길 가웃은 되게 쌓아 올린 장작더미가 일시에 타오르며 내는 불꽃은 형언할 수 없는 모습으로 하늘로 치솟는다. 선홍의 불빛은 하늘에 오를수록 검붉은 색으로 흩어진다. 아픔인 듯 소망인 듯 불더미가 탁탁 토해내는 불똥들이 하늘에 치솟았다가 흩어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