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속의 달(문의면 노현리 달집태우기 2006. 2. 12)
불은 이미 올랐다. 아직은 푸른빛이 가시지 않은 초저녁 하늘에 불이 타오른다. 붉은 너울의 끄트머리에 검은 연기가 치솟는 것으로 보아 방금 달집에 불을 붙였나 보다. 상원(上元)의 둥근 달은 이미 동산에서 한발 높이로 둥실 떠올랐다. 서산에는 엷은 분홍빛 노을이 아직 남았다. 사람들은 불빛만큼 신이 나서 풍악을 따라 너울거린다. 불꽃도 시나위를 아는 듯 춤을 춘다.
불은 점점 무섭게 타오른다. 한 길 가웃은 되게 쌓아 올린 장작더미가 일시에 타오르며 내는 불꽃은 형언할 수 없는 모습으로 하늘로 치솟는다. 선홍의 불빛은 하늘에 오를수록 검붉은 색으로 흩어진다. 아픔인 듯 소망인 듯 불더미가 탁탁 토해내는 불똥들이 하늘에 치솟았다가 흩어 떨어진다. 나는 치솟는 불길을 보면서 흙을 믿었다가 인간에게 배반당한 농민들의 한을 본다. 타오르는 불꽃이 토해내는 울분처럼 보이는 것은 정월 대보름 달집태우기의 본래 모습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전통의 달집을 태우기의 의미가 횡액을 태워 세상을 정화시키는 것이라면, 오늘의 불로 농민의 아픔을 깨끗이 정화시켰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달집태우기의 불빛으로 주위는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풍악도 시들해지고, 사람들은 떡시루 곁이나 고기 굽는 화덕으로 돌아가고, 몇몇 불태울 아픔이나 달에 대한 소망이 아직도 남아 있는 사람들만 타는 달집의 주변을 서성인다. 불은 이 땅의 설움을 다 태워버릴 듯이, 농민의 아픔을 살라버릴 듯이 더욱 무섭게 타오른다. 농민들의 마음이 저런 모습일까? 소망이 저런 모습일까? 무섭다. 아니 서럽다. 아니 아프다. 뼈가 저리게 아프다.
문의면 노현리 대보름 달집태우기에 오기를 정말 잘했다. 낮에 이곳을 지나면서 장작으로 달집을 만들고 고사를 준비하는 농민들을 보고 망설였는데 정말 오기를 잘했다. 그저 행사를 구경하고, 떡이나 한줌 얻어먹으며, 오늘에 재현되는 세시풍속 사진이나 한 장 찍으려 했는데, 농민의 마음을 읽으며 아픔을 나눌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아직도 액을 태우고 풍년을 점치고 비는 달을 향한 농민의 소망을 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보던 달집은 짚으로 이엉을 엮어 만들었었다. 그런데 오늘은 장작을 어릴 때 보던 달집 높이로 쌓고 새끼를 둘러 신성함을 표시했다. 때문에 불은 더 오랫동안 무섭게 타오른다. 하늘로 치솟는 불 너울을 보면, 고대인들이 화신(火神)으로 섬기던 이유를 알만하다. 인간이 사는 땅에서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하늘로 솟구치는 불꽃을 보면서 사람들은 화신이 소망을 신에게 대신 전해주기를 바라기도 했을 것이다.
타오르는 불 너울 너머로 하얀 달이 오른다. 불더미 속에 달이 들어간다. 달이 붉고 푸짐해 보였으면 좋으련만 한없이 희고 엷기만 하다. 이미 검은색으로 변했지만 티도 없이 맑은 하늘에 달은 처연할 정도로 희게 떠있다. 하얀 달이 너무 처연해서 나는 불꽃 너머로 바라 보았다. 그러나 달은 더욱 희게 보인다. 사람들은 말로 내뱉지는 않았어도 올해도 뾰족함이 보여주지 않는 야속한 달을 뒤로 하고 화덕에 모여 고기를 굽는다. 사실 오늘의 풍농(豊農)을 달이 점쳐 주는 것은 아니다. 달이 아무리 풍요롭고 튼실하면 뭘 하겠는가? 농민을 우습게 아는 사람들이 이 땅을 지배하는데…….
불은 활활 타오르지만 풍악도 시들해지고 웅성거리던 사람들도 흩어졌다. 사진을 찍던 나도 공연히 민망해져서 고기 굽는 화덕에 가보았다. 참숯에서 돼지고기가 고소하게 익어가지만 입맛은 그렇게 고소하지 않다. 소주를 내손으로 따라 마셔 보았지만 그도 단 맛을 낼 리 없다. 내 흥도 시들해져서 타는 불, 떠오르는 달을 뒤로 하고 농민의 아픔을 밟고 흥청거리는 불야성의 잔인한 도시로 돌아왔다.
(2006.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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