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향기
-회남면 은운리에서-
마지막 모롱이를 돈다. 구름재에 박힌 얼음이 한낮의 햇살에 녹았다. 질척거리는 황토길에 세로로 날선 칼돌이 차위를 놓는다. 차창을 여니 귓전에 스치는 바람이 차다. 마지막 응달 웅덩이에는 얼음이 녹아 흙탕을 친다. 구불구불 돌고도는 길이 멀고도 험하다. 호수가 발아래 보인다. 방금 지난 농촌 체험마을인 회남면 분저리가 용틀임 너머로 숨어버렸다.
모롱이를 돌아서자 따사로운 햇살이 솔잎에 부서진다. 묘지에는 할미꽃이 보송보송하겠다. 회색 골짜기에서 금방이라도 구름이 올라올 것 같다. 여기부터 은운리(隱雲里)라는 얘기이다. 골짜기도 봄을 맞아 숨겨놓은 구름을 풀어놓는 것인가. 금방이라도 모락모락 맑은 향기가 피어오를 듯하다.
여기는 회남․안내길-보은군 회남면에서 옥천군 안내면으로 통하는 도로-의 절정인 구름재 마루이다. 내리막 구비가 시작되는 곳에 차를 세웠다. 희끗희끗 눈 기운이 남아 있는 은운리 을미기마을 어귀에는 봄이 망설이고 있다. 온통 회색의 고요가 골짜기를 메웠다. 양지마다 생명들은 봄꿈을 꾸느라 분주한데 맞아줄 아무도 없다. 잡초 더미에 덮인 옛집, 비닐하우스가 마을 어귀 청청한 낙락장송을 무색하게 한다.
기우뚱거리며 아주 천천히 내려갔다. 두어 구비를 돌아 샘터에 차를 세웠다. 향나무 초록이 봄을 맞아 싱그럽다. 샘을 덮은 판자를 열어 보았다. 물은 이미 용솟음을 멈췄다. 마을을 적시고 대여섯 가구에 생명수가 되었던 물도 그들을 따라 떠나 버렸을까? 마당가 은행나무 밑에는 떨어져 절로 벗겨진 은행알이 소복하다. 역한 냄새도 없다. 주워가는 사람이 없으니 그대로 자연으로 돌아간 것이다. 잡초에 덮인 텃밭에는 어찌 남아 있었는지 골파가 파랗다.
무너진 옛집 마당에 컨테이너가 방을 대신하며 먼지가 소복하다. 뒤엉킨 살림살이, 지붕 덮은 뒤란 대나무가 스산하다. 예전에 요긴하게 쓰였을 농기구가 마당에 흩어져 너절하다. 비껴 내리는 햇빛이 흙을 발라 빚어낸 바람벽에 댓잎 그림자로 수를 놓고 있다.
무너진 담 밑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니 마당이 제법 넓은 집이 역시 대숲에 숨었다. 사랑채도 있고 방앗간도 있다. 외양간도 따로 있다. 이 마을에서 제일 큰집이거나 부잣집이었던 모양이다. 사랑채의 무너져가는 바람벽에는 날짜를 알 수 없는 신문지가 옛 사연을 기억하듯 펄렁거린다. 마루에 올라 보았다. 닭울음소리가 들린다. 환청이다. 무너진 돌담 너머로 부침개 접시가 넘어온다. 환상이다. 지난밤 아낙네의 달아오르던 꿈이 담을 넘는다. 보는 이도 없는데 낯이 뜨겁다. 환각이다. 은운리 을미기마을은 마을만 있고 사람은 없다. 모두 떠났다. 그러나 언덕배기 묵은 밭이랑에는 두고 떠난 삶의 향기가 묻혀 있다. 싹이 돋을 것 같다.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다. 몇구비를 돌아내려가 보았다. 마을 어귀의 한 가옥에서 연기가 난다. 목덜미에 기름이 흐르는 개는 흙탕물을 뒤집어쓴 내 차를 보고 죽어라고 짖어댄다. 차안에 있는 빵 냄새를 맡았는가? 아내의 분 냄새를 맡았는가? 내게서 세속의 짠 냄새를 맡았는가? 우리 내외에게서는 은운리의 구름 향기가 나지 않는 모양이다. 차가 두 대나 세워져 있다. 번쩍거리며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보아 짠내는 거기서 더 난다. 이 마을은 이제 탈출을 소망하는 도시인에게 점유당하기 시작한 모양이다.
계곡 바위틈을 흐르는 물이 앓는 소리를 한다. 고개를 구십 도로 젖혀도 꼭대기가 보이지 않는 등성이에 소나무가 푸르다. 기슭에는 생강나무가 노랗게 향기를 품어댄다. 지난해 무성했던 갈대에 봄 햇살이 다박다박 묻었다. 비포장도로가 문득 끝나고 굴삭기 굉음이 좁은 골짜기에 요란하다. 농부가 굴삭기로 비탈밭을 고른다. 밭 끄트머리에 있는 비닐하우스가 눈부시게 하늘빛을 반사한다. 마을 회관 앞에는 트랙터가 일꾼을 기다리고 있다. 나도 거기 차를 세웠다.
