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껍질벗기(깨달음)

자작나무의 껍질벗기

느림보 이방주 2001. 4. 24. 11:20

지난 15일 한 모임이 주선하는 관광버스를 타고 설악산 관광을 떠났다. 관광버스를 타고 하는 여행은 직원 연수나, 수학여행 인솔이 더러 있을 뿐 나로서는 참으로 낯선 일이라 기대 반 우려 반이었다. 더구나 차안에 탄 사람들은 대부분 사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부인들이라 더욱 그랬다. 우리 일행은 여행의 성격을 잘 모르고 부부동반으로 버스를 탄 것이다. 이상한 일이 예상되면서 걱정이 앞섰으나 나는 '오늘에야말로 관념이라는 그 질곡의 껍질을 벗고 새로 탄생해 보겠다'는 각오로 이를 악물었다.

차가 한계령을 오를 때 한계령 잦은 굽이에는 온통 하얗게 자작나무 천지였다. 자작나무들이 열심히 껍질을 벗으면서 하얗게 새로 태어나고 있었다. '껍질 벗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껍질 벗기'라면 자작나무 따라갈 중생이 어디 있겠는가? 자작나무는 그 어린아이 손바닥같이 하얀 겉살이 옆으로 갈라지면서 자랑처럼 더욱 하얀 속살을 드러낸다. 벗겨지는 하얀 껍질은 그 이면이 누런색에 붉은 색이 섞여 배배 꼬이기 때문에 새살로 돋아 나오는 새 껍질이 더욱 하얗게 보인다. 자작나무는 그렇게 커간다. 껍질을 벗으면서 커가는 자작나무…

자작나무는 그렇게 껍질을 벗으면서 제몸을 키우고 더욱 통통하게 살찌울 뿐 만 아니라, 더욱 하얗게 깨끗한 속살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람들은 일생 동안 껍질 벗기를 시도하다 결국 한 껍질도 못 벗고 이 아름다운 세상을 한하면서 넘어서게 되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시도하는 껍질 벗기라면 우선 생각나는 것이 저마다 하나씩 가지고 있는 탈을 벗는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善의 탈을 하나씩 쓰고 있다. 남이 볼 때 어떻게 인식될 지도 모르면서, 僞善의 탈을, 비굴한 웃음의 탈을, 친절이라는 거짓의 탈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빨리 벗어버려야 한다고 하면서도, 봉산 탈춤의 탈처럼 더욱 단단히 전형의 탈을 써야하는 것이 아닌가 하면서 사회를 의심하는 것이다. 결국 이런 전형의 탈을 쓰는 것은 내 탓이 아니라 탈만을 인정하는 사회의 탓이라고 동정을 구하면서 말이다.

탈을 벗으면, 껍질을 벗으면, 누런 이면이 천하에 드러나는데, 하얗던 표면의 색깔은 또르르 말려 보이지 않게 되는데, 그리고 더욱 하얀 새살이 나오는데, 탈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게 우리 사람이라는 중생이다. 아니, 그게 바로 불쌍한 나의 실체이다.

껍질을 또르르 말아 버리고 하얗게 새살을 드러내는 자작나무처럼 나는 언제 나의 탈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껍질 벗기를 佛家에서는 윤회의 탈을 벗어나 성불(解脫成佛)하는 것이라 믿고 있다. 사람에서 미물로, 미물에서 다시 짐승(중생)으로, 중생에서 다시 아비규환으로, 아비규환에서 미타찰로 윤회하는 고통, 이 질곡의 탈에서 벗어나 영원한 부처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껍질 벗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감히 대가를 치르고 이러한 환희를 맛볼 수 있을까. 나는 이러한 껍질 벗기를 현실에서 본다. 비록 그 수명은 짧지만 7년간의 고행 끝에 껍질을 벗고 매미가 되는 굼벵이에게서, 잠자리에게서, 징그러운 벌레에서 껍질을 벗고 나오는 나비에게서, 중생들의 해탈을 본다. 그래서 나는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땅속 깊은 곳과 어두컴컴한 물 속과 파란 하늘이라는 三生을 다 겪는 매미, 잠자리, 나비가 부럽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가장 무서운 껍질은 도덕과 규범이라는 탈이다. 쇠사슬보다도 더욱 튼튼한 추상의 탈 속에 우리의 자유를 가두어 억압 속에서 가슴을 치게 한다. 우리 여인네들은 烈이란 규범의 사슬에 묶여 조선시대를 보냈고, 우리 남정네들은 선비의 義理라는 겉 희고 속 누런 자작나무 껍질을 쓰고 한 세월을 보냈다.

나에게는 규범의 껍질을 벗고 훨훨 자유의 하늘을 날 수 있는 용기가 없다. 너무나 단단한 껍질 속에서 꽁공 묶여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비록 하얀 색깔의 이면에 불그죽죽한 이면을 들킬지라도 오동통하게 살찌면서 조금은 굵어질 수 있도록 껍질을 벗고 싶다. 껍질 벗는 순간만이라도 시원한 맛과 새 살이 돋는 멋을 느낄 수 있지 않겠는가? 그 끔직스러운 색깔을 보고 손가락질하는 이들이 있더라도 다시 하얀 속껍질이 있지 않으냐고 항변하면서 자유를 누리고 싶다.

저절로 脫俗의 경지에 들기를 바라야 하는가? 李箱처럼 "날개야 돋아라. 한 번만 돋아다오."하고 절규해야 하는가? 어느 것이 진정한 자유란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참으로 질곡에서 벗어나 껍질을 벗고 참으로 잠깐 동안의 자유를 누리는 많은 여인들이 내 자리를 다녀갔다. 춤을 추자는 40대 여인도 있고, 노래를 부르라는 뚱보도 있고, 술을 마시라는 잠자리 안경도 있었다. 사람은 다 '도토리 키재기'라는 원망 섞인 순정파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결국 아침에 이를 악물었던 각오만큼의 껍질을 벗지 못했다. 한계령에 서 있는 자작나무가 제아무리 껍질벗기를 해도 그 이면은 불그죽죽하다 손가락질 했어도 나는 나의 한 껍질도 벗지 못한 것이다. 아니 나의 껍질은 이상하게 더욱 단단하게 동여매어지는 듯했다. 한계령을 넘으면서 본 자작나무 때문인가 보다. 때묻은 껍질을 벗고 하얀 속살을 드러내어 자랑해 보아도, 속살의 이면의 색깔이 훤히 드러날 것을 겁내는 비겁함 때문이다. 하얀 속살 속에 누런 이면을 감출 수 없는 자작나무의 숙명처럼 굳어진 나의 이면이 두려워서…….

(2001. 4. 19)


'느림보 창작 수필 > 껍질벗기(깨달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죽비  (0) 2001.09.28
대관령 소나무  (0) 2001.07.24
解憂所에서  (0) 2001.06.15
대왕암 갈매기  (0) 2001.03.01
  (0) 2000.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