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껍질벗기(깨달음)

느림보 이방주 2000. 10. 12. 22:52
일요일 도시 탈출. 현대인은 그들이 그리던 문명을 만들어 놓고 이제 거기를 탈출하지 못해 안달이다. 오래 전부터 대야산을 한 번 가보고 싶었다. 3년 전쯤 10월 마지막 날 경상도 가은 쪽에서 한 번 남 따라 올라가 본 일이 있는데, 그날은 산 아래서는 늦가을에 내리는 비가 산 중턱부터 싸락눈이 되더니, 정상을 향하는 능선에 이르자 함박눈으로 변하여 아름다운 설화만 실컷 보고 정작 산을 보지 못했었다. 눈구름이 시야를 가려 가까이 있는 봉우리조차 식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 가을에는 반드시 대야산을 한 번 올라 보리라 맘먹고 있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별로 먼데 있는 산도 아니고, 높아서 힘겨운 산도 아닌데, 계획만 세워 놓으면 빗나갔다. 더구나 송면에서 오르는 새로운 길은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태초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말에 단풍 들 때부터 지도를 차안에 두고 함께 갈 사람을 찾았다. 산이란 아무나 같이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산에서 만이라도 세상을 잊어버려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리기가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나 함께 산행을 했다가는 마음을 씻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귀를 더럽히고 오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산행에 제일 잘 맞는 짝은 누가 뭐래도 아내이다. 그러나, 나의 아내는 나와 함께 산에나 다닐 수 있는 팔자 좋은 사람이 못된다. 늙으신 아버지가 계시고, 공부하는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침 식사를 끝내고 바로 작년까지 한 학교에 근무했고 금년 봄 함께 산행한 일이 있는 이 선생에게 전화를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저쪽에서 내키지 않는 답을 했다. 날씨가 구질구질하다는 둥, 밀린 일이 많다는 둥. 나는 내가 그에게 내키지 않는 인물이 된 까닭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걸 안다는 것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내키지 않으면 여우같은 첩이 가자 해도 안 갈 것이고, 가고 싶으면 혼자라도 떠나는 것이 등산이 아닌가? 그래서 오늘은 혼자라도 기어이 대야산에 오르기로 했다.
등산복을 갈아입고 호떡 두 개, 요구르트 두 개, 캔 맥주 카스 하나, 물병, 자일만으로 간단한 배낭을 메고, 폐교된 삼송 초등 학교 옆을 지나 우리 나라에서 장수하시는 어른이 가장 많이 산다는 농바위 마을에 도착한 것이 10시 30분쯤 되었을 때다. 동네 어귀에 주차를 하고 등산화를 갈아 신고 출발한 시간은 10시 45분이다. 마을 앞에 흐르는 시내가 말할 수 없이 깨끗하다. 하얀 조약돌 위를 구르듯 시원한 물소리를 내며 바삐 흐른다. 이 물에 발을 씻고, 물소리에 귀를 씻어 좋은 말만 하고 사는 어른들은 오래 살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마을 끝에 고목이 다된 느티나무는 마을의 역사를 말해 주는 듯하다. 못미처 그 아들쯤 되어 보이는 젊은 느티나무도 한 그루 서 있다. 정상을 바라보니 검은 구름이 감돈다. 그러나, 왠지 비는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차안에 있는 우산을 챙기고 방한, 방풍, 방수 점퍼를 배낭에 챙겼다.
20분쯤 농로를 걸으니 산 입구에 이르렀고, 산골짜기마다 계류가 흘러 골짜기가 온통 자연의 합주가 시작되는 듯 하다. 역시 출발하기를 잘 했다. 산기슭을 타고 잔디 위로 난 길은 비단을 깔아 놓은 듯 하다. 약간 비탈길이 시작되자 요즘 내린 가을비 같지 않은 가을비로 길이 패이고 물이 괸 곳도 있다.
20 분쯤 더 걸으니 갈림 길이 나왔다. 어디선가 까마귀 두세 마리가 '까옥 까옥' 짖어 댄다. '저 놈의 까마귀, 재수 없게 왜 날 보고 짖어 대냐? 퉤퉤…….' 기분 나쁘다. 갈림길에서 5 분쯤 걸으니, 길 양편으로 파란 산죽(山竹)이 시원스럽게 펼쳐 있다. 계곡을 흐르는 물은 금방 발등을 적실 듯하고 싱싱한 산죽은 나를 젊게 한다. 바위 위에 저절로 입혀진 바위 이끼는 봄비를 맞은 듯 싱싱한 빛깔이다.
