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서리와 햇살(교단)

이런 담배 맛 보셨습니까

느림보 이방주 2001. 6. 1. 13:52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그러나 전혀 피우지 않는 것이 아니다. 술좌석에 어울리면 남들을 따라 한두 개비 피운다. 또 학교 일로 속상한 일이 있다든지 때로 공연히 우울할 때 또 한두 개비 빼어 문다. 또 골초 선생님들의 천국인 이 진학지도실에 연기가 자욱해지는 쉬는 시간 10분이 괴로울 때 차라리 한 개비 얻어 같이 피우며 덤으로 얻는 피해를 자초하며 콜록거리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 담배 맛을 모른다. 긴장이 계속되는 시기― 가령 대입 원서를 제출하는 시기라든지, 3월 초 교내 인사 시기라든지 하는 때는 맛도 모르는 담배를 목구멍이 붓도록 피워 댄다. 그러면서 잠시 동안만이라도 얻을 수 있는 사색의 안도를 맛볼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담배의 참 맛은 알 수가 없다.

내가 처음 선생이 된 것은 1973년 4월이다. 청주 근교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계속 청주 시내에서 중.고등학교와 청주교육대학을 졸업한 나는 벽지 학교의 실정을 전혀 알지 못했다. 더구나 교육 실습까지도 교대부속초등학교와 청주시에서 가장 중심가에 위치한 중앙초등학교에서 마쳤기에 더욱 그랬다. 오히려 내가 초등 학교 다닐 때와 엄청나게 달라진 교육 환경에 놀랐다. 그리고 시골 학교에 가면 적어도 내가 다니던 때보다는 낫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를 걸었다. 그런데 막상 충북에서도 가장 벽지인 삼도 접경의 의풍초등학교에 부임하여 3학년을 담임하고 보니 정말로 믿어지지 않는 사실들이 날마다 발견되었다.

내가 맡은 3학년은 모두 44명이었다. 아이들이 깨끗하고 얼굴이 밝아서 무척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첫 수업 시간에 국어 교과서를 읽히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44 명중에 3학년 국어 교과서를 읽을 수 있는 아이가 다섯 손가락을 다 꼽을 수 없었다. 다음 시간에 나는 1학년 교과서를 빌려다 읽혔다. 간신히 운을 떼는 아이까지 모두 일곱이었다. 이것은 장난이 아니다. 엄연히 내게 닥친 사실이다. 이들이 2년간 무엇을 배웠는가? 나는 선생으로서 아이들에게 부끄러웠다. 이 해맑은 아이들이 내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는 것이 어떻게 아이들의 죄란 말인가?

나는 우선 원인 분석을 하기 위하여 교무 주임 선생님과 상담을 했다. 1학년 때는 나이 많으신 여선생님이 담임을 하셨는데, 부군이 정신 질환이 있어 늘 학급을 비우다시피 하다가 사직을 한 다음 아이들이 담임 맛을 보지 못하였고, 2학년 때는 교감 선생님이 담임을 하셔서 한 번 출장이면 2박 3일을 굶어야 했고, 3학년이 되어서는 새로운 선생님이 부임했으나 벽지 발령에 불만을 품고 사직한 다음 내가 그 후임이란다. 모두 이유가 충분하다. 그러나 그런 충분한 이유들은 모두 아이들 가르치는 일보다 우선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나는 아이들을 안심시켰다. 글을 알아야 한다는 것과 내가 너희에게 글을 가르쳐서 책을 읽도록 눈을 틔워 줄 것임을 약속하였다.

나는 우선 1학년 교과서의 낱말을 쓰기 쉬운 것과 어려운 것으로 분류하여 카드 한 장에 낱말 열 개 씩 27개를 만들었다. 그래서 음절수가 적은 낱말이나 익히기 쉬운 낱말은 1급, 난해하다고 생각되는 낱말은 27급으로 정하였다. 그래서 그들을 방과후에 지도하기로 하였다. 말이 나머지 공부지 학급의 전체 인원이 거의 다 남으니 나머지 공부라고 할 것도 없었다. 날마다 낱말 열 개를 익히는 사람은 칭찬해 주고 일찍 집에 보내 주었다. 낱말 열 개를 익히고 집에 일찍 돌아가는 아이들의 성취감에 들뜨는 모습도 기분 좋은 볼거리였다.

