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로 동해안을 달리면, 당연히 바다로 고개가 돌아간다. 사람들은 으레 바다를 바라보겠지만, 나는 소나무를 본다. 감포에서 설악까지 하룻길은 온통 소나무 천지였다. 바닷가 모래장과 도로 사이에 운집해 서 있는 소나무, 망양정, 월송정 소나무, 경포 부근의 소나무, 그리고 이름도 모르는 바위 섬 위에 우뚝 솟은 소나무들이 모두 그 옛 사람들이 흔들림 없는 모습을 은은히 드러낸다.
북으로 차를 몰아 동해시를 지날 무렵 먼 산에는 얼마전 대설 주의보까지 동원하면서 내린 눈으로 온통 산이 눈 천지였다. 그 눈 위로 우뚝우뚝 서있는 소나무는 차라리 하나의 절개였다.
바닷가에 있는 소나무가 어떤 종류의 나무인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이 분명 우리 아파트 앞 매봉산 소나무와는 다른 종류인 것만은 틀림없을 것 같다. 우선 키가 크고 줄기가 매끄러우며, 가지가 15도 가량 아래로 쳐져 있고 그 가지 끄트머리쯤에 소복하게 솔잎을 이고 있는 모습이 멋스럽다.
주문진의 어느 호텔 -일출을 바라볼 수 있는- 에서 하루를 묵고, 거짓말처럼 객실 창으로 발갛게 타오르는 일출을 바라볼 때, 호텔 마당에도 소나무 한그루가 있었다. 멋스럽게 쳐진 소나무 가지 사이로 가마 속에서 익어가는 자기처럼 발갛게 해를 볼 수 있었다.
우리는 대관령을 넘어야 한다. 몇 번 운행을 해본 길이지만 낯설고 눈 때문에 불안하다. 처음에 우리는 강릉 근처에 나들목이 있는 것으로 착각했다. 그래서 길을 잃은 것이 아닐까하는 불안으로 공사중인 고속도로를 저속으로 달렸다.
고개가 시작되는 부분은 공사로 길이 꾸불꾸불하고 여러 갈래로 갈라져서 길가에 내린 석자쯤 되는 눈을 볼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경사가 좀더 급해지고 굽이가 잦아지자 자연히 저속으로밖에 달릴 수가 없어 밖을 내다볼 수 있었다.
길가로부터 산은 온통 눈의 천지였다. 하늘을 향하여 쭉쭉 뻗은 소나무는 아직도 하얗게 눈을 이고 있다. 눈이 내린 뒤로 날씨가 따듯해졌지만 고도가 높아 갈수록 소나무가 가지 끝에 이고 있는 눈의 무게는 힘겨워 보인다. 소나무들은 대개 열 그루, 스무 그루씩 뭉턱뭉턱 군락을 이루고 있고, 소나무 아래 잘다란 잡목들은 하얗게 눈 속에 파묻혀서 하얀 도화지에 검푸른 소나무를 그려 놓은 것처럼 그렇게 깨끗하게 보인다.
대관령 소나무는 갖은 풍상과 비바람을 다 이기고, 바다에서 몰아치는 바람도 이기고, '개발'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파헤쳐 질 때도 용케 견디고 버티어 왔지만, 소리도 없이 내리는 부드러운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가지가 꺾이는 놈도 있다. 그것은 하나의 아이러니로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준다.
흔들림이란 무엇인가? 내 안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의 군락도 풍상과 몰아치는 바람을 이겨낼 수 있을까? 아니면 바람에 흔들려 가지가 부러질 것인가? 내 안에도 소리 없이 부드러운 눈이 내려 가장 멋지고 낭만적인 한 가지가 꺾이기라도 할 것인가. 나는 대관령 소나무를 바라보며 갖은 상념에 젖어 어느새 휴게소에 이르렀다.
대관령 휴게소는 온통 눈의 천지였다. 휴게소 마당은 눈으로 북을 준 것처럼 돋아 올랐고 울퉁불퉁하다. 멀리 눈을 바라보며 따끈한 커피 한 잔이 마시고 싶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빼다가 내가 좋아하는 K아무개 시인을 뵈었다. 참으로 반가웠다.
"선생님 아니십니까? 저는 선생님 시를 좋아하는 아무갭니다"
인사를 청했다. 그도 역시 따라서 반가워했다. 나도 '보잘 것 없지만 문단에 간신히 이름 석자를 끼워 넣은 사람'이라는 것을 밝히자 한 번 더 악수를 청한다. 우리는 휴게소 문에 서서 커피를 마시며 앞산을 바라보며 소나무 얘기를 했다. 선생도 보드랍고 조용한 백설에 가지가 꺾이는 소나무의 아이러니에 공감을 표현했다.
내 차로 돌아오면서 하얗게 머리카락 날리는 노 시인을 바라보면서, 한 그루 소나무를 보는 듯 했다. 우리 같은 소인의 눈에는 그의 삶이 참으로 구불구불하게 생각되었다. 불제자로 수도 생활을 하다가 보드랍고 잔잔한 눈을 만나 환속하여 삶의 모습을 바꾼 그 분의 꺾임은 과연 아름다운 흔들림인가? 사실 한 가지 꺾이는 흔들림을 겪었다 해도 그의 삶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음을 우리는 시를 통해서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낭만적인 흔들림이 아닌가?
대관령을 내려서니 하늘이 화창하다. 환하게 웃는 어린아이의 맑은 눈을 한 곳에 모아 놓은 것처럼 맑고 투명하다. 미풍도 없이 화창한 내리막길의 소나무들은 한층 더 검고 꿋꿋하게 서 있다. 한 점 흔들림도 없이. 내 안에 뿌리 내린 소나무처럼….
저 은단풍나무 우듬지 하나 꼼짝 못하는 고요여
이윽고 살랑
작은 이파리 건드려
오 미풍이여
그동안 나는 너를 모르고 살아왔구나
(高銀의 《미풍》 全文)
그는 자신에게 불어온 바람을 이렇게 노래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미풍이었다. 고요히 가라앉는 눈송이도 아니고, 내 안에 깊이 뿌리내린 소나무 가지 하나 흔들지 못하는 작은 미풍이었다.
(2001.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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