이제부터 숲 사이로 난 길을 걸어야 한다. 숲이 있고, 물이 흐르고, 새소리가 있는 길을 혼자 걷는 맛은 경험하지 않은 이들은 짐작할 수도 없을 것이다. 숲은 오리나무, 굴참나무, 물푸레나무, 소나무, 낙엽송, 단풍나무 같은 것들이 어울려 하늘을 가린다. 비에 씻겨 미끈한 줄기들은 하늘을 향하고, 가지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에 반사되어 눈이 부시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을 막고 깨끗한 솔소리[松 ], 바람소리만을 들려준다. 물은 맑고 깨끗하고 차다. 이끼 한 점, 물때 한 점 없는 하얀 바윗돌들 사이로 부서지고 퉁그러지며 흘러내린다. 흘러내리며 지르는 소리는 찌든 가슴의 때를 한꺼번에 씻어 내는 듯하다. 거기에 어울려 들리는 새소리는 아귀다툼 속에서 지쳐 병[耳鳴症]이 되어 버린 내 귀를 '뻥―' 뚫어 주는 듯 하다.
옛 사람은 학문의 목적은 성인(聖人)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율곡 선생은 성인이 못 되거든 될 때까지 정진(精進)하라고 했다. 성인(聖人)이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귀[耳]가 이미 순해져서 듣기를 잘[王]하고, 입[口]에 이미 가시가 없어져서 말하기를 잘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럴 듯한 풀이라고 생각된다. 우리가 성인의 본보기라고 하는 공자는 '六十而耳順하고 七十而從心所欲하되 不踰矩호라'라고 외쳤다. 자신의 학문의 과정을 밝힌 말이겠지만, 육십에 듣기를 잘해서 칠십이 되니 법도에 어긋난 일에는 하고자 하는 마음도 일지 않았다니, 이것이 성인에 대한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정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귀를 씻어야 한다. 현대의 온갖 잡소리에 찌들대로 찌든 불쌍한 우리의 귀를 씻어야 한다. 온갖 잘못된 선입견으로 꽉 막힌 귓밥을 솔소리, 물소리, 새소리로 씻어 내야 한다. 귀를 씻으면 더불어 눈이 깨끗해지고, 가슴이 깨끗해지고, 마음이 깨끗해 질 것이다. 드디어 세상을 세상 그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색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명을 통해서가 아니라, 세상의 색 그대로, 세상의 소리 그대로 보고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밀재로 오르는 이 길은 성인의 경지로 오르는 길이 아니겠는가?
물소리가 아득하게 들리는가 싶더니 굴참나무 숲 사이로 하늘이 보인다. 밀재에 도착한 것이다. 여기까지 쉼 없이 걸어 온 것이다. 가은에서 넘어오는 길이 보인다. 눈 내리던 날 우리가 가슴 울렁이며 바라보던 용추 폭포가 저 아래에 있겠지. 눈을 하얗게 뒤집어썼던 소나무, 만개한 설화를 자랑하던 나뭇가지들이 새삼스럽다. 이제부터는 아는 길이다. 바위에 걸터앉아 시계를 보니, 12시 20분이다. 요구르트 두 개를 까먹었다. 카스를 비울까 하다가 여기부터 길이 험한 것이 생각나서 참았다. 초겨울 하늘은 가을 하늘처럼 파랗다. 머리에 둘렀던 수건을 벗어 짜니 땀이 줄줄 흐른다. 마음의 찌꺼기, 몸의 때가 수건에 배어 나와 줄줄 흐르는 것이다. 몸과 마음이 한결 가볍다.
정상을 향하여 오르는 길은 바위를 안고 돌기도 하다가, 바위 밑으로 빠져나가기도 하고, 가랑이가 찢어지게 가까스로 잡고 올라야 하는 험한 길이다. 그러나, 이런 아기자기함이 없으면 어찌 등산이라고 할 수 있으랴. 주능선에 오르자 산 아래가 보이기 시작한다. 멀리 정상에 모여선 사람들이 빨갛게 보인다. 몇 시간만에 보는 사람의 모습인가? 칼날 같은 능선을 타고 정상에 가까이 갈수록 세상이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 보이는 세상만이 왜 아름다운 것인가? 모든게 다 그렇다. 멀리서 보아야 아름답다. 산도, 폭포도, 정이품송도, 공자도, 존경하는 선생님도 다 멀리서 보아야 아름답다. 가까이 서면 작은 때까지 보인다. 나도 그렇다. 멀리서 봐야 보인다. 자신을 멀찍이 놓고 바라 보라. 자신이 바로 보이지 않는가? 그러나 자신에 이르면 멀리 볼수록 아름다운 게 아니다. 멀리서 볼수록 오히려 가까이서는 볼 수 없었던 때가 보인다. 보잘 것 없는 자신의 실체가 보인다. 이 아름답고 웅장한 자연에 비하면 말할 수 없이 비소(卑小)한 존재임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에 대해서 비소(誹笑)를 금치 못할 것이다.