비닐하우스에 가 보았다. 칠순을 넘긴듯한 노파가 혼자 앉아 시금치를 다듬고 있다. 수려하지는 못해도 노지에서 났는지 빛깔은 이들이들하다. 온상에는 고춧모가 나어린 병정들이 열병식을 하는 것 같다. 고구마는 막 움을 틔워 보랏빛으로 햇살을 받는다. 상추도 뽀얗게 올라온다. 단간장에 양념을 넣어 쌀밥을 비벼 먹으면 오후가 행복하겠다. 할머니는 이곳이 지경말이라고 일러 주었다. 옥천 땅인 줄 알았는데 보은 회남 땅이라고 한다. 다섯 가구가 한집처럼 산다고 한다. 골짜기로 더 들어가면 싸리골이 나온다. 거기는 더 두메겠지.
아내가 점심으로 대신하려고 가져온 제과점 빵을 내놓았다. 갑자기 도시의 향이 비닐집 안에 가득하다. 너그러운 도시 아낙 때문에 노파의 메말랐던 입에 침이 마를 새가 없다. 도회의 향이 그리운 노인과 두메에 숨어있는 구름 향기를 동경하는 중년 여인의 만남이다. 나누어 먹었으면 좋겠는데 얼굴은 고마워하는 빛이라도 손은 빵으로 가지 않는다.
“시집와서 오늘까지 이 골짜기를 못 떠난대요. 남들은 다 떠났는데……. 시동생도 가고 자식들도 다 내 보냈는데 우리만 못가네요. 집이라도 새로 짓고 살았으면 좋으련만 그도 맘대로 안 되고……. 종중 땅이라고 집을 못 짓게 하네요. 도조나 계속 받으려는 속셈이지 뭐래요.”
원망인지 푸념인지 실타래처럼 풀려나온다. 옥천에서 떠난 시내버스가 텃밭 끄트머리에서 돌아선다. 한 사람이 시장바구니를 들고 내린다. 버스는 텅 비었다. 아침에 나간 이만 들어온다. 눈 녹은 물이 주절대며 내려오는 싸리골이라는 골짜기로 들어간다.
“농사를 지으면 시내버스를 타고 내다 파세요?”
버스 때문에 아내의 화제가 바뀌었다. 팔아 줄 수도 있음을 넌지시 비쳐 보는 것이다.
“여름내 밭고랑에 엎드려 있으면 그럴 새도 없어요. 아들딸이 차 가지고 와서 실어다 돈을 사 와요. 그것들을 공부시키느라 손발이 다 갈라졌는데 그게 보람이지요. 천안에도 가 있고, 인천에도 가 있고. 가까운 대전에도 있고……. 칠남매가 사방 흩어져 산대요.”
“자녀 분들이 모두 착한가 봐요. 어른은 안 계세요?”
아내가 또 묻는다. 여자들의 관심은 시부모를 모시는 일이다. 노파는 시름을 풀어내듯 산골 살이 한이 다시 터져나온다.
“시어머니가 있대요. 구십, 말로만 치매. 날 아주 벗겨 먹으려 해요.”
말로만 치매? 아, 구순 노인은 애기가 다 되어 있을 터였다. 치매도 아니면서 치매인 척하며 노각처럼 쉰내 나는 그의 노고(老姑)는 온갖 얄미운 짓을 다하며 이미 치매에 걸릴만한 나이인 며느리를 괴롭히는 모양이다. 그래도 하나도 괴롭지 않아 보인다. 그도 역시 그렇게 늙어갈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훗날 이 늙은 며느리는 누구를 향하여 '말로만 치매’를 누릴 것인가? 아, 위 아래로 희생만 해야 했던 그는 누릴 것이 없다. 노인들의 투정을 군말없이 받으며 두메에서 희생할 세대는 여기서 마지막이다. 을미기 사람들이 구름 향기를 버렸듯이 떠난 이들이 돌아올 리 없다.
여인들은 오랜만에 만난 고부간으로 착각했는지 이야기꽃이 질 줄을 모른다. 이들의 착한 대화에서 향내가 난다. 봄꽃에서만 향기가 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 맑고 고우면 사람에게서도 향기가 난다. 착한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이렇게 향기가 배어 있다. 은운리의 숨은 구름에 이야기의 향기가 배어 세상으로 세상으로 퍼져나간다.
우리가 자리를 뜰 때까지 빵 봉지는 도시의 향기로 유혹하는데 노인은 잘도 참아낸다. 나이 많은 며느리도 오늘만큼은 '말로만 치매'를 달래기가 훨씬 수월하리라.
(2011. 3. 19.)
고개마루에서 내려다 본 을미기 마을
을미기 마을의 폐허가 된 가옥
대나무에 덮인 폐옥
샘물
마늘밭은 누가 갈았나
대숲에 싸인 마을 흔적
떨어져 쌓인 은행 알
바로 전에 누가 지난 듯 남아 있는 오솔 길
모두 떠난 빈방에 벽지로 바른 신문들
지경말에서 싸리골로 들어가는 도로
지경말 온상에서 시금치 다듬는 노파
예쁘게 자라는 고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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