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비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악행을 버리고 선행을 닦아 불법을 깨닫기 위하여 좌선에 들 때 경책사가 수행자의 어깨 부분을 내리쳐서 졸음이나 자세 등을 지도하는 데 쓰이는 장척(長尺)을 죽비로 알고 있는데,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견해도 있다.
원래는 절에서 수행자를 지도할 때 사용하는 대나무로 만든 법구(法具)를 말한다. 약 4, 50cm 길이의 통대나무를 2/3 정도는 가운데를 쪼개어 양쪽으로 갈라지게 하고, 가르지 않은 부분은 손잡이로 만든다. 오른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갈라진 부분으로 왼손바닥을 치면 '착'하는 맑은 소리를 낸다.
그래서 좌선할 때 입선(入禪)과 방선(放禪)의 신호로 사용되며, 예불, 입정(入定), 참회, 공양, 청법(請法)에 이르기까지 죽비 소리에 맞추어 대중이 행동을 통일하게 되어 있다.
지난 2월 아내와 함께 경주를 여행할 때, 석굴암 앞 선물 용품 가게에서 대나무로 만든 것은 아니지만 향나무를 대나무 모양으로 깎아 만든 죽비 ―香비라 해야 할까? 그냥 향나무 죽비라 하자.―를 발견했다. 감동을 주지 못하고 졸음만 부르는 나의 문학 수업을 들어야 하는 아이들을 깨워가면서 가르쳐야 하는 나는 이 진귀한 물건을 갖고 싶어서 만지작거리다 말았다. 만질 때마다 향내가 은은히 퍼져서 머리가 맑아 오는 듯 했다.
오른손으로 잡고 왼 손바닥을 '탁' 치면, 죽비보다 더 맑고 깨끗한 소리가 향내를 타고 온 방안에 가득 찰 듯 했다. 부처님의 마음이 가섭에게 전해지듯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마음이 전해질 듯 했다.
그러나 값이 생각보다 비쌌다. 반감으로 사지 않았는데 자꾸 뒤가 돌아 보였다. 이 땅에 모든 젊은이를 미몽에서 깨어나게 할 수만 있다면 아무리 비싸다 해도 값이 문제 되랴. 아직도 손바닥에 은은한 향기가 배어 있었다. 손바닥에 밴 향이 솔솔 퍼질 때마다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수업 시간에 졸음으로 괴로워하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죽비 생각이 간절해서 하루 날 잡아 속리산이라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이들이 수학 여행을 갔다 오면서 제주에서 이 향나무 죽비를 사왔다. "과연 우리 부담임 선생의 맘에 들까." 고 귀여운 녀석들은 불안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나는 고 녀석들 향내 나는 마음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제주 향나무라 그런지 육지 것만큼 단단하지 못한 것이 흠이기는 했으나, 연한 만큼 향은 더 짙었다. 오른 손에 쥐면 손아귀에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꼭 맞았다.
길이는 40cm 쯤 되어 들고 다니기에 알맞았다. 약간 납작한 나무를 지루하지 않게 다섯 마디의 대나무 모양으로 매끄럽게 깎아서 소리는 더욱 청명하였다. 게다가 금방 벌어 떨어진 아람처럼 발그레한 색깔에 윤기까지 자르르 흘러서 날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다. 만든 사람의 정성이 그리고 선물한 40여명의 아이들의 마음의 향이 배어 있는 듯했다. 그래서 그런지 향나무 죽비를 들고 계단을 오르다가 머리를 톡톡 치면, 맑은 소리가 계단을 울리면서 향이 머리에 배어 내면까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 후부터 이 '향나무 죽비'는 내 손을 떠나지 않았다. 수업 시간에는 꼭 들고 들어갔다. 그럴 리는 없지만 혹시 사르르 졸음이 오는 아이들이 있으면 오른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왼손바닥을 치면 '착-'하고 청명한 소리를 낸다. 창밖에 녹음이 짙어 가는 날 유리창 밖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는 놈이 있으면 '차작 착-'하고 손바닥을 두드리면 샛별 같은 눈이 제자리로 돌아온다.
어느날 내가 '차작 착-'하고 소리를 내는 순간, 한 녀석이 무슨 연유에서인지 "깨어나라." 하고 외마디 소리로 추임새를 올려 주어서 한 바탕 웃음을 터뜨린 일이 있었다. 그 후부터 '차작 착-'하는 불교적인 의미의 자연음에, 마치 게쎄마니에서 "아직도 자느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 늘 깨어 있어라."하며 게으른 제자들의 잠을 깨우던 그리스도의 깨우침처럼 "깨어나라"는 공감의 목소리로 교실은 더욱 신성해지고, 더욱 활기가 넘치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젊은이들이 항상 깨어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재산인가?
이제 아이들의 "깨어나라"하는 외마디 소리는 이제 일상의 쳇바퀴 속에서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나를 깨우치는 소리로 들리기 시작했다. 나의 '향나무 죽비'는 아이들을 깨우치는 가르침의 죽비가 아니라, 바로 나를 깨우치는 각성의 죽비가 된 것이다. 생각해 보면 아이들이야 늘 깨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루하루, 해가 갈수록 침잠하는 것은 바로 내가 아닌가.
하얗게 침전하는 과육 알갱이처럼 끊임없이 가라앉는 나를 아이들은 수없이 깨우쳐 일으킨다. "깨어나라" 하는 순간 나의 침전은 하얗게 흔들려 푸른 하늘로 떠오른다. 향나무 죽비 덕분에, 아니 아이들의 '깨어나라' 덕분에 나의 침전은 그 순간만이라도 '서으로 가는 달 같이도 갈 수 있을 것'처럼 부풀어오른다.
아이들과 나는 불타와 가섭의 염화 미소를 배운 것인가? "차작 착" 향나무 죽비의 맑고 깨끗한 소리에, "깨어나라" 아이들의 깨우침은 오늘도 나를 일으켜 세운다.
(2001.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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