바위틈을 지나 칼날을 밟고 도착한 곳이 '白頭大幹 大耶山' 정상이다. 1시 20분. 오르막길에 남보다 취약해서 밀재에서부터 1 시간이나 족히 걸렸다. 정상 표지석 위에 앉아 밥을 먹는 젊은 여편네가 있다. 희양산, 조항산, 남군자산, 가령산이 다 내려다보고 있지 않는가?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가은의 범바위골이 보이고, 보람원 붉은 벽돌집이 보이고, 쌍곡으로 넘어가는 포장도로가 갯지렁이처럼 기어간다. 멀리 속리산 연봉들이 가물가물 구름 속에 갇혔다. 시끄럽게 떠들던 경상도 사투리가 다 내려가고 덩그러니 나만 홀로 남았다. 남아 있는 호떡 두 개로 시장기를 가리고 능선과 맞닿은 검푸른 하늘빛에 감동하다가 하산 길에 나섰다.
새로 두 시. 하산은 험하고 비탈길이 많다는 조왕골로 하기로 했다. 정상으로 오르던 길로 얼마쯤 되돌아오다 오른쪽으로 돌아 내려오는 길은 다니는 사람이 없어 낙엽에 덮여 숨었다가 다시 나타나고, 나타났다가 다시 숨어서 한참씩 나를 애먹였다. 한 15분쯤 길을 잃어 헤매기도 했다. 길을 잃는다는 것. 방황이 아닌가? 저 높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길이 저렇게 뚜렷이 있는데, 엉뚱하게 천길 낭떠러지로 미끄러지는 위험한 길에 가 헤매고, 우거진 잡목에 긁히기도 하고, 낙엽 쌓인 웅덩이에 발목을 다치기도 하는 우리는 모두 멍텅구리다. 슬기롭게 산세를 살피고, 길이 날 만한 곳을 찾아, 잡목을 의지하고, 다져진 흙을 찾아 밟으며, 길을 찾아야 한다. 아울러 하늘빛도 보고, 계곡의 고요함도 느끼면서 삶의 맛을 여유롭게 즐길 줄 알아야 한다.
물소리가 커지는 것을 보니 갈림길이 가까운 모양이다. 물은 더욱 많아지고, 산새 소리도 더욱 잦아진다. 까마귀란 놈이 기다렸다 또 짖어 댄다. '까옥 까옥' 짖으려면 짖어라. 마음껏 짖어라. 네 놈을 불길하게 생각하는 건 인간의 어리석음이다. 산에서만큼은 내 귀도 이미 솔소리, 물소리, 새소리에 깨끗이 씻어진 귀가 아닌가? 이미 공자의 귀, 성인의 귀만큼이나 씻어진 귀가 아닌가? 이참에 발이나 씻자. 계곡 바위에 앉아 등산화를 벗고 양발을 벗어 던지고 발을 담근다. 발가락 두 군데가 터져 있다. 혼자 하는 산행. 나로서는 강행군이었나 보다. 발이 시리다. 그러나 참고 천천히 씻는다. 죄 많은 주인이 죄 많은 곳만 골라 디뎌서 세상에 온갖 죄라는 죄는 다 묻었어도 말없는 나의 종. 나는 속죄하는 마음으로 아리듯 시린 발을 천천히 골고루 닦았다. 이제 귀를 씻고, 눈을 씻고, 마음을 씻고, 발까지 씻었으니 까마귀야 짖어라. 네가 아무리 짖어도 마음속에 작은 흔들림이라도 일어날 줄 아느냐? 오늘은 나도 성인이나 다름없다. 솔소리, 물소리, 새소리에 귀를 씻고, 싱싱한 산죽, 파릇한 이끼에 눈을 씻은 오늘만은 나도 세상을 굴절 없이 보고들을 수 있는 성인이 된 줄 왜 모르느냐? 그러나, 진정한 성자는 산이다. 산은 오늘처럼 교만해진 나를 용서하고 있지 않은가? 성스러운 산의 울력으로 몇 낱 티끌을 씻었다 해서 무슨 성인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제 스스로 성인이라고 교만해 하는 사람은 한 낱 치졸한 인간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다 용서하고 포용하는 산이 진짜 성인이다.
출발지에 도착하니 3시 30분쯤 되었다. 배낭엔 카스가 그냥 남았다. 대야산 준령을 돌아보고 나의 애마 자동차에 열쇠를 꽂았다.

(1997.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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