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원초적 행복(맛)

구황식으로 먹던 도토리묵

느림보 이방주 2004. 6. 22. 20:09
  오늘은 도토리묵 이야기나 해야겠다. 세상이 변해서 이만큼 호화롭게 살게 되면 별 요상한 걸 먹고살게 될 줄 알았었는데, 요즘은 건강식이니 웰빙이니 하는 것들이 사실은 옛날 굶던 시대에는 배고파서 할 수 없이 먹던 음식이었다. 곧 옛날에 끼니를 에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먹던 메밀국수, 메밀묵, 메밀부침개, 시래기나물, 도토리묵, 도토리떡, 도토리부침개 등 옛날에는 이런 음식들이 모두 구황식(救荒食)으로 먹던 음식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추억의 도토리묵이다. 한겨울 긴긴밤에 밤참으로 고소하고 알싸하던 배추뿌리나, 달콤 매콤하고 이가 시릴 정도로 시원하던 날 무를 깎아 먹는 것도 좋았다. 하지만 동치미 국물에 갸름하게 친 도토리묵을 말아먹던 그 딻따롬한 맛도 잊을 수 없다.

 

도토리묵을 밤참으로 먹던 시대는 그래도 형편이 나았을 때이다. 농사가 흉년이면 도토리는 오히려 풍년이었던 것은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따지고 보면 그것도 다 고마운 하늘의 섭리였을 것이다. 가을걷이 할 일이 별로 없는 흉년이면, 사람들이 모두 머리 검은 다람쥐가 되어 온 산의 도토리를 주워 모은다. 그래서 벌레가 구멍을 파고 들어가기 전에 절구에 콩콩 바수어야 한다. 마음은 급한데 어머니는 그 으스러진 도토리를 커다란 함지에 물을 붓고 몇 번이고 물을 갈아주셨다. 탄인이라는 성분의 떫은맛을 우려내신 것이다. 또다시 맷돌에 갈아 거르고 가라앉혀서 앙금을 말려 두면 사실은 겨울 먹거리로 한 몫 하게 마련이다. 저녁에는 그냥 묵만 먹고 잠자리에 든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이렇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도토리묵이 한 때는 훌륭한 식량으로 더 가난한 사람들의 명줄이 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세월이 좋아져서 맛좋고 배부르면서도 살은 찌지 않는 것들을 찾으니까 도토리묵도 그 중에 하나가 되어서 찾아다니면서 먹는 시대가 되었다. 그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대전 구죽리 도토리묵 촌이다. 대전에서 연구단지를 거쳐 청주로 오는 길에 구죽리라는 곳이 있다. 빼곡한 빌딩 숲 속에 정말 참나무 숲이 우거지고 겨우 자동차 한 대가 비켜갈 만한 오솔길을 돌고 돌면 1970년대쯤으로 돌아간 듯한 마을이 나타난다. 제법 널찍한 마당이 나오고, 숨바꼭질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여기저기 묻어있는 좁은 골목을 돌고 돌면, 골목마다 할머니들이 그 때 그 시절에나 볼 수 있었던 장판을 벌여 놓고 정겨운 삶을 팔고 있다. 거기서 기장쌀이나, 검은콩 같은 것은 그냥 우리 농촌에서 난 것이라고 믿고 사는 것이 좋다. 역시 먹는 것은 마음이 중요하니까. 사람들의 왕래가 제일 빈번한 집 마당에는 설거지물이 너저분하고 사람들의 신발이 뜰이고 마루 밑이고 마구 흩어져 있으면 옳게 찾았구나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묵밥 한 그릇을 주문하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금방 내온다. 기계로 썰어낸 것처럼 똑같이 가늘고 길게 쳐서 김치, 양념장, 깨소금, 김 등을 넣은 것이 다른 집과 다를 게 없는데도 맛은 기막히게 좋다. 우선 묵채가 가늘고 길어도 차져서 젓가락으로 집어도 부서지지 않는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면서도 맛이 고소하다. 큼직하게 한 숟가락씩 입에 넣고 입천장으로 꾹 눌러 주기만 하면 미끈덕 그냥 넘어가 버린다. 씹을 것도 없다. 조밥을 반 공기쯤 말아서 후딱 해치우고, 두고 온 가족 생각이 나거들랑 포장한 묵사발을 몇 개 더 사면 된다. 입에 남은 양념장 맛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도토리의 떫은맛이 입안을 개운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맛은 아무것도 아니다. 내 친구 연 선생네 묵밥은 정말 진미 중에 진미다. 이건 정말로 친구 내외가 등산을 하면서 주워 모은 도토리를 정성을 다하여 우려내고 다듬어서 쑨 묵인데 꼭 옛날에 먹던 그 맛이다. 백화점 묵을 젓가락으로 집지 못해서 걱정하는 사람도 이 묵만은 절대로 걱정할 것 없다. 젓가락으로 집어서는 절대로 부서지지 않으니까. 그리고 옛날의 그 쌉스름하고 딸뜨름한 맛이 그대로 남아 어린날 도토리 껍질을 까서 다람쥐처럼 앞니로 조금씩 긁어 맛을 보았을 때 기억을 생생하게 한다. 묵밥의 참맛을 거기서 볼 수 있는 셈이다. 죄받을 소리지만  쉽게 불러오는 배가 원망스러워 지기가지 한다.

 

도토리묵 복이 터진 날은 함께 등산 다니는 선배 중에 서선생님이란 분이 있는데, 사모님의 묵 쑤는 솜씨가 또 기가 막힌다. 산에서 먹는 도토리묵이라 별다른 양념을 할 수 없는데도 그 맛은 그냥 일품이다. 묵을 그냥 얇게 납족납족하게 썰어서 도시락에 담아 오시는데 양념장이 맛있는 건지 도토리묵이 맛있는 건지 온 산이 다 내 것처럼 행복해 진다. 그런데 새로운 묵 먹는 방법까지 배우게 되었다. 알맞게  썰어서 윤이 반짝반짝 나는 묵을 양념장에 푹 찍어서 마른 김에 싸서 먹는 것이다. 약간 떫은 묵 맛과 고소한 김 맛이 어울려 신비의 맛을 낸다. 김과 도토리묵이 그렇게 맛의 구색이 맞는 건지 처음 알았다.

 

도토리묵은 무공해 식품이고 적은 열량으로 비만을 방지하고 장을 강하게 하며 항암 작용을 하기도 한다. 그보다 아콘산을 함유하고 있어서 인체 내의 중금속이나 유해 물질을 흡수 배출시키는 작용을 하기도 한다고 하니, 현대 물질문명의 찌꺼기들을 내품어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정상에 올라 묵 한 조각을 집간장 양념장을 꾹 찍어 마른 김에 싸서 입에 넣고 하늘을 바라보면 옛날 그렇게 살던 투박한 마음으로 돌아가게 된다.

 

옛날 흉년에는 굶주림에서 우리를 구휼했던 도토리묵이 이제 풍요로운 뱃살에서 오는 마음의 가난을 해방하여 내면의 영양실조로부터 구하는 새로운 구휼식이 되었다.

(2004.  6. 21.)


'느림보 창작 수필 > 원초적 행복(맛)' 카테고리의 다른 글

딸꾹질 없는 떡먹기  (0) 2004.07.18
꽃피는 날에 생각나는 떡  (0) 2004.07.14
원시의 香 -쑥국-  (0) 2004.04.19
진채(陣菜)로 먹는 다래순  (0) 2004.03.26
눈내리는 날의 김치찌개  (0) 2004.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