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서리와 햇살(교단)

준국이와 선주

느림보 이방주 2001. 3. 3. 23:58
초임지에서 4 년을 지내다가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 청원군에 있는 금관 초등 학교이다. 고향이 가까이에 있어서 일주일에 한 번 어머니를 뵐 수 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으나, 선생이라는 참맛을 잃고 직장인이 되어 가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그러나 그동안의 병아리 경험을 살려, 나름대로의 교직관을 굳게 다듬어 가며 진정한 사회인으로 성장하는 바탕을 마련하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저녁에는 책을 읽고 글도 썼으며, 낮에는 아이들을 열심히 가르쳤다.

스물 여섯 청년 교사로 부임한 금관 학교는 말이 청원군이지 단양의 오지 학교나 다름이 없는 법정 벽지 학교였다. 학교 건물은 낡고 교구도 낡고 운동장도 좁았다. 읽을 만한 책도 변변치 않았으며, 독서 지도의 흔적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나는 부임하자마자 5학년 두 학급 중에서 한 학급을 담임하였다. 아이들은 맑고 깨끗하였으며, 학교 주변의 경관이 아름답고 수려하여 그런 대로 꿈을 키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동시와 시조를 지도하였다. 하루에 한 번 씩 시조를 원고지에 써서 지도를 받고 그 작품의 가치를 따지지 않고 교실에 게시하도록 하였다. 차츰 남의 글을 읽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도 하고, 남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습관도 생겼다.

나는 좀 더 용기를 내어 작품집을 만들어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그것은 아이들에게 자신감을 줄 뿐 아니라 남의 글을 대하는 기회를 더욱 확대해 주었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잘된 작품을 모아 책으로 엮으니 저절로 문집이 되었다.

이러기를 두어 달 계속하니 아이들은 솔직한 자기의 표현이 정말로 훌륭한 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을 가지게 되었다. 아이들은 활기차게 학교에 나왔으며, 학급의 모든 일을 제일처럼 생각하고 제가 없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학교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후 나는 본격적인 문예 지도가 하고 싶어서 몇몇 아이들을 모아 동시, 시조를 지도하였다. 그들이 가능하면 스스로 활동하도록 하고 나는 뒤에서 도왔다. 그 때 준국이와 선주가 내 눈에 들었다. 남들보다 글을 잘 쓴다거나 더 예쁘다거나가 아니라, 그들은 남다른 관계였다. 준국이는 늘 선주의 반대쪽에 있었다. 선주는 늘 준국이의 글을 꼬집었다. 그리고 지나칠 정도로 심하게 비판하고 무시했다. 그럴 때마다 준국이는 주눅이 들었다. 눈만 지그시 감고 얼굴이 벌개져서 할말을 못했다.

준국이 집은 금관에서도 깊은 산 쪽으로 시오리 길을 더 가야 했다. 시냇물 옆으로 난 도로를 따라서 십 리 쯤 가다가 신작로가 끊어지면 개울을 건너 오솔길을 걸어서 오리쯤 가야 작은 마을이 나오고 바로 거기에 준국이 집이 있다. 그러나 그 가정은 유복하고 아버지가 상당히 활동적이었으며, 생활도 비교적 넉넉한 편이었다. 선주는 학교에서 청주 쪽으로 오리쯤 나오기 때문에 겉으로 보면 문화의 혜택을 더 많이 받고 있는 듯했다. 그런 그들의 줄다리기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들이 졸업과 동시에 나는 다른 학교 전근이 되어서 조금씩 그들을 잊어 가고 있었다. 그런 중에도 나는 그들의 소식을 가끔씩 들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청소년 문학상을 누가 받았느니 하는 얘기로부터 시간이 갈수록 누구는 어느 대학에 가고, 어느 회사에 취직을 했다는 소식을 가끔씩 그들의 전화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준국이와 선주의 얘기는 듣지 못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선주가 한 번 우리 집에 다녀간 뒤로는 전혀 소식을 몰랐다.

그런데 지금부터 한 몇 해전 준국이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 동안 찾아 뵙지 못해 죄송하다느니 하는 인사가 오고 간 뒤에
"선생님, 저 결혼합니다. 반드시 선생님께서 주례를 맡아 주셔야 하겠습니다. 찾아 뵙고 자세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사람아, 나는 이제 마흔 밖에 안되는데 무슨 주례를 맡겠는가? 내가 훌륭하신 선생님을 소개하지"
하면서 어이없어 했다. 그는 전화를 끊고 며칠 뒤에 자기 색싯감과 함께 나를 찾아왔다. 그런데 더욱 놀랄 만한 일은 그 색시가 다름 아닌 선주였던 것이다. 믿어지지 않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이미 그때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닫고 나는 그 의미 있는 결혼식의 주례를 사양할 수 없었다.

나는 '과연 내가 젊은이들의 일생에 가장 중요한 주례를 맡아 볼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하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결혼식은 한 쌍의 젊은이들이 새로운 가정을 탄생시키는 실로 성스러운 통과 의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중요한 의식을 집전하는 사람은 그만큼 성스럽고 깨끗하게 살아서 모든 사람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나 같은 일개 고등학교 평교사가 그런 엄청난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나는 몇 날을 잠을 설치면서 고민하였다. 그러나, 나는 소박하고 착하게 살아온 그들의 결혼에 주례를 맡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성스러운 의식을 주재한다는 사실에 무한한 영광을 느끼었다. 나는 온갖 정성을 다하여 준비를 하였다. 결혼식 2주 전부터 쓸데없는 음주를 삼갔다. 말을 조심하고 날마다 목욕했다. 결혼식 날은 가장 깨끗한 양복을 골라 입고 식장에 나갔다. 그 때의 나의 제자들이 몰려들었다. 혼신의 힘을 다하여 주례사를 하였다. 진정으로 그들이 행복하게 살기를 빌었다.

그들은 지금도 가난한 공무원이지만 행복하게 살고 있다. 그들 소박하고 깨끗한 마음가짐을 버리지 않은 채, 그렇게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1993.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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