아이들은 의외로 빨리 익혔다. 어떤 아이들은 공부를 시작한 지 한 시간도 안되어 읽고 쓰고 하였다. 하루에 2 3급을 뛰는 아이들도 있었다. 시작한지 열흘이 못되어 27급을 떼어 바로 1학년 국어 교과서 읽기 공부로 장족의 발전을 하는 우수한 아이도 일곱 명이나 되었다.

나는 신이 났지만 한편으로는 아이들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그야말로 열심히 지도하였다. 시작한지 20일 만에 일곱 명의 아이들은 3학년 국어 교과서를 줄줄 읽어서 나머지 공부가 필요 없게 되었다. 나머지 아이들도 한 달을 넘기자 거의 한글을 깨우쳤다. 이제 방과후까지 남아서 나를 애태우는 아이들이 예닐곱 명 정도만 남게 되었다.

그런 어느날 오후 그날도 예닐곱 딱한 아이들을 데리고 한글 지도를 하고 있었다. 복도 쪽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출입문이 드르륵 열렸다.
"여기가 우리 병상이 교실인 동?"
머리가 하얀 할머니 한 분이 문을 열고 들어서신다. 고향에 계신 어머니 생각이 났다.
"어서 오세요. 병상이 교실 맞아요. 제가 병상이 선생이고요. 할머님이십니까?"
"야, 맞십니더. 철모르는 우리 손주 가르치시니라꼬 선상님이 얼마나 골몰하시니껴? 제가 남부끄러워서 죽겠니더"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병상이가 아주 착하고 학교 생활도 잘하고 공부도 잘합니다. 벌써 1학년 책은 줄줄 읽는 걸요"
"어데요. 그러잖아도 1학년 디가 입때 글 읽는 소리를 당체 안 듣기더니만도 요지막엔 어찌된 영문인지 글 읽는 소리가 들리니, 이제 머 이 늙은이사 죽어도 원이 없십니다"
"할머니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오래오래 사셔야 병상이가 대학도 가고, 저 같이 선생도 돼서 월급도 타고 하는 꼴을 보실게 아닙니까?"
"어데요, 이제 머 지는요 소원이 없습니다. 선상님 촌에 살다 봉께 지가 머 대접할게 있시야지요. 쓴 담배라도 한 대 태워 보이소. 그락고 지가 고사리 나면요 좀 말리드릴깁니다. 하모 우리 병상이 글구녕을 틔워 주싰는데 뭐는 못할까. 이런 고마울데가……"
하시면서 '개나리' 한 갑을 한사코 맡긴다. 나는 어른에게 담배 선물을 받는게 웬지 쑥스럽고 거북해서 받지 않으려고 했으나 병상이 할머니가 간절히 권하므로 고맙게 받았다. 피우지 않는 담배이지만…….

"선상님이요. 그래 조석으로 식사는 우예 하니껴? 하숙을 하시는동, 우예 머 하숙집 밥이 입에 맞으실라는동?"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주 맛있게 해 줍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아이들에게 소리 높여 책을 읽게 하고는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불을 붙여 한 모금 깊게 빨았다. 정신이 몽롱하다. 담배 연기를 타고 하늘을 둥둥 나는 듯 했다. 어지러워 의자에 몸을 깊게 기대었다. 세상에 이런 황홀한 담배 맛도 있구나.

그 후 아이들은 두 명을 제외하고 모두 한글을 해득하고 4학년에 진급하였다. 지금도 교직 첫발을 디디던 그때의 그 열정을 잊지 못한다. 돌이켜 생각하면 대학에 한 명이라도 더 집어넣을려고 바등거리는 지금이야 어디 선생이라고 할 수 있는가? 대학에 합격시키려는 목적이 무엇인가? 그게 진정한 교육인가 하는 의문이 꼬리를 몬다. 아이들을 대하여 주입식으로 마구 떠들어대는 수업을 하다가 문득 서쪽 하늘을 쳐다보면 그때가 생각난다.

나는 스물 두 살 그 때가 진정 선생이었다고 아이들에게 푸념처럼 이야기해 준다. 아이들도 조금씩 이해를 하지만 어떻게 나의 향수를 짐작이나 하겠는가? 그런 수업을 마치고 돌아와 동료 선생님께 담배 한 개비 얻어 피워 물어 본다. 어디 그 때 그 담배 맛이 날까 그 황홀한 맛이 …….

(1996. 8. 5) 1997. 교육월보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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