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추억의 올챙이국수
올챙이국수는 예전에는 올챙이묵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졌었다. 만드는 과정이나 먹는 방법이 국수와 묵의 중간쯤 되기 때문에 묵과 국수로 불리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 모양이 올챙이를 닮았다는 데에는 모두 동감인 것 같다. 사실 만드는 과정을 보면 묵에 더 가깝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올챙이묵을 처음 알게 된 것은 70년대 초 단양 의풍학교에 근무할 때다. 거기는 주식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강냉이가 많았다. 강냉이는 삶아도 먹고 밥에 섞어 먹기도 했다. 가을에 강냉이를 수확하여 가마솥에 넣고 삶아 말려서 겨울에 다시 삶아 양식으로 먹기도 하고, 낟가리처럼 쌓아 말려 낟알을 따서 쌀이나 보리쌀과 반반씩 섞어 밥을 짓기도 하였다. 아이들이 먹는 도시락의 옥수수밥은 도시락이 쌀밥이 아니라고 투덜거렸던 내게는 보는 것 자체가 아픔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밀가루로 수제비나 칼국수만 해 먹는 것이 아니라, 술빵을 쪄 먹듯이 좀 있는 집에서는 올챙이묵이란 것을 해먹었다.
은주네는 학교에서 개울을 하나 건너 언덕배기에 살았다. 나는 남자애들 보다 더 말괄량이인 은주보다 은주 아빠를 더 좋아했다. 그러나 그건 핑계일 뿐이고 은주보다 더 말괄량이인 은주 엄마를 좋아한 것인지도 모른다. 은주 엄마 내외는 알뜰하고 건실한 농부였다. 아이들을 대처에 내보내 공부시키고, 그 아이들이 성공하면 언젠가는 갑갑한 준령을 넘어가 살고 싶은 산골사람의 평범한 꿈을 가진 그런 사람들이었다. 은주 아빠는 대처사람인 선생들과 술잔을 기울이면서 은근이 대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 남편의 속내를 헤아리는 그네는 종종 별식을 해 놓고 은주를 보냈다. 가족과 떨어져 외로운 저녁 식사를 맞아야 하는 나도 역시 그네의 별식과 별식같이 구수한 삶의 푸념이 좋아 단발머리를 팔락이며 징검다리를 팔짝팔짝 건너오는 은주를 기다렸다. 아이가 초등학교 삼학년이 되었어도 같은 이십대라 마음은 좀 통했을 것이다. 그네의 올챙이묵 솜씨는 정말 일품이었다.
저장 옥수수는 더 익어야 하고 벼베기는 아직 먼 초가을 산골에는 선들바람이 불었다. 은주가 징검다리를 건너왔는데 무얼 했냐니까 올챙이묵이라 한다. 나는 이름조차 처음 들었다. 이내 올챙이의 하얗고 오동통한 배때기가 입안에서 톡톡 터지는 것 같은 감각이 살아와서 진저리를 쳤다. 그러나 만드는 과정을 봐야하겠기에 은주 손을 잡고 서둘러 개울을 건너 언덕으로 올라갔다.
은주엄마 내외는 올챙이묵을 만들고 있었다. 옥수수가루를 커다란 가마솥에 넣고 묵을 쑤듯이 아주 되직하게 끓인다. 노란 옥수수 죽이 하얀 김을 내면서 끓는다. 옛날 초등학교 때 끓여주던 옥수수죽이 생각나서 가슴이 아팠다. 은주 아빠는 그 굵은 팔뚝에 울퉁불퉁한 근육이 일어나도록 커다란 주걱으로 젓는다. 구수한 냄새가 마당에 가득하다. 옥수수죽이 다 끓어 되직해지면 커다란 찬물이 담긴 다라 위에 구멍이 송송 뚫린 박바가지를 놓고 옥수수죽을 붓는다. 뚫린 구멍으로 옥수수죽이 송송 떨어진다. 떨어지자마자 등이 하얀 올챙이로 살아서 찬물 속으로 헤엄쳐 사라진다. 차가운 물에 바로 식어 굳으면서 올챙이 모양이 된 것이다. 그 올챙이들을 찬물에 한두 번 더 헹구어 다시 물에 담가 두었다가 조리로 건져서 묵처럼 갖은 양념을 한 간장국물에 말아 먹는다. 시원한 열무김치국물에 말아 먹기도 한다고 한다.
우리는 이른 가을 언덕위의 마당 평상에 앉아 옥수수 엿술을 마시면서 올챙이묵을 먹었다. 올챙이묵은 씹을 틈도 없이 사르르 헤엄쳐 목구멍으로 넘어가 버린다. 남는 것은 간장의 양념 맛뿐이다. 올챙이 묵 맛을 제대로 보려면 입안에 들어간 올챙이들이 도망가지 않도록 입안에 붙잡아 자근자근 씹는 기술을 먼저 배워야 한다. 그러면 드디어 옥수수를 뜯어먹는 것만큼 힘들이지 않고 구수하고 달착지근한 옥수수의 특유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젊으면서도 은주 아빠랑 살아온 세월이 만만치 않은 은주 엄마의 푸념 겸 자랑을 들으면 산골하늘에도 가을 달이 떠올랐다. 호두나무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한결 목덜미에 서늘하다.
그 올챙이묵이 정선에서는 올챙이국수가 되어 있었다. 콧등치기국수로 저녁이 시답잖은 울트라마라토너인 친구 연선생의 시장기를 치료하기 위해서 자다 말고 일어나 찾아간 시장 먹자골목은 이튿날 5일장을 맞기 위해서 올챙이묵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친구가 된장찌개백반을 비우는 동안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면서 의풍의 은주엄마를 생각했다. 사는 게 뭔지도 모르던 시절에 본 두 내외의 사는 모습이 새삼 그리웠다. 입안에 은주엄마의 올챙이묵이 살살 기어들어가는 것 같다.
산골 사람들에겐 보릿고개 말고도 배고픔의 고개가 또 하나 있었다. 보릿고개처럼 막막하지는 않지만 가을걷이를 기다리는 늦여름의 고개도 그들에게는 참으로 넘기 힘든 고개였을 것이다. 벼베기는 멀었고 옥수수는 다 익지 않은 늦여름의 오후도 배고픔은 마찬가지다. 그래서 덜 익은 옥수수를 따서 삶아 반죽하여 올챙이 묵을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또 옥수수 먹기에 신물이 난 여인네들이나 치아가 약한 노친네들을 위해서 생각해 낸 가련한 지혜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그 시절에 올챙이묵은 고급음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먹고 돌아서면 다시 배고픈 이 음식에 의풍의 추억보다 애처로움이 담겨있는 것은 나도 그들과 같은 보릿고개의 한 동포이기 때문일 것이다.
옛날의 애환이 담긴 올챙이묵이 정선 평창 영월의 관광 상품이 되어 있었다. 정선에서 올챙이묵은 끝내 먹지 못했다. 그 이름이 올챙이국수로 바뀌어 생소할 뿐 아니라, 두메의 구황식품이 오늘은 배부른 사람들의 기호 식품도 넘어서서 흥밋거리가 되어버린 아픔 때문이지도 모른다. 마치 보리개떡을 먹으며 기억할 과거의 아픔이 없는 철부지들처럼 나도 올챙이묵의 아픔을 이해할 자신이 없는 철부지 중의 철부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